“쌍방은 2006년 8월 이후 상당한 시간과 자금을 투여해 아비장에서 벌어진 사건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노력을 벌여왔다. 이 과정에서 해운, 화학, 독극물, 의학, 수의학, 심리학 등 각 분야의 외부 전문가 20명에게 의견도 구했다. 이 전문가들은 선박에서 유출된 화학물질과 사망, 유산, 사산, 기형아 출산, 시력감퇴 및 기타 심각하고 만성적인 질환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세계 40여 개국에 진출해 있는 네덜란드계 다국적 원자재 무역업체인 ‘트라피구라’가 영국 굴지의 법률회사 ‘라이데이’와의 법정 밖 협상을 통해 9월20일 내놓은 ‘최종 공동 합의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트라피구라는 지난 2006년 8월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의 최대 도시 아비장 일대에서 현지 하청업체인 ‘토미’ 쪽이 독성 화학폐기물을 불법으로 처리한 데 따른 주민 집단소송의 피고다. 라이데이는 폐기물에 노출돼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자들의 소송을 대리하고 있다. 이와 함께 트라피구라는 라이데이가 허위 사실을 유포해 자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따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놓은 상태였다. 양쪽이 동시에 발표한 합의문의 뒷부분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라이데이 쪽은 이같은 전문가 의견에 따라 화학물질 유출이 최악의 경우 단기적인 독감과 유사한 증상 등을 야기했을 수는 있지만, 지난 2006년 11월8일 웹사이트를 통해 공표한 것처럼 사망 및 유산 등의 원인이라는 주장을 철회한다. 쌍방은 이로써 트라피구라 쪽이 라이데이를 상대로 낸 명예훼손 소송도 일단락하기로 했다. …트라피구라는 지난 2006년 8월과 9월 아비장 일대에서 화학물질을 폐기처분한 토미 쪽의 행동이 전적으로 일방적인 것이었으며, 트라피구라의 허락 없이 이뤄졌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럼에도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 것에 유감을 표시하며, 이제라도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의 보도를 보면, 이번 합의를 통해 트라피구라 쪽은 3만1천여 명에 이르는 원고인단에게 1인당 약 1700달러씩의 위자료를 지급하기로 했다. 이는 애초 원고들이 기대했던 보상금의 6분의 1 수준에 그친단다. 합의에 따라 소송 원고인단은 추가로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또 자사에 아무런 법적 책임이 없다는 트라피구라 쪽의 주장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됐다. 트라피구라 쪽은 합의문 발표와 함께 내놓은 성명에서도 “이번 합의가 과실 책임을 인정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일반 폐기물이라더니 독성 화학폐기물아비장 일대에서 ‘괴질’이 떠돌기 시작한 건 3년여 전부터다. 등 외신들의 당시 보도를 종합하면, 트라피구라 소속 유조선 ‘프로보 코알라’호가 장기간의 지중해 항해를 마치고 암스테르담 항구에 도착한 2006년 7월2일 비극의 싹이 뿌려졌다. 트라피구라 쪽은 다음 기항지인 에스토니아로 출항하기에 앞서 선박에 실려 있던 ‘250t가량의 일반 폐기물’을 처리하려 했다. 현지 업체인 ‘암스테르담항만서비스’(APS)가 1만5천달러에 폐기물 처리 계약을 수주할 때까지만 해도 이상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다. 하지만 폐기물을 배에서 내리는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폐기물 양이 트라피구라 쪽이 말한 것보다 훨씬 많은 약 500t에 이르렀고, 무엇보다 ‘일반 폐기물’이라고 하기엔 악취가 너무 심했다.
