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4일 밤(미국 시각) 막을 내린 미 공화당 전당대회의 ‘절정’은 일찌감치 찾아왔다. 대의원들이 뽑은 대선주자가 후보 지명 수락 연설을 하면서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는 게 상례였지만, 이번엔 전혀 달랐다. 하긴 올 공화당 전당대회는 애초 출발부터 예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허리케인 구스타프는 9월1일 오전 10시30분 루이지애나주 해안에 상륙했다. 같은 날 오전 11시43분 허리케인 ‘브리스톨’이 미네소타주에 상륙했다.” 는 9월2일치에서 공화당 전당대회 소식을 전하며 이렇게 썼다.
민주당 전당대회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지난 8월29일, 존 매케인 공화당 대선 후보는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주 주지사를 부통령 후보로 전격 지명하면서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다. 하지만 카리브해를 강타한 허리케인 구스타프가 날로 세력을 더해가면서 ‘잔치’를 벌이기 어려워졌다. 3년 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유린한 상처가 여전히 다 아물지 않은 탓이다. 뉴올리언스 수해 사태는 부시 행정부의 대표적 실정으로 기록돼 있다. 공화당이 전당대회 첫날을 수재민 돕기 모금행사처럼 치러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윽고 힘이 약해진 구스타프가 내륙과 만나 소멸해가기 시작할 무렵, 새로운 ‘허리케인’이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의 공화당 전당대회장을 급습했다. 페일린 부통령 후보 부부가 자신들의 17살 된 딸 ‘브리스톨’이 임신 5개월째란 내용의 짤막한 성명을 내놓은 것이다. 공화당 전당대회 기간 내내 여론을 뜨겁게 달군 ‘페일린 쇼’의 시작이었다.
페일린 후보 쪽이 일찌감치 딸의 임신 사실을 ‘시인’한 데는 이유가 있다. 진보적 인터넷 사이트 에 페일린 후보 지명 직후 익명의 네티즌이 “지난 4월 다운증후군을 안고 태어난 페일린의 막내아들이 사실은 딸 브리스톨이 낳은 자식”이란 글을 올린 뒤 소문이 일파만파로 번진 탓이다. 흥미로운 점은 매케인 후보와 페일린 후보 모두 10대 미혼모를 줄이기 위한 피임법 등 성교육에 대해 적극 반대해왔다는 점이다.
“철군 계획 마련” → “신의 소명”페일린 후보에 대한 ‘폭로’는 봇물처럼 넘쳐났다. 딸의 임신 사실이 알려진 직후 페일린 후보가 ‘권력남용’ 혐의로 알래스카주 의회가 임명한 특별검사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페일린 후보가 자신의 여동생과 이혼한 뒤 자녀양육권을 두고 소송을 벌이고 있는 경찰관 마이크 우튼을 해임시키라고 월트 모네건 전 알래스카주 경찰청장에게 압력을 행사했다는 게다. 이를 거부한 모네건 전 청장은 결국 해임됐다. 이른바 ‘트루퍼 게이트’다.
게다가 페일린 후보가 ‘제2의 고향’인 알래스카주 와실라의 시장으로 재직 중이던 1996년 주민소환 투표를 당할 뻔했다는 보도까지 흘러나왔다. 시장 선거에서 자신을 적극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 경찰서장과 도서관장을 해임한 탓이었다. 잇따라 페일린 후보가 1990년대 중반 알래스카주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정치단체에 가입했다는 소문도 떠돌았고, 이어 남편인 토드 페일린의 음주운전 전과 기록도 공개됐다. 파문은 끝이 없었다.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에 대해 회의를 품는 소식도 끊이지 않았다. 는 8월31일 인터넷판에서 페일린 후보가 2006년 12월 와 한 인터뷰 내용을 소개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페일린 후보는 “알래스카주 출신 전사자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증파 계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주정부 업무에 집중하느라 이라크 상황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증파를 추진 중이라는 얘기는 뉴스를 통해 들어봤다. 정부를 신뢰하지만, 이라크 철군 계획이 마련돼 있는지 궁금하다. 또 미군 병사들이 현지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정부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인터넷판은 이 발언에서 두 가지 ‘교훈’을 이끌어냈다. 미국의 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최대 외교 현안인 이라크 정책에 대해 바빠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점과 공화당 부통령 후보가 ‘철군 계획 마련’이란 민주당 노선을 따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페일린 후보는 지난 6월 와실라의 한 교회에서 이라크 전쟁을 “신이 부여한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매케인 후보는 지난 8월29일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페일린 후보를 공식 소개하면서 “선심성 예산과 낭비를 줄인 개혁적인 정치인”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페일린 후보의 ‘과거’가 파헤쳐졌다. 는 9월1일 “페일린 후보가 와실라 시장 재직 시절인 지난 2000~2002년 550만달러에 이르는 연방정부의 선심성 예산을 따내기 위해 아예 로비업체를 고용했다”며 “주지사에 당선된 뒤에도 1억9780만달러의 선심성 예산을 편성해줄 것을 연방의회에 요청한 바 있다”고 보도했다.
