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왜 한국은 표적이 되었나

중동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예멘, 부패한 정권은 ‘대테러 전쟁’의 든든한 우방
등록 2009-03-24 11:50 수정 2020-05-03 04:25

아라비아반도의 남서쪽에 자리한 예멘은 인구 2300만의 이슬람 국가다. 왕정국가로 채워진 아라비아반도에서 유일한 공화국이기도 하다. 북쪽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서쪽으로는 홍해가 뻗어 있다. 남쪽으론 아라비아해와 소말리아 해적이 출몰하는 아덴만이 가깝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요충이자, 홍해를 거슬러 수에즈운하를 헤쳐나가면 ‘유럽의 호수’인 지중해로 나아갈 수 있는 교두보다.

맥없이 참가한 ‘대테러 전쟁’으로 그예 테러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3월18일 예멘 수도 사나의 한국대사관 앞에서 중무장한 예멘 보안 인력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사진 연합 김종구

맥없이 참가한 ‘대테러 전쟁’으로 그예 테러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3월18일 예멘 수도 사나의 한국대사관 앞에서 중무장한 예멘 보안 인력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사진 연합 김종구

통일 후 남북 간 긴장 높아져

수천 년의 찬란한 역사 속에 숱한 왕국이 그 땅에서 흥망을 거듭했다. 로마인들은 예멘 땅을 ‘아라비아 펠릭스’(행복한 아라비아)라 부르며 갖고 싶어했다. 거대한 사막의 아라비아에서 그나마 비옥한 땅을 가진데다, 지리적 이점으로 무역이 성해 오랜 기간 영화를 누린 터다. 오스만제국의 영광이 쇠락하기 시작한 19세기 초반 영국이 아라비아 남단에 진출해 예멘 땅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보호령을 선포했다. 예멘의 남북 분단은 이렇게 시작됐다.

오스만제국의 통치권 아래 있던 북부 지역이 1918년 먼저 독립했다. 짧은 왕정 기간을 거쳐 1962년엔 북예멘공화국이 선포됐다. 남부 지역에선 1967년에야 영국군이 물러갔고, 그해 말 남예멘인민공화국(이듬해 예멘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꿨다)이 들어섰다. 두 예멘은 산발적으로 충돌하긴 했지만, 여느 분단국에 비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972년 통일 논의를 시작했지만, 권력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통일 예멘공화국이 탄생한 것은 1990년 5월에 이르러서였다.

1978년 북예멘 대통령에 오른 알리 압둘라 살레가 통일 예멘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슬람 공화국을 지향했던 북쪽과 사회주의 공화국을 지향했던 남쪽의 만남이 순탄할 리 없었다. 통일 전에도 내전을 치르지 않았던 남북은 통일 4년여 만인 1994년 두 달여에 걸쳐 핏빛 전쟁을 벌였다. 살레 대통령이 이끈 북예멘 진영의 승리였다. 남쪽에 부여됐던 광범위한 자치권은 박탈됐고, 군 지도부에 대한 숙정이 단행됐다. 줄잡아 10만 명에 이르는 직업군인과 공무원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었다.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군부와 토호세력을 기반으로 30년 세월 권좌를 지키고 있는 살레 대통령은 대중의 불만을 힘으로 짓눌러왔다. 꼭두각시 정당을 만들어 표심을 조작하기도 했다. 산유국임에도 1인당 국민소득이 1천달러에도 미치지 못한다. 수출의 80~90%를 차지하는 원유와 가스는 매장량도 많지 않다. 2020년께면 그마저 고갈될 것이란 암울한 전망도 적지 않다. 예멘은 중동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다. 중앙정부의 권위가 지역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경 통제도 버거울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총기류를 신분과 부의 상징으로 여기는 문화는 예멘 성인 1명이 평균 3정씩 총기를 휴대하는 진풍경을 낳았다. 부족 간의 충돌에도 총기가 동원되다 보니, 한 해 평균 2천 명 정도가 이로 인해 목숨을 잃는단다. 가난한 나라, 불만에 찬 대중, 느슨한 국경 통제, 여기에 무기까지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테러’의 비옥한 토양이다. 분단 시절 남예멘은 아랍 각국 무장저항 단체들의 근거지였다. 알카에다 등 극단주의 세력도 2001년 9·11 동시테러 이전부터 예멘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살레 정권이 ‘대테러 전쟁’의 든든한 우군이 된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분단 시절부터 ‘테러’의 비옥한 토양

3월15일 오후 6시께 예멘 동부 하드라마우트주의 고대 유적지 시밤에서 자살폭탄 공격이 벌어졌다. 그곳 카잔 전망대에서 일몰을 감상하고 있던 한국인 관광객 4명이 숨지고 3명이 다쳤다. 사흘 뒤인 3월18일 현지에서 희생자의 주검을 수습해 공항으로 향하던 유족을 겨냥해 두 번째 자살폭탄 공격이 불을 뿜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는 보안당국자의 말을 따 “18살 난 첫 번째 테러범은 소말리아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19살 난 두 번째 테러범은 오토바이를 탄 채 범행 현장에서 한국인 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전했다.

2004년 6월 김선일씨가 참혹하게 스러져간 이라크는 전쟁터였다. 2007년 7월 샘물교회 교인 23명이 납치돼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씨가 끝내 목숨을 잃은 아프가니스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멘에서 벌어진 전쟁은 ‘대테러 전쟁’뿐이다. 테러는 유령과 같다. 유령을 상대로 한 전쟁의 허망함은 지난 6년여 역사가 증명해준다. 그 ‘전쟁’에 맥없이 끼어든 한국은 그예 공식적으로 ‘표적’이 됐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