APS 쪽은 즉시 하역 작업을 중단하고, 폐기물 성분 분석 작업을 벌였다. 분석 결과 코알라호에 실린 폐기물은 ‘독성 화학폐기물’임이 밝혀졌다. APS 쪽은 폐기물 처리 비용을 30만달러로 인상해줄 것을 요구했다. 2005년 무려 280억달러의 수익을 올렸던 트라피구라 쪽에선 ‘지나치게 높은 가격’이라며 이를 거부했다. 계약은 파기됐고, 코알라호는 폐기물을 다시 싣고 이틀 뒤 에스토니아를 향해 출항했다. 그곳에서 러시아산 정유 제품을 선적한 코알라호는 나이지리아로 가 짐을 부린 뒤, 다시 아비장으로 향했다.
코알라호가 아비장 항구에 닻을 내린 건 2006년 8월19일이다. 트라피구라 쪽의 요청으로 폐기물 처리를 떠맡은 업체가 바로 토미였다. 는 그해 10월2일치 기사에서 업계 관계자의 말을 따 “코트디부아르에는 고도 독성 폐기물 처리시설이 없다는 점을 트라피구라 쪽이 몰랐을 리 없다”고 전했다. 폐기물을 하역한 토미 쪽은 곧 트럭기사 10여 명을 고용한 뒤, 그날 밤 아비장 일대 10여 곳에 독성 폐기물을 무단으로 버렸다. 특히 쓰레기 매립지가 있던 아비장 외곽 아쿠에도에 가장 많은 양이 버려졌다. 악취에 만성이 된 주민들이 눈치채지 못할 것이란 계산에서였단다.
주민들이 호흡곤란과 구토, 두통, 설사 등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튿날 아침부터였다. 삽시간에 10여 명이 숨지고, 10만여 명이 이상 증세를 호소했다. 괴질의 원인이 유해 폐기물 무단 투기라는 점이 드러나면서 성난 주민들이 아비장 거리에서 격한 시위를 벌였다. 코트디부아르 정부는 트라피구라 관계자 3명을 구금하는 한편, 오염 정화와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사건 발생 6개월 만인 2007년 2월 트라피구라는 코트디부아르 정부에 보상금 1억9800만달러를 지급했고, 당국은 붙잡아뒀던 업체 관계자를 석방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트라피구라 쪽은 “법적 책임을 인정한 손해배상금 명목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최초 오염 이후 3년여가 흘렀지만, 아비장 일대 정화 작업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지루한 법정 공방은 끝없이 계속됐고, 그 새 아비장 주민들은 합의문에 등장하는 ‘사망, 유산, 사산, 기형아 출산, 시력감퇴 및 기타 심각하고 만성적인 질환’에 시달려야 했다. 아비장 오염사고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은 오케추퀴 이베아누 유엔 유해폐기물 특별보고관의 현장조사로 이어졌다. 이베아누 보고관은 지난해 8월과 11월 각각 코트디부아르와 네덜란드를 방문해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지난 9월3일 유엔 인권이사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오염 지역 정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여전히 주민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으며, 피해자에 대한 의료 지원과 보상 등 후속 조처도 미흡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또 코트디부아르 정부에 “국민의 생명권을 보호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라”고 주문했다. 이베아누 보고관은 이어 이렇게 덧붙였다.
“(폐기물 유출 이후) 공식 통계로만 15명이 숨지고, 69명이 입원 치료를 받았으며, 10만8천 명이 현기증과 구토 등 각종 이상 증세를 호소했다. 이로 인한 파급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죽음과 (주민들이 겪고 있는) 온갖 이상 증세와 프로보 코알라호에서 유출된 유해 폐기물과 관련돼 있다는 증거는 확실해 보인다.”
10만여 명 앓게 한 원인은 ‘미궁 속으로’트라피구라 쪽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보고서 내용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사실관계도 부정확하며,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았다”며 흥분했다. 그럼에도 보고서 내용이 알려진 지 보름 남짓 만에 트라피구라 쪽은 법정 다툼을 끝내기로 전격 합의했다. 아비장의 괴질, 그 ‘불편한 진실’은 영원히 가려지고 마는가? 오늘도 북반구의 독성 폐기물이 ‘식권’으로 둔갑해 남반구로 향하고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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