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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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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트 계곡의 핏빛 대리전

미국 업은 파키스탄군, 탈레반 소탕작전… 난민 130만 명 최악 상황
등록 2009-05-21 15:46 수정 2020-05-03 04:25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북서쪽으로 150km 남짓 떨어진 곳에 스와트 계곡이 있다. ‘북서부변경주’(NWFP)를 가르는 스와트강 상류에 자리를 잡은 거대한 계곡이 힌두쿠시 산맥의 치솟은 등줄기를 따라 남으로 뻗어 있다. 만년설을 머리에 인 고산준봉 사이로 짙푸른 초원과 하늘빛을 머금은 호수가 뒤엉켜 이국적인 풍광을 자아낸다. 스와트 계곡이 일찌감치 ‘파키스탄의 스위스’로 이름을 알려온 이유다. 신혼여행객으로 북적이던 관광의 명소였다. 더는 아니다.

탈레반에 쫓기고, 자기 나라 군대에 쫓겼다. 스와트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130만에 이르는 파키스탄 국민들이 난민으로 전락해 텐트에서 기거하며 배급식량에 기대고 있다. 파키스탄 정부는 국제사회의 원조만 바라고 있다. 사진 REUTERS/ FAISAL MAHMOOD

탈레반에 쫓기고, 자기 나라 군대에 쫓겼다. 스와트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130만에 이르는 파키스탄 국민들이 난민으로 전락해 텐트에서 기거하며 배급식량에 기대고 있다. 파키스탄 정부는 국제사회의 원조만 바라고 있다. 사진 REUTERS/ FAISAL MAHMOOD

1990년 중반 무렵 스와트 계곡 일대에서 이슬람의 가르침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수피 모하메드를 수장으로 한 이들은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따른 통치를 주장하며 무장했다. 모하메드는 2001년 10월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하자 국경을 넘어가 탈레반 지원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탈레반의 패퇴와 함께 스와트로 돌아온 그는 파키스탄 보안당국에 체포돼 수감됐다. 모하메드의 빈자리를 메운 것은 그의 사위인 물라나 파즈랄라였다. 차츰 세를 규합해나간 파즈랄라의 무리는 어느새 남서부 연방부족자치지역(FATA) 일대를 호령하는 바이툴라 메수드 진영과 함께 ‘파키스탄 탈레반’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파즈랄라가 이끄는 ‘탈레반’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선 것은 지난 2007년 7월께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당시 대통령이 이슬라마바드의 ‘붉은 사원’(랄 마스지드)을 중심으로 반미·반정부 활동을 지속해온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군을 동원해 유혈 진압한 것을 빌미로 발걸음을 재게 놀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최근까지 스와트 일대에서만 줄잡아 200여 개 학교와 자치정부 청사가 이들의 손에 파괴됐다. 부르카로 온몸을 가리지 않고 외출을 한 여성에겐 어김없이 돌이 날아들었고, 고위 공직자와 각급 부족 수장 가운데 탈레반에 반감을 가진 이들의 주검이 머리가 잘려나간 채 거리에 방치됐다. 극도의 공포가 스와트 최대 도시 밍고라의 공기를 무겁게 했다.

지난해 유화책으로 평화협정

이 무렵부터 스와트 일대에서 탈레반 진영과 파키스탄군이 벌인 전투는 크게 3단계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제1단계는 2007년 10월 파키스탄군 3천여 명이 스와트 계곡으로 급파된 직후 불을 뿜은 교전사태다. 하지만 파키스탄군은 역공을 당했고, 되레 탈레반의 ‘자신감’만 키워주고 말았다. 한 달도 채 안 된 그해 11월 중순 제2단계 충돌이 벌어졌다. 스와트를 장악한 탈레반 세력은 동쪽으로 진격해 인구 40만의 샹글라 지역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당황한 파키스탄군은 중화기를 동원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고, 20여 일 만에 탈레반을 격퇴하고 샹글라를 지켜냈다. 이후 탈레반은 스와트 일대에서 기반을 다지는 한편, 왜곡된 율법 해석에 바탕한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크고 작은 교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2008년 한 해 동안 파키스탄군은 탈레반을 겨냥한 이렇다 할 공세를 펼치지 않았다. 그새 스와트 전역의 80%가 탈레반의 수중에 떨어졌다. 극도의 공포정치가 만연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지난해 유화책의 일환으로 석방시킨 수피 모하메드를 중재자 삼아 파즈랄라 그룹과 협상을 했고, 지난 2월 마침내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탈레반 쪽이 무기를 내려놓는 대신 파키스탄 정부는 스와트와 인근 부네르를 포함한 북서부변경주 3분의 1을 차지하는 말라칸드 일대에서 ‘샤리아 통치’를 용인한다고 밝혔다.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파키스탄 대통령은 지난 4월19일 이런 내용을 법령화하기에 이르렀다.

