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곳곳에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주류 싱할리족을 상징하는 사자 문양 깃발, 스리랑카의 국기이기도 하다. 그 깃발을 꽂고 내달리는 ‘오토릭샤’(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삼륜차)의 등에는 싱할리족으로 구성된 스리랑카 군인들의 사진도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애국 릭샤’도 검문소를 무사통과하진 못했다. ‘라자팍세 브러더스’(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과 고타바야 라자팍세 국방장관)와 군인들이 다양하게 포즈를 취한 대형 그림들이 벽과 건물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콜롬보의 거리는, 할 일 없이 히죽거리며 지나가는 여성들에게 추근대는 사내들로 넘쳐났다. 바야흐로 ‘전쟁 마초이즘’이 넘실대고 있었다.
2002년 2월 이래 불안하게 이어지던 스리랑카 정부와 반군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이하 타밀호랑이)의 마지막 휴전은 2008년 1월 정부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물거품이 됐다. 2002년 타밀호랑이와 휴전 협정에 사인했던 당시 총리 라닐 위크레마싱헤 민족연합정당(UNP) 대표는 당 내분에 ‘철새’ 당원들의 대거 이탈로 외로운 신세가 됐다. 4년여 전 인터뷰에서 “테러는 과거지사”라며 타밀호랑이와의 대화 의지를 적극 내비쳤던 당시 정부 쪽 협상대표 페이리스 교수도 민족연합정당을 떠나, 여당인 자유당 연정으로 날아들었다. 투자장려부 장관이 된 그는 여전히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다.
해안가 8km, 세상에서 제일 긴 화장실타밀호랑이 쪽은 그야말로 사면초가 속에서 최후의 격렬한 저항을 벌이고 있다. 타밀호랑이군 정보국장 포투 암만이 최전선을 이끌고 있는 가운데, ‘바다 타이거’로 불리는 해군사령관 수사이는 종적이 묘연해졌다. 평화협상 담당자였던 풀리데반과 대변인 노릇을 해온 마샬은 배를 타고 도피하려다 타밀호랑이군 병사들에게 붙잡혀 최전선에 배치됐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스리랑카 정보국의 끄나풀이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던 터다. 2004년 동부지역 사령관 카루나가 이탈한 이래 속도감이 높아진 ‘배신의 드라마’는, 한때 1만5천여㎢를 장악했던 ‘해방구’를 25㎢ 남짓으로 줄여놨다. ‘타밀엘람’(타밀인들의 모국이란 뜻)에 패전의 기운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게다.
“해안가 8km를 따라 세상에서 제일 긴 화장실이 들어서 있다고 보면 된다.” 정부군과 타밀호랑이 반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스리랑카 북동부 와니 지역 소식에 능통한 마나르(북서 지역)의 한 종교지도자는 숨쉴 틈도 없이 전화 브리핑을 이어갔다. “고열 증세와 폐렴 등이 창궐하기 시작했고, 민간인 구역에 대한 공격, 집속탄 사용, 그리고 화학무기를 썼는지 부상자들의 피부가 타들어간다는 증언까지 나온다. 군은 타밀호랑이 소굴에 갇힌 민간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단 한 목숨이라도 이렇게 죽인다면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 아닌가?”
타밀호랑이 쪽에서도 ‘과잉 대응’이 나오기는 마찬가지다. “탈출하는 민간인을 향해 병사들이 총을 쐈다“는 인권단체들의 고발이 잇따르고 있다. 실제 동북부 지역에서 자체 경찰과 은행, 법원까지 두고 여러 해 동안 ‘타밀엘람 정부’ 노릇을 해온 타밀호랑이는 ‘엘람 이민법’에 따라 ‘자국민’들이 적군 지역으로 탈출하는 걸 용납하지 않고 있다. 국제적십자사 선박이 타밀호랑이 통제 지역 해안가인 푸투마탈란에서 동부 항구도시 트링코 말리로 실어나르는 심각한 부상자들 정도가 ‘합법적’으로 탈출할 수 있을 뿐이다. 소피 로마넨스 적십자 대변인은 “부상자 이송은 정부군과 반군 양쪽의 허가와 협조 아래 진행되고 있다”며 “실시간으로 양쪽과 의사소통을 하며 설득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군은 지난 2월 초 타밀호랑이 통제 구역이던 투쿠티디이루푸 병원을 여러 차례 폭격해 결국 문을 닫게 했다. 이 때문에 현지에선 최소한의 응급치료 외엔 부상자 치료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 스리랑카 당국이 지난해 9월 이후 적십자와 유엔을 제외한 모든 외국계 구호단체에 소개령을 내린 뒤 구호요원의 상주조차 허용치 않고 있다. 더구나 물과 비상식량, 의약품 등 기본적인 구호품까지 반입을 가로막고 있다. 격화하는 전투 속에 인도적 위기가 스멀스멀 번지고 있다.
