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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보고서 표지에 성서 문구가

이라크전쟁 일일보고서 표지에 그날 전투 상황에 맞는 성구들 기재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 행태 폭로돼
등록 2009-05-29 19:34 수정 2020-05-03 04:25

“그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해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이사야서 6장 8절)

부시 대통령에게 매일 손수 전달

‘선지자 럼즈펠드?’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 국방장관은 이라크 침공을 전후로 직접 준비해 조지 부시 전 대통령에게 보고한 ‘정보 업데이트’의 표지에 <성서>에서 따온 구절을 적어 넣었다. ‘신념의 전쟁’이다. 사진 REUTERS/ JIM YOUNG

‘선지자 럼즈펠드?’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 국방장관은 이라크 침공을 전후로 직접 준비해 조지 부시 전 대통령에게 보고한 ‘정보 업데이트’의 표지에 <성서>에서 따온 구절을 적어 넣었다. ‘신념의 전쟁’이다. 사진 REUTERS/ JIM YOUNG

2003년 3월17일, 조지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를 침공하기 사흘 전이다. 미 월간 〈GQ〉가 최신호에서 보도한 내용을 보면, 이날 도널드 럼즈펠드 당시 미 국방장관이 부시 대통령에게 전달한 ‘전세계 정보 업데이트’ 보고서의 표지에는 위와 같은 구절이 담겨 있다. 보고서의 윗부분엔 ‘국방장관’이라고 적혀 있고, 그 아래로 총을 든 미군 병사들이 간절한 표정으로 기도를 하는 사진이 곁들여져 있다.

‘정보 업데이트’는 럼즈펠드 장관이 준비해, 조지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극소수 군 수뇌부가 전쟁을 전후로 공유한 1급 기밀이었다. 〈GQ〉의 보도를 보면, 럼즈펠드 장관은 이 보고서를 손수 부시 대통령에게 매일 전달했단다. 침공을 전후로 ‘정보 업데이트’ 표지에 등장하는 성서의 구절들은, 전황의 전개 과정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전쟁을 ‘모의’하고 ‘실행’에 옮긴 이들의 마음가짐을 가늠해볼 만하다.

그해 3월19일, 침공 하루 전의 ‘정보 업데이트’ 표지에는 항공모함에서 긴박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의 모습 사이로 이런 성서 구절이 등장한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편 139편 9~10절) 2003년 3월20일, 침공 당일이다. 럼즈펠드 장관은 사막에 배치된 미군 병사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석 장과 함께 이사야서 5장 28절을 골랐다. 전쟁을 시작하는 그의 심정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들의 화살은 날카롭고, 모든 활은 당겨졌으며, 그들의 말굽은 부싯돌 같고, 병거 바퀴는 회오리바람 같을 것이며….”

이라크를 남과 북, 동과 서로 갈라 수도 바그다드를 향해 가던 미군은 중남부 나시리야 등지에서 격렬한 교전을 벌이며 사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전투가 격렬히 전개되던 그해 3월31일 ‘정보 업데이트’ 표지에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에베소서 6장 13절)라는 성구가 등장했다. 또 이튿날인 4월1일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잠언 16장 3절의 경구가 새겨졌다.

4월 들어 전세는 뚜렷이 기울기 시작했다. 불안 속에 북상을 거듭하는 미군 병사들을 위한 겐가? 4월3일치에선 여호수아 1장 9절의 ‘말씀’이 등장한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하시니라.” 미군이 바그다드 코앞까지 당도한 4월7일치에는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결사항전’을 발표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과 함께 베드로전서 2장 15절 문구가 등장한다. 기막한 인용이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미군은 이내 바그다드로 진격해 들어갔다. 4월8일치 ‘정보 업데이트’에는 바그다드로 입성하는 미군 탱크의 모습과 함께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이사야서 26장 2절)란 성구가 인용됐다. 그리고 4월10일,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바그다드 중심가에 있던 후세인 대통령의 동상이 끌어져내렸다. 이튿날 럼즈펠드 장관은 ‘정보 업데이트’의 표지에 어깨에 총을 멘 미군 병사들이 서로 어깨를 걸고 동그랗게 둘러선 모습과 함께 역대상 16장 11절을 선보였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 이미 승리를 확신한 게다.

십자군전쟁이라 부른 이유 알 만해

그로부터 19일 뒤인 5월1일 부시 대통령은 미 항모 ‘USS 에이브러햄 링컨’에 올라 ‘임무 완수’를 선언했다.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애초 9·11 동시테러 직후부터 ‘테러와의 전쟁’을 ‘십자군전쟁’이라 불렀다. 그가 이라크 침공을 ‘강행’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럼즈펠드 장관은 2006년 11월 물러났다. 그가 ‘종교적 신념’에 기대 시작한 무모한 전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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