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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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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뉴델리 2008년 뭄바이

미국의 대테러 전쟁 시작과 압박 국면에 터져 전열 분산 의도 관측
등록 2008-12-12 14:31 수정 2020-05-03 04:25

지난 2001년 12월13일 오전 인도 뉴델리 중심가에 자리한 국회의사당. 조지 페르난데스 당시 국방장관의 해임 문제를 두고 설전을 거듭하던 의회는 오전 11시5분께 정회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10분 남짓, 자동차 1대가 천천히 의사당 쪽으로 향했다.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흰색 ‘앰배세더’ 승용차 안에는 5명의 사내가 타고 있었다.
인도 내무부와 의회 출입 표식을 달고 있던 차량은 의사당 정문을 손쉽게 통과해 경내로 진입했다. 의사당 본관으로 통하는 길목은 모두 3개, 차량은 의원들이 드나드는 1번 게이트를 향해 움직였다. 경비요원들이 차량 쪽으로 다가섰다. 총기류와 폭탄 등이 발견됐다. 이윽고 11시20분께, 총격전이 시작됐다. 30분 남짓 이어진 총격전으로 무장괴한 5명은 모두 현장에서 숨졌다. 경찰 5명과 의회 경위 1명, 정원사 1명 등 7명도 총격전 과정에서 아울러 목숨을 잃었고, 18명이 다쳤다. 의사당 안에 있던 의원들과 정부 고위 인사들은 무탈했다. 느슨한 검문을 뚫고 괴한들이 의사당 안으로 잠입했다면, 역사는 이날을 ‘인도판 9·11 동시테러’로 기록했을 게다.

‘성동격서?’ 지난 11월29일 사흘에 걸친 유혈극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화재로 뿌연 연기에 휩싸인 인도 뭄바이의 타지마할 호텔 앞에서 소총을 든 인도군 병사의 표정이 처연하다. 연합/AP PHOTO/ DAVID GUTTENFELDER

‘성동격서?’ 지난 11월29일 사흘에 걸친 유혈극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화재로 뿌연 연기에 휩싸인 인도 뭄바이의 타지마할 호텔 앞에서 소총을 든 인도군 병사의 표정이 처연하다. 연합/AP PHOTO/ DAVID GUTTENFELDER

뉴델리 총격전 때도 라슈카르 배후 지목

사건 이튿날 인도 정부는 파키스탄에 본부를 둔 2개 무장단체를 총격전의 배후로 지목했다. ‘라슈카르에타이바’(LeT·이하 라슈카르)와 ‘자이슈에모하메드’(JeM)였다. 인도는 파키스탄 쪽에 이들 두 단체의 활동을 금지시키는 한편 금융자산을 동결시키고, 지도급 인물들을 체포해 신병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파키스탄 쪽이 순순히 따를 리 만무했다. 라슈드 쿠레시 당시 파키스탄군 대변인(육군 소장)은 인도 쪽의 주장을 반박하며 “카슈미르 해방 투쟁을 매도하기 위해 인도 정보당국이 만들어낸 드라마일 뿐”이라며 “인도 쪽이 섣부른 행동에 나서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고 경고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이날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그해 12월20일 인도 정부는 ‘파라크람 작전’이란 암호명으로 파키스탄 국경 쪽으로 군병력을 이동시켰다. 파키스탄도 곧바로 맞대응했다. 같은 해 10월7일 미국의 아프간 침공 직후부터 탈레반과 알카에다 조직원들의 월경을 막기 위해 아프간 국경지역에 배치했던 병력을 인도 국경지대로 이동시킨 게다. 12월 말까지 두 나라는 상대방 국경을 겨냥해 탄도미사일까지 배치하면서 긴장감을 더욱 높였다. 1947년 독립 이후 첨예하게 맞서온 카슈미르 지역에선 박격포탄이 상대방을 향해 날아드는 등 산발적인 충돌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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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2002년 1월까지 인도는 3개 기갑사단을 포함해 약 50만 병력을 파키스탄 국경에 배치했고, 파키스탄 쪽은 12만 병력을 국경으로 몰아갔다. 군사안보 전문사이트 ‘글로벌시큐리티’의 당시 자료를 보면, 2002년 5월에 인도군은 공수부대를 포함해 모두 70만 대군을 파키스탄 국경 3천km 지역에 배치했고, 해군과 공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파키스탄도 전체 병력의 70%가 넘는 30만 대군을 국경 일대에 증강 배치했다. 1971년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 게다. 두 나라는 미국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적극적인 중재 노력 속에 대치가 시작된 지 반년 만인 2002년 6월10일에야 군대를 물리기 시작했다.

