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각국과 미국은 이스라엘의 가공할 인종주의적 범죄행위를 옹호하면서 이번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국제사회의 양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을 비난하고 있지만, 이들 국가는 이를 옹호하고 있다.”
유엔이란 ‘무대’에서 웃지 못할 ‘상황극’이 연출되는 게 낯선 일은 아니다. 지난 4월20일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 본부에서 개막된 ‘세계 인종차별 철폐회의’(2009 더반 평가회의), 직접 참석한 유일한 국가수반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도발적인 연설로 ‘주연’ 노릇을 톡톡히 했다. 나미비아가 총리를 보냈고, 장관급을 보낸 나라가 45개국, 대사급이 대표단을 이끈 나라가 우리나라를 포함해 39개국이다.
‘조연’으로 나선 유럽연합 각국 대표단은 항의의 표시로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는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했다. 침착히 자리에 남아 연설을 들으며 박수를 친 아랍 각국의 대표단도 무난한 ‘조연’이었다. 무지개 빛깔의 가발을 쓴 채 회의장에 들어와 코에 걸고 있던 광대의 ‘빨간 코’를 빼어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을 향해 던진 유대인 ‘인권활동가’는 ‘비중 있는 카메오’ 연기를 선보였다. 소동 끝에 닷새 일정이던 회의는 이틀 만에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인종차별 철폐회의는 그렇게 국제사회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는 무기력한 희비극이 되고 말았다.
이번 회의에 앞서 국제사회가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유엔 차원의 회의를 연 것은 1978년과 1983년, 그리고 2001년 등 모두 세 차례다. 나치의 광기, ‘홀로코스트’의 잔영이 채 가시기 전에 만들어진 유엔은 출발부터 인종차별 문제에 관심이 컸다.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가 1950년 처음으로 내놓은 공식 보고서의 제목도 ‘인종 문제’였다. 2차 대전 이후 국제사회가 인종차별과 관련해 가장 큰 관심을 쏟은 사례는 단연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정권이 시행한 인종분리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이었다. 유네스코 주최로 1978년 사상 첫 인종차별 철폐회의가 열렸을 때도 논의의 초점은 자연스레 아파르트헤이트에 모아졌다. 첫 회의와 마찬가지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1983년 회의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리고 2001년 여름, 국제사회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암흑기를 벗어나 흑인정권이 들어선 남아공의 더반에서 다시 모였다. 이때부터 ‘인종주의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증 등과 관련한 편협함에 대한 세계회의’란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참가국들은 인종차별에 맞설 수 있는 광범위한 방안과 개별 국가 차원의 반차별법 강화, 교육·의료·사법권과 관련해 인종차별을 줄이는 방안 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또 빈곤 해결과 인종차별 피해자 구제책, 다문화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개별 국가 차원의 노력을 강조했다. 이런 내용은 ‘더반 선언과 행동강령’이란 문건으로 추려졌다. 이번 회의는 당시의 ‘약속’이 얼마나 이뤄졌는지를 점검하기 위해 준비된 자리였다.
하지만 2001년 더반 회의 당시에도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논란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노예제도 문제다. 나이지리아와 짐바브웨를 필두로 한 아프리카 각국은 과거 노예제를 시행했던 나라들이 개별적으로 ‘노예제는 반인도적 범죄행위’였다는 점을 인정하라고 주장했다. 또 피해 국가에 개별적으로 사과하고 적절한 보상책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구 각국이 이에 반발하고 나선 것은 당연했다. 결국 아프리카 각국의 외채 부담을 줄여주고 에이즈 퇴치기금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지원 방안을 담은 ‘새 아프리카 구상’(NAI)을 발표하는 것으로 타협안을 마련했다.
둘째, 팔레스타인을 핍박하는 이스라엘도 뜨거운 논란을 불렀다. 아랍 각국은 이스라엘의 인종차별 행태를 비판하는 문구를 선언문에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과 미국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아랍 각국의 비판이 거세지자 미국과 이스라엘 대표단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2009년의 ‘희비극’은 기실 2001년의 ‘예고편’에서 이미 예견됐던 게다.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모인 유엔 회의장에서 되레 인종주의를 부추겼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도발’ 직후부터 회의장 안팎에선 날선 비난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격한 주장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되새겨볼 일이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극한 비난으로 이미 국제무대에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다. 그의 발언을 비난할 순 있지만, 회의 자체를 파행으로 몰아가는 건 분명 무리한 일이었다. 배후에 ‘정치적 고려’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과 이스라엘을 비롯해 독일·캐나다·네덜란드·폴란드·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 등 8개국이 개막 직전 이번 회의에 불참을 통보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는 평가다. 이들 나라는 불참 사유로 이번 회의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한 이슬람권의 일방적 성토 마당이 될 것”이라는 점을 암묵적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회의 개막에 앞서 지난 4월17일 유엔 회원국들이 합의한 선언문 초안에는 이스라엘에 관한 직접적인 문구는 빠져 있었다. 아랍 각국은 초안 작성 당시 덴마크 등지에서 툭하면 터지는 ‘무하마드 초상 훼손 사건’과 관련해 “남의 종교를 모욕하는 행위도 명백한 인종주의”라고 못박기를 원했지만, 이 또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미국과 유럽의 반대에 막혀 반영되지 못했다. 불참할 까닭이 없었다는 얘기다.
2001년 더반 회의 뒤엔 9·11 동시테러가“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표현의 자유를 행사했지만,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한 회의장에서 오히려 인종 간 증오심만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유대인 학살은 천재가 아니라 인재이며, 이런 행태를 막기 위한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에 이어 발언대에 선 조나스 가르 스퇴레 노르웨이 외무장관이 미국을 비롯한 회의 불참국들을 에둘러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나바네템 필레이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은 첫날 회의를 마친 뒤 열린 브리핑에서 “이란 대통령의 발언이 일으킨 파문은 불참국들의 주장이 근거가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게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번 회의에 참가 신청을 한 세계 각국의 시민사회단체만 4천 개가 넘는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발언이 회의를 보이콧한 나라들에 면죄부를 줄 수 없다. 그의 발언에 동의할 수 없다면, 회의에 참석해 적극적으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게 맞다.”
지난 2001년 남아공에서 열린 더반 회의는 8월31일 개막돼 9월8일까지 이어졌다. 회의가 폐막된 지 사흘 만에 미 뉴욕의 심장부를 강타한 ‘9·11 동시테러’가 벌어졌다. 삽시간에 지구촌 전역에서 ‘이슬람 혐오증’이 불을 뿜었다. 각지에서 이슬람 사원(모스크)이 파괴됐고, 무슬림을 겨냥한 크고 작은 테러가 자행됐다. 그로부터 7년 반가량 세월이 흘렀다. 인류는 여전하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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