“파키스탄이 지구촌 안보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지난 4월22일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작심한 듯 이렇게 말했다. 사흘 뒤인 25일엔 “탈레반이 파키스탄 정부를 무너뜨리게 되면, 파키스탄이 보유한 핵무기의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내놨다. 앞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지난 3월 새로운 아프간·파키스탄(아프팍·AfPak) 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알카에다와 탈레반 등 극단주의자들이 파키스탄을 내부에서 죽이고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지난 2001년 아프간 침공 이래 줄잡아 100억달러 규모의 군사지원을 했음에도 파키스탄 정부는 애당초 국경을 넘어 숨어드는 알카에다와 탈레반 세력 소탕작전에 뜻이 없었다. 결국 탈레반과 평화협정을 맺었으니, 미국 쪽에서 나오는 말이 고울 리 없다.

무장해제를 약속했던 탈레반은 쉽게도 이를 무시했다. 자르다리 대통령이 평화협정 내용의 법령화를 밝히던 바로 그날 ‘평화협상의 중재자’였던 수피 모하메드는 밍고라에서 4만여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대중집회를 열어 파키스탄 헌법을 비난하며, “민주주의는 이교도나 하는 짓”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탈레반은 이내 이슬라마바드에서 100km 남짓 거리인 디르와 부네르 지역으로 거침없이 세를 넓혀나갔다. 미국의 압박에 탈레반의 발호까지, 스와트 계곡에서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지난 4월26일 파키스탄군이 스와트 계곡에서 탈레반 소탕작전을 재개했다. 작전명 ‘올바른 길’, 스와트 계곡에서 탈레반과 파키스탄군의 제3단계 전투가 본격 개막한 게다. 아프간 국경지대 디르에서 시작된 첫날 공세로 탈레반 70명을 사살하고, 파키스탄군 10명이 전사했다. 3만여 명이 피난길에 올랐다. 공세가 시작된 지 2주가 훌쩍 지났다. 파키스탄군 당국은 연일 ‘승전보’를 전하고 있다. 아랍 위성방송 는 5월15일 인터넷판에서 파키스탄군 관계자의 말을 따 “파키스탄군 1만5천여 명이 4천여 명으로 추정되는 탈레반 세력과 교전을 벌이고 있다”며 “4월26일 이후 현재까지 적어도 탈레반 요원 750명이 사살됐고, 파키스탄군 33명이 전사했다”고 전했다.

오바마 “극단주의자들” 압박

전투가 불을 뿜으면서 인도적 재난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지난 2007년 이후 줄잡아 50만 명이 탈레반을 피해 스와트를 빠져나와 난민으로 떠돌고 있다. 이번 공세 시작과 함께 새로 피난길에 오른 이들만 83만여 명을 헤아린다. 그럼에도 파키스탄 정부는 피로와 굶주림에 시달린 난민을 보듬어줄 준비는 전혀 하지 않은 채다. 탈레반을 피해, 자국군의 포화를 피해 삶의 터전을 떠나온 이들의 원망스런 눈길이 차츰 아시프 자르다리 정권으로 향하고 있는 이유다. 난민 130만 명, 1947년 파키스탄 건국 이래 최악의 상황이다.

“미군이 무인 항공기를 통해 수집한 정찰 정보를 지난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 파키스탄군에 제공했다. 이는 파키스탄군 당국의 요청에 따른 게다.” 는 5월13일치에서 이렇게 전했다. 마이클 뮬런 미 합참의장은 이튿날 상원 국방위에 출석해 이를 확인했다. 그는 다만 “무인 항공기 통제권을 미군과 파키스탄군이 공유하고 있다”는 의 전날 보도를 반박하며, “미군이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파키스탄군이 공세를 시작한 건 미국의 압박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전선을 누비는 건 파키스탄군이지만, 배후에서 군비와 정보를 대주는 건 미국이다. ‘대리전’ 양상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쟁, ‘아프팍 전쟁’이 바야흐로 막을 올린 겐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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