지난 11월26일 인도의 금융·경제 중심지 뭄바이를 무간지옥으로 바꿔놓은 무장괴한은 불과 10여 명이었다. 소형 보트를 이용해 뭄바이 항구에 도착한 이들은 두세 명씩 짝을 이뤄 흩어졌고, 뭄바이 도심 10여 곳에서 살육의 광기를 사흘간 이어갔다. 숨진 이들만 줄잡아 200명, 300명 이상이 다쳤다. 생포된 1명을 빼고 테러범은 모두 사살됐다. 현장을 정리하던 인도 보안당국이 채 사용하지 않은 폭탄을 여럿 발견했다니,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세계 언론은 뭄바이의 유혈극을 ‘인도판 9·11’이라고 썼다.

뭄바이 유혈극은 개인 화기로 무장한 테러범들이 대도시 한복판에서 벌인 기이한 형태의 ‘자살공격’이었다. 테러범 한명한명이 ‘대량살상무기’나 마찬가지였다. 전례를 떠올리기 어려운 방식이다. 미 중앙정보국(CIA) 남아시아 담당 분석관 출신 브루스 리델이 와 한 인터뷰에서 뭄바이 유혈극에 대해 “전혀 새로운 형태의 공포스런 사건”이라며 “테러의 역사에서 새로운 이정표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을 조금만 더듬어보면, 2008년 11월 뭄바이의 유혈극은 몇 가지 점에서 2001년 12월 뉴델리의 총격전과 교묘히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도·파키스탄 정정 불안 공통점

“테러범들은 파키스탄 라호르 인근 무리드케에 본부를 둔 라슈카르 소속이다.” 사건이 수습 국면에 들어선 12월1일 인도 영자지 는 보안당국자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생포된 테러범 암자드 아미르 카말의 자백을 근거로 한 주장이었다. 〈AP통신〉도 “카말 등 테러범들은 인도로 향하는 배편을 마련한 직후 무자밀에게 위성전화를 걸었다”며 “또 유혈극을 벌이던 도중 호텔 손님들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파키스탄 라호르로 전화를 건 사실이 밝혀졌다”고 전했다. 뉴델리 총격전과 뭄바이 유혈극의 첫 번째 공통점, 테러의 배후로 라슈카르가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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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와 파키스탄의 국내 정치 상황도 2001년 12월과 2008년 11월의 공통점으로 꼽을 만하다. 2001년 뉴델리 총격전 당시 인도 정치권이 강경 대응에 나선 이유는 여럿이지만, 대통령 선거를 7개월여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사건 직후 성난 여론에 비춰, 테러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건 정권을 내주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내년 5월 총선을 앞두고 있는 인도 당국은 “테러 경고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가 화를 키웠다”는 비난까지 불거지면서, 강경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여론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파키스탄의 정정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불안한 긴장감으로 팽배해 있다. 1999년 10월 쿠데타로 권력을 쥔 뒤 2001년 6월 마침내 공식적으로 집권한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미국의 아프간 침공을 앞장서 지원했다. 미국의 후원을 등에 업고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함이었지만, 이슬람 진영의 거센 반발은 불을 보듯 뻔했다. 지난 8월 무샤라프 대통령이 권좌에서 축출된 뒤 혼란을 거듭하던 파키스탄 정국은 지난해 12월 암살된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의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대통령의 집권 이후에도 군부와의 갈등설 등이 나오면서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오늘의 뭄바이에서 7년 전 뉴델리를 떠올리게 하는 건 바로 ‘테러와의 전쟁’이다. 미국이 대테러 전쟁을 막 시작한 7년 전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가 국경으로 군대를 끌어오면서, 카불에서 패퇴한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그나마 거친 숨을 몰아쉴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버락 오바마 차기 행정부 출범을 앞둔 지금 탈레반과 알카에다 진영은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오바마 당선자는 이라크에서 병력을 빼 아프간에 집중하겠다고 선거 기간에 여러 차례 밝혀왔다. 실제로 지난 12월1일 외교안보팀 인선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도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땅에서, 그 전쟁을 마쳐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영국 는 12월1일치에서 상황을 이렇게 분석했다.

