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 불가능한 최종 판결을 내리는 법원은 다른 법원보다 더욱 엄정한 심사를 받아야 한다. 견제받지 않은 권력은 자만의 늪에 빠져, 자기 분석에 태만하기 마련이다. 미국과 같은 민주국가에선 어떤 공기관이나 이를 움직이는 특정 개인도 공적 토론으로부터 면제되지 아니한다.”(워런 버거 전 미 연방대법원장)
미국 사회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온갖 논쟁과 다툼의 최종 기착지는 늘상 연방대법원이다. 해서, 미 연방대법원을 구성하는 9명의 종신직 대법관은 흔히 ‘지혜의 아홉 기둥’으로 불린다. 이들의 판결에 따라 시민의 자유와 권리, 의무의 내용과 범위가 뚜렷이 갈린다. 말 그대로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숨은 저력’이라 부를 만하다. 일반 법원의 판사는 ‘판단’을 하는 자리지만, 대법관은 ‘정의’를 밝혀야 할 책무를 지닌다. 판사(Judge)와 대법관(Justice)을 부르는 단어마저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지혜의 아홉 기둥’ 종신직 대법관 9명대법원의 막강한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게 2000년 대선이다. 당시 미 대법원은 개표부정 논란이 있던 플로리다주의 검토작업을 중단시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사실상 조지 부시 대통령의 당선을 ‘결정’한 셈이 됐다. 이런 대법원의 막강한 영향력 탓에 역대 미 대통령은 임기 중 대법관을 지명하게 되면, 정치적 역학관계를 철저히 고려했다. 어떤 성향의 대법관을 임명하느냐에 따라 미국 사회의 ‘가치관’을 가늠하는 진자의 추가 휘청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미 연방대법원을 지휘하고 있는 인물은 2005년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의 후임으로 부시 대통령이 임명한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다. 그를 포함해 6명의 대법관이 제럴드 포드, 로널드 레이건, 조지 허버트 부시, 조지 워커 부시 등 공화당 출신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현직에 올랐다. 민주당 출신 대통령(빌 클린턴)의 지명을 받은 현직 대법관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스티븐 브레이어 대법관 2명뿐이다.
이 가운데 로버츠 원장을 비롯해 앤터닌 스캘리아, 클레런스 토머스,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 등 4명은 보수 색채가 뚜렷하다. 긴즈버그와 브레이어 대법관은 진보적 법 해석으로 정평이 나 있다. 여기에 올해 89살로 대법원 최고령자인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도 ‘지명자의 뜻’과 달리 진보 쪽에 힘을 보태고 있다. 그를 대법관에 임명한 건 포드 대통령(1975년)이다. 데이비드 수터 대법관도 ‘아버지 부시’ 행정부 때인 1990년 임명됐지만, 진보 성향을 뚜렷이 드러내왔다.
4 대 4, 보수와 진보로 갈린 대법원에서 ‘캐스팅보트’를 쥔 것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1988년)이 임명한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이었다. 는 지난 7월1일치에서 “케네디 대법관은 2008~2009년 새 대법원이 내린 결정에서 다수의견 쪽에 선 비율이 무려 92%에 이른다”며 “이 가운데 23건은 5 대 4로 의견이 갈렸는데, 케네디 대법관은 그 23건 중 21건에서 다수파의 손을 들어줬다”고 전했다. 그의 선택이 ‘다수의견’을 만들어낸 셈이다. 신문은 “특히 보수와 진보의 이념 대립이 팽팽했던 16건 가운데 케네디 대법관은 11차례는 보수 편을, 5차례는 진보 편을 들었다”고 전했다. 굳이 따지자면 보수파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봄 수터 대법관이 돌연 퇴임 의사를 밝혔다. 진보파로선 균형추가 무너진 셈이니, 서둘러 보충해야 했다. 이에 따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5월 말 그의 후임으로 소냐 소토마이어(55) 연방 항소법원 판사를 지명했다. 그리고 7월13일 미 상원 법사위원회가 소토마이어 지명자에 대한 인준 청문회를 시작하면서, 미국 사회의 온갖 논쟁거리가 한꺼번에 쏟아져나오고 있다. 낙태를 여성의 권리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에서 동성애자와 소수인종 차별, 사형제 존폐와 사법당국의 인신구속 적법성 다툼, 국기 훼손을 포함한 표현의 자유, 총기 소지 문제까지. 흔히 대법관 인준 청문회를 ‘교육적인 시간’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 연방대법원의 현대사를 상징하는 2명의 인물을 고른다면 얼 워런(1953~1969년 재임) 대법원장과 1972년 대법관에 오른 뒤 1987년부터 2005년까지 대법원장으로 재직한 렌퀴스트 대법원장을 들 수 있다. 공화당 출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대법원장에 임명하기 전까지만 해도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보수파로 알려졌던 워런 대법원장은 민권운동의 돌풍이 미국 사회를 뒤흔들던 1960년대 인종분리 교육 철폐를 비롯한 수많은 진보적 판결로 이른바 ‘사법 적극주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반면 렌퀴스트 대법원장은 자신을 지명한 닉슨 대통령의 ‘보수철학’에 오로지하며, 미국 사회를 ‘오른쪽’으로 끌고 간 대표주자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각각 어떤 ‘노선’을 선호할지는 자명해 보인다.
