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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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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700유로 세대’의 좌절

‘88만원 세대’와 비슷하게 과로·저임금·빚에 내몰린 젊은이들이 소년의 피를 계기로 짱돌을 들다
등록 2008-12-16 11:48 수정 2020-05-03 04:25

“한 잔에 4유로(약 7200원)나 하는 커피를 마시는 손님들로 북적이는 대학가 카페를 보고 있노라면, 그리스 젊은이들에겐 별다른 걱정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그리스의 젊은 세대는 지금 위기에 빠져 있다. 유럽연합(EU) 평균의 2배가 넘는 청년 실업률. 그리스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 참여저널리즘 사이트 이 지난 5월22일 소개한 한 블로거의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영국 출신으로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다는 이 블로거가 올린 ‘그리스의 잃어버린 세대’란 글을 보면, 우리의 ‘88만원 세대’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스는 전쟁 중?’ 한 소년의 죽음이 촉발한 그리스 시민들의 분노가 그리스 전역의 거리를 휩쓸고 있다. 지난 12월8일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아테네 중심가에서 한 시민이 뒤집힌 채 화염에 휩싸인 차량 곁을 지나치고 있다. REUTERS/ YIORGOS KARAHALIS

‘그리스는 전쟁 중?’ 한 소년의 죽음이 촉발한 그리스 시민들의 분노가 그리스 전역의 거리를 휩쓸고 있다. 지난 12월8일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아테네 중심가에서 한 시민이 뒤집힌 채 화염에 휩싸인 차량 곁을 지나치고 있다. REUTERS/ YIORGOS KARAHALIS

4개 국어 구사자의 월급, 770유로

‘700유로 세대.’ 그리스의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부른다. 20대 태반이 백수인 터에, 운 좋게 일자리를 구한다 해도 한 달 평균임금이 700유로(현 환율로 약 126만원)에 못 미친다는 자조다. ‘타나시스’란 그리스 네티즌은 자신의 블로그(g700.blogspot.com)에서 ‘700유로 세대’를 이렇게 정의했다. “침묵하고 있는 다수 젊은이들. 나이는 25살에서 35살까지. 과로에 내몰리고, 저임금에 시달리며, 빚에 찌들었고, 불안정한 일상에 허덕이는 이들.” 그리스 공영방송 〈ERT〉가 지난 5월 말 내보낸 ‘700유로 세대’ 관련 방송 내용의 일부를 훑어보자.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한 지나(32)는 4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학교를 마친 뒤 든든한 직장까지 얻었지만,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열기 속에 고국으로 돌아왔단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일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비서직으로 취직해 받고 있는 월급은 770유로. 5살 난 딸아이를 키우며 생활하기엔 삶이 팍팍하기만 하다.

…경영학도 출신인 이오르다니스(31)는 대학 졸업 뒤 7개월 만에야 일자리를 얻었다. 영업직이었다. 일은 고됐고, 월급은 680유로에 불과했다. 부모님 집에서 신세를 지는 것도 미안해 결국 그리스를 떠나기로 했다. 네덜란드에서 일자리를 구한 그의 첫 월급은 1700유로였고, 암스테르담 중심가의 커피값은 1.2유로였다.

…부인과 3살, 6살 자녀를 둔 마놀리스(43), 임용고시에 합격하고도 오랜 세월 정식 교사 발령을 받지 못했다. 시간제 교사로 일하면서 그가 받는 월급은 340유로, 그나마 몇 달씩 밀리기가 일쑤다. 부인의 급여와 대출, 신용카드, 그리고 허리띠를 졸라맨 살림으로 그나마 버티고 있다. 아이들이 병원에라도 가야 하는 상황이 되면, 그야말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매주 60분간 방송하는 〈ERT〉의 간판 시사 프로그램 가 추적한 탐사보도의 결정판이었다. 파장은 컸다. 1996년 첫 방송 때부터 프로그램의 취재·진행을 책임져온 저명한 언론인 스테리오스 콜로글로가 석연찮은 이유로 방송사를 떠나게 된 게다. ‘700유로 세대’ 관련 방송을 앞두고 경영진과 마찰을 빚은 터에, 계약 기간 연장 시점이 우연찮게 맞아떨어졌다. 방송사 쪽은 별다른 이유 없이 콜로글로와의 계약 연장을 ‘포기’했고, 역시 6월 들어 돌연 간판을 내렸다. ‘700유로 세대’ 문제가 그리스 사회에서 차지하는 ‘민감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그러니 이들이야말로 지난 12월6일부터 그리스 전역을 휩쓸고 있는 성난 민심의 ‘배후’로 꼽을 만하다.

