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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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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또또 가자의 비극

등록 2008-03-14 00:00 수정 2020-05-03 04:25

공식처럼 반복되는 무력공세-미국 개입-협상재개… 는 부시의 하마스 무력 전복 계획 폭로해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또 잰걸음으로 중동으로 달려갔다. 이스라엘의 무력 공세로 가자지구가 다시 피로 물든 탓이다. 지난해 11월 말 조지 부시 대통령이 공들여 소집한 아나폴리스 중동 평화회의로 만들어진 ‘대화 분위기’가 얼어붙는 걸 막아야 했다. 지난 3월4일 라이스 장관의 현지 방문에 맞춰 이스라엘군도 잠시 군홧발을 멈췄다. 지난 2월27일 시작된 이스라엘의 이번 공세로 이날까지 120여 명의 가자지구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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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나빠질 것 없는 데’서 더 나빠지다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이 공세를 멈출 때까지 대화는 없다.” 라이스 장관의 방문 직전까지 ‘평화협상 전면 중단’을 외치며, 가자지구 주민들을 위해 헌혈에 나서는 등 단호한 모습을 보였던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통령은 미국의 거센 압박에 밀려 이내 ‘대화 재개’에 합의했다. 〈AP통신〉은 3월6일 아바스 대통령의 말을 따 “평화협상은 전략적 선택이며, (이스라엘과) 협상을 재개할 뜻이 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의 무력 공세에 따른 상황 악화와 미국의 개입, 그리고 아바스 대통령이 이끄는 파타당의 협상 재개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이제 일종의 공식으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이스라엘이 2월27일 공세를 시작하면서 내놓은 ‘명분’도 여러 해째 되풀이돼온 것이다.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이스라엘을 겨냥해 벌이는 로켓 공격을 뿌리 뽑기 위한 것이란 게다. 이번 공세가 시작된 직접적 계기는 이날 가자지구에 인접한 이스라엘 도시 스데로트에서 팔레스타인 쪽의 로켓 공격으로 이스라엘인 1명이 숨지고 여러 명이 다친 사건이었다. 지난해 5월 이후 팔레스타인의 로켓 공격으로 이스라엘 쪽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사망한 팔레스타인인의 90% 이상이 무장세력이다.” 이스라엘군 당국은 틈만 나면 이렇게 강조한다. 하지만 베첼렘 등 이스라엘 쪽 인권단체들은 “팔레스타인 사망자 가운데 최소한 절반 이상이 무고한 민간인이며, 이 가운데 4분의 1은 어린이”라고 지적한다. 역시 수없이 되풀이돼온 얘기다.

기실 작금의 비극은 지난해 6월 하마스가 파타와의 유혈충돌 끝에 가자지구를 장악하면서 시작됐다. 이스라엘군은 ‘경제 봉쇄’란 이름으로 이 무렵 사실상 가자지구 침공을 감행했다.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던 가자지구의 상황은 이후 줄곧 곤두박질쳐왔다. 국제앰네스티와 케어인터내셔널 등 5개 인도지원 단체가 3월6일 공동성명을 내어 “가자지구의 인도적 상황이 1967년 이스라엘의 점령 이후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고 지적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선거 직후, 라이스가 아바스 만나 의논

이들 단체는 이날 내놓은 ‘가자지구: 인도적 재난’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지난해 봉쇄 조치 이후 가자지구 150만 인구 가운데 110만 명가량이 외부의 식량 원조에 의지하고 있다”며 “민간 부문에 취직해 있던 11만 가자지구 주민 가운데 7만5천여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지적했다. “봉쇄가 당장 풀리지 않는 한 가자지구의 인도적 파국은 피할 수 없으며, 중동 평화에 대한 희망도 함께 사라지고 말 것”이란 이들 단체의 호소 역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다.