그가 지난 7월 말 부패 혐의로 기소된 알래스카주 출신 테드 스티븐스 상원의원이 기업체에서 정치자금을 끌어오기 위해 만든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숨겨진 ‘경력’도 드러났다. 또 주지사 출마 당시엔 인적이 드문 알래스카주 케치칸과 그라비나를 잇는 다리 공사에 연방정부 예산 2억2300만달러를 끌어들이려던 스티븐스 의원의 계획에 찬동했다가, 취임 이후 이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입장을 바꿨다는 점도 공개됐다. 폭로는 끝이 없어 보였고, 도박사들까지 나서 페일린 후보가 낙마할 것이란 데 돈을 걸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매케인 후보 쪽은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페일린 후보의 사생활을 유린하는 것은 성차별”이란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매케인 후보는 페일린 후보에게 ‘공격적인 질문’을 퍼부었다며, 〈CNN방송〉의 간판 프로인 출연을 전격 취소하기도 했다. 또 타블로이드 신문 가 페일린 후보가 남편의 친구와 바람을 피웠다는 내용을 보도하려 하자, 소송을 벌이겠다고 어르기도 했다. 이 신문은 지난 8월 민주당 대선 경선주자였던 존 에드워즈 상원의원의 혼외정사 스캔들을 폭로한 바 있다. 시사주간지 의 칼럼니스트인 조 클라인은 9월3일 인터넷판에서 이런 매케인 후보 진영을 “성난 아마추어”라고 꼬집었다.
애초 매케인 후보는 부통령 후보로 오랜 친구인 조 바이든 상원의원과 톰 리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를 저울질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낙태권에 찬성해, 기독교 보수 진영의 반발을 사고 있는 게 문제였다. 기세를 올리는 민주당에 맞서기 위해선 ‘뜻밖의 인물’을 골라야 한다는 압박에도 시달렸다. 팀 폴렌티 미네소타 주지사와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등 알려진 인물들도 배제할 수밖에 없다. 결국 막판까지 몰려서야 최종 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다. 검증은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매케인 후보 진영은 애초 “미 연방수사국(FBI)을 통해 페일린 후보의 배경을 살피는 등 검증작업을 철저히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연방수사국 쪽은 “그런 부탁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반박했다. 는 알래스카주 하원의장을 지낸 공화당 정치인 게일 필립스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알래스카는 그리 크지 않다. 누군가 찾아와 뭔가를 묻고 다닌다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마련이다. 매케인 후보 진영이 알래스카를 방문해 페일린 후보에 대한 검증작업을 벌였다는 소리는 전혀 들어본 바 없다.”
파문이 커질수록 페일린 후보는 언론을 피했다. ‘잠행’을 하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그리고 9월3일 밤 그가 연단에 섰다. 만면에 웃음을 띤 그는 “미 합중국 부통령 후보 지명을 영광으로 여기며 감히 수락하고자 한다”고 선언했다. 전당대회장은 환호로 가득 찼다. 이날 그의 후보 지명 수락 연설은 폭로와 파문으로 이어진 지난 며칠을 반전시키고 남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기대치가 낮았던 탓일까? 거의 모든 언론도 “기대 이상의 선전을 펼쳤다”고 후한 평가를 내렸다.
“언론에선 내가 워싱턴의 정치 엘리트가 아니라는 단 한 가지 점 때문에 내 자질을 의심한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내가 워싱턴에 가는 이유는 언론의 고견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이 나라 국민을 위해 워싱턴으로 향하는 게다.”
편안한 목소리로 농담까지 곁들여가며 40분 가까이 연설문을 읽어내려간 페일린 후보에게 대회장을 가득 메운 지지자들은 쉼없이 기립박수로 환호했다. 자신의 가족을 일일이 호명하며 전국 무대에 소개한 그는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를 겨냥해 비아냥을 섞어가며 비판의 날을 세웠고, 매케인 후보에 대해 격정적으로 지지를 호소했다. 궁지에 몰린 ‘정치 신예’가 보여줄 수 있는 수준의 여유가 아니었다.
“부시 대통령과 똑같은 소리”“지방 소도시 시장은 시민운동가(오바마 후보는 한때 시카고에서 시민운동을 했다)와 비슷하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시장은 실제적인 책임이 뒤따른다는 점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걸 특정 개인의 자기 발견을 위한 여행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바다를 가르는 기적을 행하고 지구촌의 문제를 모두 해결한 뒤에 (오바마 후보는) 어떤 일을 할까? 거대 정부를 만들기 위해 세금을 올릴 것이다.”
“연설 잘하는 정치인이 말로 감동을 주는 건 한철이지만, 존 매케인은 평생 동안 행동으로 감동을 줘왔다.”
페일린의 연설에 대해 민주당 쪽에선 “페일린 주지사는 연설을 훌륭하게 전달했지만, 그 내용은 부시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들이 써준 것”이라며 “지난 8년간 부시 대통령에게 들어온 분열적이고 당파적인 공격만 가득한 똑같은 소리”였다고 점잔을 떨었다. 반면 인터넷 매체 는 “오늘밤 연설 이후 민주당이 페일린 후보를 얕잡아볼 수 없게 됐다”고 전했다. 44살의 변방 주지사가 연방정치 무대에서 화려한 데뷔전을 치른 셈이다.
미 언론의 ‘뒷조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AP통신〉은 9월5일 페일린 후보가 1987년 아이다호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6년 동안 무려 5개 대학을 전전했다고 보도했다. 하와이주에서 아이다호주, 알래스카주를 거쳐 다시 아이다호주에서 방송저널리즘 전공으로 졸업장을 따기까지 그가 숱하게 학교를 옮긴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두 달여 남은 선거운동 기간에 미 언론은 끊임없이 페일린 후보 주변을 들쑤시고 다닐 게다. 그가 이 과정을 버텨내기만 한다면, 11월4일 미 대선은 어느 쪽도 끝까지 맘을 놓지 못하는 박빙의 승부가 될 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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