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취업을 원하는 부모는 가족이나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해 자녀의 보호자로 지정해야 한다. 이런 조처를 취하지 않고 출국하면 2500레이(약 100만원)에서 1만레이(약 400만원)의 벌금형에 처한다.”
루마니아 상원이 지난 6월 말 통과시킨 새로운 법령의 일부다. 루마니아 인터넷 매체 <핫뉴스>가 지난 6월30일 보도한 법령 내용을 보면, 일자리를 찾아 외국으로 떠나게 된 부모가 출국 40일 전까지 사회복지 관련 기관에 그 사실을 통보하지 않으면 추가로 벌금형에 처해진다. 이 밖에도 루마니아 상원은 “부모가 해외 취업을 한 경우 자녀가 학교에서 이상 행동을 보이면 담당 교사는 반드시 이런 사실을 관련 교육당국에 보고해야 하며, 이를 어기면 5천레이(약 200만원)~1만5천레이(약 600만원)의 벌금형에 처한다”는 규정도 따로 마련했다. 대체 왜 이런 법령이 등장하게 됐을까?
지난 1993년 마스트리흐트조약에 따라 12개국으로 출범한 유럽연합은 2년 뒤인 1995년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회원국인 오스트리아·핀란드·스웨덴이 동참하면서 15개국 체제를 갖췄다. 소비에트 붕괴 이후 유럽연합 가입을 숙원해온 동구권 국가들에 문호를 연 것은 2004년이 처음이다. 그해 5월 체코·헝가리·리투아니아·슬로베니아·폴란드 등 10개국이 한꺼번에 유럽연합 회원국이 되면서 삽시간에 25개국의 연합체가 됐다. 이어 2007년 1월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어렵사리 그 대열에 합류했다.
유럽연합 회원국이 되면 서쪽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 가난한 동유럽 노동자들은 더 나은 삶,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하나둘 짐을 꾸렸다. 당국의 노동 허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일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별다른 숙련기술이 없는 이들 상당수는 허가 없이 허드레 노동을 하고 있다. 한때 “유럽의 배관공은 모두 폴란드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초기에 이주노동에 적극적이었던 건 폴란드인들이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지난해 11월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옛 유럽’(유럽연합 창립 초기 15개 서유럽 회원국)에서 이주노동을 하고 있는 동유럽 출신 노동자의 절반가량이 폴란드 출신이다.
부모가 떠나도, 아이는 남는다. 그 빈자리는, 넓고도 깊다. 인터넷 대안매체 〈IPS뉴스〉는 7월12일 폴란드 어린이보호위원회가 최근 내놓은 보고서 내용을 따 “부모 중 1명 이상이 서유럽 국가로 이주노동을 떠난 어린이가 약 15만 명에 이른다”며 “이 가운데 1만2천~1만5천 명가량은 (돌봐줄 사람이 없어) 고아원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전했다. 〈IPS뉴스〉는 이들을 일러 ‘동유럽의 잃어버린 세대’라 표현했다. 크리스티나 이글리츠카 폴란드 국제관계센터 연구원은 이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주노동을 떠나는 부모를 탓할 순 없다. 자녀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떠나는 것 아닌가. …정작 문제는 미래다. 지금은 해당 어린이 개인에게만 영향을 끼칠 뿐이지만, 20년 뒤 이들 세대가 성장했을 때쯤엔 사회문제가 될 수도 있다.”
폴란드뿐 아니다. 동유럽 각국에서 ‘잃어버린 세대’가 급격히 늘고 있다. 공식 통계자료는 작성된 게 없지만, 국제이주기구(IOM) 등 관련 기구는 동유럽 각국에서 부모가 이주노동을 떠난 이후 홀로서기로 내몰리고 있는 어린이가 줄잡아 100만 명을 넘어설 것이란 추정치를 내놓기도 했다. 〈IPS뉴스〉는 제이미 판디아 IOM 대변인의 말을 따 “이주노동자 자녀 상당수가 성적이 뒤처지는 등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하거나, 아예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며 “부모가 외국으로 가버린 뒤 남겨진 아이들은 심리적 충격을 받기 마련이며, 이는 조만간 심각한 사회문제를 유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거나 마약이나 범죄에 빠져드는 사례도 있단다.