지난 12월9일 그리스 고등학생들이 아테네 중심가에 자리한 국회의사당 앞에서 격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 SIMELA PANTZARTZI

지난 12월9일 그리스 고등학생들이 아테네 중심가에 자리한 국회의사당 앞에서 격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 SIMELA PANTZARTZI

과격시위와 세 발의 총탄

그리스에서 ‘과격 시위’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영국 시사지 는 12월9일 인터넷판에서 “그리스 의회 앞에선 일주일에 평균 두어 차례 각종 시위가 벌어지며, 잦은 시위는 종종 폭력을 동반하기도 한다”며 “1년에도 몇 차례씩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하는 젊은이들이 얼굴을 가린 채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서, 시위 진압 경찰과 격렬한 충돌을 벌인다”고 전했다. 하지만 12월16일 밤 9시30분께, 그리스 수도 아테네 한복판에서 15살의 ‘무정부주의자’가 공권력의 흉탄에 목숨을 잃은 것은 분명 드문 일이었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는 이른바 ‘무정부주의자’들이 즐겨 찾는 지역인 아테네 중심가 엑사르치아 지구다. 각종 시위가 빈번한 이곳에선 사건 당시에도 격한 젊은이들과 진압 경찰 간 공방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건 직후 경찰은 희생자 일행이 돌과 화염병을 던져 ‘방어’ 차원에서 허공과 땅바닥에 총을 쐈다고 주장했지만,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은 이와 사뭇 다르다. 등 그리스 현지 언론과 외신들이 보도한 목격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해보자.

숨진 알렉산드로스 그리고로폴로스는 명명 축일(세례를 받은 날)을 기념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이날 밤 늦게까지 거리를 쏘다녔다. 일행이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일부 시위대가 뭔가를 지나가는 경찰 순찰차에 집어던졌다. 순찰차는 멈춰섰고, 차에서 내린 경찰들은 그리고로폴로스와 친구들에게 다가와 욕설을 퍼부으며 을렀다. 화가 난 그리고로폴로스는 빈 플라스틱병을 집어던졌고, 이에 경찰은 총격으로 응수했단다. 모두 세 발, 그중 한 발이 소년의 가슴을 관통했다.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소년은 끝내 숨을 거뒀다. 일부 언론의 호들갑과 달리 숨진 그리고로폴로스는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시위에 나선 ‘무정부주의자’가 아니었다.

우연한 비극은 때로 ‘필연’으로 이어진다. 그리고로폴로스의 죽음이 알려진 직후부터 그리스 전역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들불처럼 일어난 성난 민심은 도처에서 차량을 불태웠고, 화염병을 날렸고, 상점의 유리창을 박살냈다. 아테네를 비롯한 전국 10여 개 도시에서 경찰서와 관공서가 시위대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로폴로스의 장례식이 열린 12월9일엔 고등학생 수백 명이 아테네 외곽 파리론 지역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은 이날 “그리스 전역이 분쟁지역을 방불케 한다”고 전했다. 그리스상업인연맹이 집계한 자료를 보면, 시위 사태 닷새째인 12월10일 현재까지 아테네에서만 모두 565개 점포가 파손돼 2억유로 상당의 재산 피해가 났다.

보수 신민주당 출신의 코스타스 카라만리스 총리가 직접 나서 희생자 가족들에게 사과했다. 파블로스 파블로폴로스 내무장관은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하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만 간다. 〈CNN방송〉이 운영하는 참여저널리즘 사이트 에서 한 그리스 네티즌은 이렇게 썼다. “이번 시위 사태는 그리스 젊은이들의 오랜 증오와 좌절의 표현이다. … 그마나 이만큼 참아왔던 게 되레 기적이다.”