때맞춰 낯익은 ‘시나리오’가 ‘현실’이었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미 월간지 는 최근 발행된 4월호에서 부시 행정부가 선거로 집권한 하마스 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하려는 비밀계획을 세웠다고 폭로했다. 지난 2006년 1월 치러진 팔레스타인 자치의회 선거에서 예상을 깨고 이슬람주의 정치세력 하마스가 압승을 거둔 직후부터 미국이 하마스 정부 고사 작전에 나설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던 터다.

는 “미 백악관과 국무부는 하마스가 압도적으로 제1당이 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당시 선거 결과는 중동에서 민주적으로 선거가 치러지면, 친서방 세력이 낙승할 것이라던 부시 행정부의 중동정책 기조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던 셈”이라고 전했다. “하마스 붕괴 작전은 부시 대통령과 라이스 국무장관, 그리고 강경파로 잘 알려진 엘리엇 에이브럼스 국가안보 부보좌관이 직접 승인했다”고 이 잡지는 덧붙였다.

이에 따라 하마스의 선거 승리 직후 라이스 국무장관은 아바스 대통령을 만나 하마스의 권력 기반인 가자지구에서 파타 무장대원을 동원해 하마스를 제거하는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또 이집트·요르단·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 동맹국에 파타 무장대원들에게 무기 및 재정 지원을 해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단다. 실제로 이집트 정부가 가자지구에 있는 파타당 무장대원들에게 무기를 대줬다는 점은 이스라엘 당국자도 지난 2006년 12월 인정한 바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부시 행정부 내부에서조차 논란을 불렀다고 는 전했다. 이 잡지는 딕 체니 부통령의 중동담당 자문위원을 지낸 데이비드 윔저의 말을 따 “이 문제로 네오콘 진영에 심각한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고 전했다. 윔저는 파타와의 무력충돌 끝에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장악한 직후인 지난해 7월 공직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잡지는 그의 말을 따 “하마스의 가자지구 장악은 파타를 겨냥한 하마스의 쿠데타라기보다는 하마스 정부 전복을 노리고 파타가 쿠데타를 벌이려다 사전에 하마스에 제압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마스 쪽에서 그동안 되풀이해 주장해온 내용과 맞아떨어진다.

가자지구의 불행은 하마스에 대한 원망으로 쌓여간다. 이스라엘의 노림수도 여기에 있을 터다. 하지만 하마스에 대한 원망과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도 높아만 간다. 가자지구에선 누구도 하마스를 거꾸러뜨릴 수 없다. 그러니 팔레스타인의 로켓 공격을 막는 데 이스라엘에 남은 선택은 두 가지뿐이라는 3월4일치의 지적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신문은 “이스라엘로선 무력 공세 중단과 봉쇄 해제라는 하마스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거나, 대규모 지상군 병력을 동원해 무장세력을 뿌리 뽑고 가자지구 전역을 다시 점령하는 것뿐”이라고 꼬집었다.

지금으로선 이스라엘 정부가 두 번째 선택지에 다가서는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일간 는 3월4일치에서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의 말을 따 “가자지구에서 벌이는 군사작전은 한 차례로 끝낼 게 아니며,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며 “지상전도 전폭기를 동원한 공습도, 특수전도 여전히 선택 가능한 전술”이라고 전했다. 마탄 빌나이 이스라엘 국방차관이 지난 2월29일 “팔레스타인에서 ‘쇼아’(옛 히브리어로 재난이란 뜻)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말한 것도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던 게다. 이 말은 종종 나치의 ‘홀로코스트’(대학살)와 동의어로 쓰인다.

전부 아니면 전무, 두 가지뿐?

포성이 잠시 멈춘 사이 팔레스타인 쪽에서도 반격을 감행했다. 3월6일 오전 가자지구와 맞닿은 킷수핌 검문소 주변을 순찰하던 이스라엘군을 겨냥한 팔레스타인의 기습 폭탄 공격으로 이스라엘 병사 1명이 숨지고 3명이 다쳤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사건 발생 직후 이스라엘군 헬리콥터와 장갑차량 등이 득달같이 현장으로 달려갔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 ‘평화회담 재개’ 합의를 이끌어낸 라이스 장관은 총총히 현지를 떠난 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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