폭격에 문 닫은 병원, 부상자 치료 불가능타밀호랑이 통제 지역 정보 자료를 보면, 1인당 하루 구할 수 있는 마실 물은 ‘콜라 1병 분량’ 정도가 고작이다. 그나마 이 지역 우물물이 음용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그렇다. 바깥에서 1kg에 70루피 정도 하는 쌀은 이 지역에서 100g에 무려 1400루피(약 12달러)에 이른다. 주식의 재료가 ‘희귀 상품’이 된 게다. 분유는 동이 났고, 달걀 여섯 알이 10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굶주림의 공포가 일상이 돼가고 있다. 타밀호랑이 쪽에선 이미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리랑카 정부는 타밀호랑이가 장악하고 있는 25㎢에 불과한 좁은 땅에 갇힌 민간인이 7만~8만 명 정도라고 추정하고 있다. 반면 타밀족 단체들은 33만여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실제 갇힌 주민들이 그 중간치인 15만~20만 명이라고 추정하면, 대략 8㎡에 1명꼴로 인구가 밀집해 있는 꼴이다. 게다가 서쪽 육로에는 스리랑카 육군이, 동쪽 해안으로는 스리랑카 해군이 진을 치고 있다. 휴전이 선포되지 않는 한 탈출을 시도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인 게다. 요게스와란 가톨릭인권보호센터(CPPHR) 사무국장은 “스리랑카 정부는 3월 말까지 줄잡아 4만~5만 명이 탈출했다고 주장하는데, 당국 통계대로라면 이제 타밀호랑이 지역엔 3만~4만여 명이 남아 있다는 얘기”라며 “조만간 그 3만~4만 명도 다 빠져나왔다고 주장한 뒤 맹폭을 퍼부을 수도 있는 다급한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스리랑카 정부와 국제사회는 타밀호랑이 장악 지역 주민들을 반군 쪽에서 ‘인간방패’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목숨을 건 탈출이 ‘고난’의 끝은 아니다. 민간인으로 위장한 타밀호랑이 대원을 가려낸다는 명목 아래 철저한 ‘스크린’ 과정을 거쳐 북부 거점 도시인 와우니아의 ‘복지마을’로 보내진 피난민들은 ‘이중 장막’이 쳐진 캠프 안에서 이동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기약 없는 수용 생활을 보내고 있다. 경찰과 군인들이 겹겹이 경계를 서고 있고, 타이거 대원을 가려내는 과정에서 일부 난민들이 ‘실종’되고 있다는 인권단체의 고발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현지 싱크탱크 ‘대안정책센터’(CPA)의 파키아소티 사라바나무투 소장은 “국제 구호단체들이 간헐적으로 구호물품 전달을 위해 정부의 허가를 받아 캠프를 방문하고 있지만, 그 외의 시간에 발생할 수 있는 인권침해에 대해선 아무런 감시 장치가 없는 상태”라며 “최소한의 국제적 기준에 부합할 수 있도록 상시 모니터링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과거에도 무력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지금이라도 정치적 타협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지 않으면 장담하건대 10년쯤 뒤엔 훨씬 더 잔인한 전쟁을 목도하게 될 게다. 분쟁의 뿌리와 자양분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고산도시인 캔디에 사는 비사카다르마다사(55) 전쟁피해여성모임 대표는 “지난 1월2일 타밀호랑이의 거점인 킬리노치가 함락된 이래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1998년 군 작전 중 실종된 둘째아들이 타밀호랑이 진영의 포로수용소에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라 믿는 그는 “포로 석방을 전제로 휴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하지만 격해만 가는 이번 전쟁이 만들어낼 암울한 미래를 염려하는 이들이 스리랑카 주류사회에선 많지 않아 보인다. ‘승전만이 살 길’이라며 돌진하는 정부는 귀를 아예 틀어막은 듯한 모습이다.
한때 탁월한 재래식 전쟁 수행 능력을 보였던 타밀호랑이에게 ‘패전’은 곧 정글로 복귀하는 걸 뜻한다. 이미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는 타밀호랑이 진영이 지난 3월 초부터 다시 게릴라 전술로 방향을 틀고 있다는 소식이 은밀히 퍼지고 있다. 민간인 속에 뒤섞인 게릴라를 잡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집단처벌과 인권유린의 핏빛 과거가 재현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이는 고스란히 타밀인들의 모국을 해방시키겠다는 호랑이 전사들에 대한 지지로 이어질 게다. 인종에 기반한 차별과 힘의 독점이 만들어낸 스리랑카 분쟁을 군사적으로 해결할 수 없음은 1980년대 초반 내전 발발 이후의 역사가 증언해 온 바다. 스리랑카가 그 위태로운 과거로 복귀하려 하고 있다.
콜롬보(스리랑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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