5명 중 1명이 빈곤층

지난 2004년 집권한 신민주당은 강력한 긴축정책으로 재정 적자를 유럽연합이 유로화 채택 지역에 기준으로 제시한 ‘국내총생산(GDP) 3%’ 선으로 줄이는 데 골몰했다. 유럽연합은 당연히 찬사를 보냈지만, 그리스 시민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유럽연합에서 선두권인 연평균 4% 경제성장률을 유지해온 그리스에서 인구 5명 중 1명에 이르는 200만 명가량이 빈곤층이다. 그리스 통계청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30살 이하 노동자 43.6%가 평균 월급 600~700유로를 받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해 펴낸 자료를 보면, 2006년 그리스의 평균 실업률은 8.9%다. 그나마 “1998년 이래 가장 좋은 기록”임에도, 유럽연합의 평균인 7.4%보다 1.5%포인트가 높다. 실업자 가운데 55%는 장기 실업 상태이며, 장기 실업자의 40%는 29살 이하 청년층이다.

경찰의 총격으로 숨진 15살 소년 알렉산드로스 그리고로폴로스의 장례식이 사건 사흘 만인 12월9일 가족들의 오열 속에 엄수됐다. REUTERS/ OLEG POPOV

경찰의 총격으로 숨진 15살 소년 알렉산드로스 그리고로폴로스의 장례식이 사건 사흘 만인 12월9일 가족들의 오열 속에 엄수됐다. REUTERS/ OLEG POPOV

살인적인 물가도 질곡이다. 그리스 일간 는 지난 5월17일치 영문판 기사에서 시민단체 소비자보호센터(KEPKA)가 내놓은 자료를 따 “그리스의 물가는 독일이나 네덜란드에 비해 66%나 높게 나타났다”며 “그리스인들은 86가지 생필품에 한 달 평균 215.70유로를 소비하는 반면, 같은 품목을 사는 데 독일인들은 162.71유로만 써도 된다”고 전했다. 신문은 그리스 통계청의 자료 내용을 따 “그리스 소비자는 1974년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식료품 비용을 줄이기 시작했다”며 “지난해 12월 이후 지속적으로 빈곤층의 식료품 지출이 감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구촌 차원의 경기침체가 닥쳐왔으니, 켜켜이 쌓여온 소외계층의 분노가 ‘패닉’으로 흐르는 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700유로 세대’는 하염없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BBC방송〉은 “시위대 대부분은 이번 시위 사태가 생애 첫 거리시위 경험”이라며 “정작 어느 누구도 시위 사태에 대처하는 신민주당 정권의 무기력함에 놀라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시위대의 폭력성엔 동의하지 않는 이들조차도, 그들의 분노만큼은 공감한단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책임을 방기했을 때 느끼는 배신감, 그것이 끝 모를 분노로 폭발하고 있는 게다.

현재로선 이번 사태가 정치적 타협점을 찾기 쉽지 않아 보인다. 제1야당인 사회당의 게오르게 파판드레오스 대표는 이미 카라만리스 총리의 사임과 조기 총선을 요구하고 나선 상태다. 지난해 여름 산불 사태를 조기에 진화하지 못해 국가적 재난에 직면했던 신민주당 정권은 18개월여가 흐른 지금껏 재건도, 삼림 복구도 해내지 못하고 있다. 부패하고 무능하며 대중의 신뢰를 전혀 받지 못하는 정부로 낙인찍힌 이유 중 하나다. 시위 사태가 터진 시점도 좋지 않다. 그리스정교회 쪽과 일련의 국유지 매각·맞교환 거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정부 고위 인사가 연루된 부패 의혹이 잇따라 터져나온 탓에, 그리스 의회가 지난 10월 말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청문회가 한창이다. 국회 전체 의석 300석 가운데 151석을 차지하는 신민주당은 이미 여론조사에서도 사회당에 4~5%씩 뒤처지고 있다.

통치 불가에서 통제 불가로

아네테의 2008년 12월에서 1968년 5월의 파리를 떠올리는 건 아직 이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BBC방송〉은 12월11일 인터넷판에서 그리스 정론지 의 사설 내용을 따 “소년의 피가 복잡다단한 저항과 불만의 세력을 분노의 단일 대오로 묶어냈다”며 “지금까지 그리스가 통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면, 앞으로는 통제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긴, 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말했다. “젊은이가 저항하지 않는다면, 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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