오바마에 대한 선제공격 분석도

“상당수 전문가들은 뭄바이 유혈극이 핵무장한 인도와 파키스탄 간 위기를 조장하거나 심지어 전쟁을 부추기기 위해 자행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를 통해 아프간 국경지역에서 테러조직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는 파키스탄군의 주의를 인도 국경 쪽으로 되돌림으로써,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란 게다. …일부에선 이번 공세를 오바마 차기 미 행정부에 대한 ‘선제공격’이라는 지적까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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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다. 은 12월4일 파키스탄 보안당국자의 말을 따 “인도와의 긴장이 높아질 경우, 아프간 국경지역에서 병력을 빼내 인도 국경 지역으로 이동 배치를 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현재 아프간 국경지대에 배치된 파키스탄군은 줄잡아 10만 명, 이 가운데 3만5천여 병력은 알카에다·탈레반과의 실전에 투입된 상태다. 인도와의 긴장이 고조되면, 아프간 국경지대에서 한창 진행 중인 ‘테러와의 전쟁’은 차질이 불가피하다. 아프간에 집중하기 위해 해묵은 카슈미르 분쟁을 중재하겠다는 뜻까지 밝혔던 오바마 당선자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역사는 그렇게 되풀되고 있다. 두 번 다 비극이다.


배후로 지목된 라슈카르는
이슬람 통치 복원·무슬림 통합 야심


뭄바이 유혈극의 배후로 지목된 ‘라슈카르에타이바’(LeT·이하 라슈카르)는 ‘순전한 자의 군대’ 혹은 ‘옳은 이들의 군대’란 뜻이다. 라슈카르의 존재는 1990년대 초반 세상에 알려졌지만, 그 출발은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간 침공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소 항전에 나선 이슬람 무장단체가 속속 등장하던 그 무렵, 라슈카르 역시 초기 형태를 갖춘 것으로 전해진다. 오사마 빈 라덴이 라슈카르 설립을 지원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안보 문제 전문 사이트 ‘남아시아테러리즘포털’(SATP)은 라슈카르가 “1990년 아프가니스탄 쿠나르 지방에서 공식 결성됐다”고 전한다.
소련이 아프간에서 철수한 이후 라슈카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오랜 세월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카슈미르 쪽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된다. 이후 라슈카르의 든든한 후견인 노릇을 한 것은 다름 아닌 파키스탄 군 정보국(ISI)이었다. 당시 ISI는 인도가 장악한 잠무와 카슈미르 지역에서 힌두족을 겨냥한 공격을 벌이고, 인도 영토 안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무장세력을 훈련시키도록 ‘은퇴한 무자헤딘’들을 조직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이 무장세력들이 ‘진화’하기 시작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슐리 텔리스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연구원은 최근 〈CNN〉과 한 인터뷰에서 “ISI는 과거 수하처럼 거느렸던 이슬람 무장세력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스스로 만들어낸 ‘괴물’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얘기다. 하긴, 탈레반 역시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맞서기 위해 미 중앙정보국(CIA)과 파키스탄 군 정보국이 키워낸 무자헤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슬람 학자 출신인 하피즈 무하마드 사예드란 인물이 이끌고 있는 라슈카르 역시 1990년대 중반부터 활동반경을 넓히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약 30km 떨어진 무리드케로 근거지를 옮긴 뒤, 본격적인 세력 확장에 나선 게다. 미 외교관계위원회(CFR)가 내놓은 자료를 보면, 라슈카르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각국의 재정지원을 받아 조직을 키웠다. 근거지인 무리드케엔 이슬람학교(마드라사)와 병원, 시장, 주거단지, 농지 등이 갖춰져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밖에도 파키스탄 전역에서 16개 이슬람 교육기관과 중등학교 135개소, 구급차 지원단과 이동식 진료소, 간이은행 등을 운영하고 있단다.
활동 목표도 달라졌다. 잠무와 카슈미르에서 인도의 점령에 맞서 저항을 벌이는 것을 넘어, 인도 전역에서 이슬람 통치를 복원해내는 게 새로운 과제가 됐다. 나아가 인도-파키스탄 주변국가의 무슬림들을 통합시켜내는 걸 궁극적인 전략 목표로 삼게 됐다는 게 CFR의 지적이다. 하지만 2001년 12월 뉴델리 총격전은 라슈카르의 활동에 일종의 전환점이 됐다. 미 국무부가 라슈카르를 해외 테러단체로 규정한데다, 파키스탄 정부조차 2002년 1월12일 라슈카르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미 국무부는 지난 2002년 아부 주바이다 등 알카에다 고위급 인사들이 파이잘라바드 등지의 라슈카르가 보유한 ‘안가’에서 체포된 점을 들어 이 단체가 알카에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본다.
활동이 금지된 이후 ‘지하’로 숨어든 라슈카르는 여러 소조직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난 2005년 10월29일 뉴델리 연쇄 폭탄공격과 같은 해 12월28일 방갈로어 인도과학대 테러공격, 20여 명이 목숨을 잃은 2006년 3월7일 바라나시 테러 등의 배후로 라슈카르가 지목됐다. 2006년 7월 뭄바이 통근열차 테러 당시에도 라슈카르의 이름이 어김없이 거론됐다. 하지만 라슈카르 쪽은 이런 주장을 일관되게 부인해왔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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