홀로서기 내몰린 어린이 100만 명 넘는 듯루마니아에서도 2007년 1월 유럽연합 가입 이후 ‘잃어버린 세대’ 문제가 본격화했다. <로이터통신>은 그해 12월24일 “이주노동을 자녀의 미래를 위한 ‘희생’으로 여기는 부모들이 앞다퉈 서유럽으로 떠나가면서, 일부 지역 학교에선 전체 학생의 절반 이상이 한 부모 아래 또는 부모 없이 성장하고 있다”며 “특히 빈곤층이 많은 루마니아 북부와 동부 지역에선 마을 전체가 조손 가정인 경우까지 늘고 있다”고 전했다. 이미 이 무렵 루마니아 당국은 전체 400만 어린이 가운데 8만여 명이 부모 중 1명 또는 2명 모두 외국에서 일하는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그로부터 1년 반여가 지난 최근 상황은 어떨까? 여전히 ‘잃어버린 세대’에 대한 당국 차원의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다. 다만 현지에서 어린이 복지 활동을 벌이는 ‘소로스재단’이 최근 펴낸 자료를 보면, 이주노동을 떠난 부모 대신 조부모나 친척과 살거나, 시설에 맡겨진 루마니아 어린이가 줄잡아 35만 명에 이른단다. 루마니아 상원이 ‘벌금 카드’까지 꺼내든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닌 게다.
이런 현상이 유럽연합 회원국에 국한된 것만도 아니다. ‘유럽 최빈국’으로 꼽히는 몰도바에선 되레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 유엔아동기금(UNICEF)의 최근 자료를 보면, 몰도바 어린이 가운데 20%가량은 부모 중 1명 이상이 취업을 위해 해외로 출국한 상태다. 전체의 10%는 아예 부모가 모두 이주노동을 하고 있단다. 실제 몰도바 전체 인구 410만여 명(2008년 말 기준) 가운데 10%에 육박하는 34만여 명이 서유럽을 중심으로 해외 이주노동을 하고 있다는 게 몰도바 당국의 공식 통계치다. 이들이 지난해 고국으로 송금한 금액만도 16억달러에 이른단다. 지난해 몰도바 국내총생산(GDP·약 107억달러)의 10%를 훌쩍 넘는 액수다.
서유럽 이주한 부모들의 현실도 비참떠나간 부모들도 험한 현실이 버겁기는 마찬가지일 터다. 유럽정책연구센터(CEPS)가 지난해 9월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동구권 출신 이주노동자들은 서유럽 각국에서 ‘체계적인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입국과 취업 과정에서 마주치는 관료주의적 장벽에다 임금차별·체불 등을 겪고, 유럽연합이 정해놓은 최저임금이나 노동시간, 의료보장 등 각종 기본적인 혜택에서 소외되기 일쑤란 게다. 여기에 위협과 협박, 인식공격을 당하거나 실제 ‘혐오범죄’의 목표가 되기도 한단다. 이를 두고 보고서는 “동유럽 이주노동자들은 ‘옛 유럽’에서 ‘현대판 노예’ 취급을 받고 있다”고 꼬집었다. 남겨진 자식보다 그리 나을 게 없는 삶이다.
“동유럽 출신 이주노동자 유입이 급감하고 있다.” 지난 2월23일 영국 <데일리메일>은 인터넷판에서 이렇게 전했다. 이 매체는 “(지난해) 3분기 영국으로 입국한 동유럽 출신 이주노동자가 98만 명에 이르렀으나, 4분기에는 68만 명에 그쳤다”며 이렇게 전했다. 2007년 4분기(약 79만5천 명)와 견줘도 약 15% 줄어든 규모란다. 경제위기로 일자리 찾기가 녹록지 않아진데다, 영국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텃세’가 세기로 이름이 나 있다. 경기침체가 길어지면 기왕에 진출해 있던 이주노동자들도 하나둘 짐을 꾸릴 터다. 아이들에겐 다행한 일인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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