“대법관 후보자가 다른 사람의 처지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입이 가능한 인물이면 좋겠다.” 오바마 대통령은 소토마이어 판사를 대법관 후보로 지명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공화당 쪽에선 즉각 “사실상 진보적 활동가를 대법관으로 앉히겠다는 얘기”라며 “법의 고정된 의미가 실종된 채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대법관이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7월13일 인준 청문회에서 찰스 그래즐리 의원(공화당)이 “흠잡을 데 없는 법조 경력과 탁월한 지적 능력만이 대법관의 자격 요건은 아니다. 무엇보다 편견과 치우침 없이 헌법과 법률을 충실히 해석하는 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며 ‘사법 적극주의’를 가장 먼저 경계하고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지난 17년 동안 판사로 재직하면서, 제 결정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지켜봐왔습니다. 소송의 어느 일방만을 위한 결정을 내린 적은 없습니다. 오직 불편부당한 정의를 위해 고민해왔습니다. …대법관 지명을 받은 이후 여러 상원의원들께서 제 사법 철학을 물으셨습니다. 간단합니다. ‘법에 충실하자’는 겁니다. 판사의 임무는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소토마이어 지명자는 7월13일 청문회 모두발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집안 출신으로 명문 프린스턴대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예일대 법대를 마친 소토마이어 지명자의 이력은 오바마 대통령의 삶과 절묘하게 겹친다. 법대 졸업 직후 뉴욕주에서 5년간 지방검사보로 활동하기도 한 그는 대형 법률회사를 거쳐 1992년부터 연방법원 판사의 길로 들어섰다.
뉴욕 남부지역 관할 연방법원 판사를 거쳐,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8년엔 제2순회 연방 항소법원 판사에 오른 그에 대해 〈CNN방송〉은 7월12일 “현직 대법관 누구보다 지명 당시 법조 경력이 빼어난 인물”이라고 평했다. 여기에 그가 인준 청문회를 통과하면 1789년 미 대법원 설립 이래 사상 첫 라틴계이자, 세 번째 여성 대법관이란 칭호를 얻게 된다. 청문회를 통해 오바마 행정부의 ‘좌편향’에 대한 공세를 준비해온 공화당 쪽에서도 쉽게 볼 인물은 아닌 게다.
지명자 뜻 따라 진보 편 설지는 미지수그래설까? 청문회의 열기가 애초 예상과 달리 그다지 달아오르지 않고 있다. 시사주간지 은 7월16일 인터넷판에서 “청문회가 나흘째로 접어들면서 공화당 쪽에서 ‘기권’을 하는 듯한 모양새”라고 전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색깔’에 가장 날을 세워온 제프 세션스 법사위 부위원장(공화당)조차 “소토마이어 지명자 인준 투표를 가로막기 위한 어떤 의사 진행 방해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 의회가 여름 휴회에 들어가는 8월7일 이전에 인준 절차를 마무리하겠다는 얘기다. 〈AP통신〉은 “공화당 쪽에서도 인준 찬성표가 여럿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민주당이 상원에서 압도적 다수(100석 가운데 60석)를 장악하고 있으니 굳이 ‘이탈표’가 없더라도 인준에는 무리가 없을 터다. 물론 ‘소토마이어 대법관’이 어떤 판결을 내릴지는 ‘지명자’의 뜻과 무관할 테지만.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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