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P 최대 여당이 되고 여당 PML-Q은 대표조차 참패, 무샤라프는 사임 요구 거부한 채 버티고 있어
[파키스탄 총선 르포]
▣ 라호르·이슬라마바드·라왈핀디=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독재’와 ‘자살폭탄’에 신물이 났던 게다. 예고 없이 터지는 폭탄 공포를 무릅쓰고 지난 2월18일 파키스탄 유권자들은 기꺼이 투표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온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며, 그들이 전세계로 전한 메시지는 단호했다. ‘무샤라프 반대!’ ‘이슬람 무장세력 반대!’
‘왕의 정당’으로 불리는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 쪽의 ‘파키스탄 무슬림리그’(PML-Q)는 곳곳에서 참패했다. 탈레반 등 각종 이슬람 무장세력과 ‘호형호제’를 해온 ‘이슬람근본주의 정당연합’(MMA)도 강성 지역이던 북서 변경주(NWFP)에서 세속적·진보적 정당인 ‘아와미민족당’(ANP)에 큰 표 차로 패배했다.
독재와 자살폭탄이 신물난다
PML-Q를 비롯한 무샤라프 대통령의 ‘파트너들’이 당한 패배 규모는 실로 참담한 수준이다. 심지어 초드리 수잣 후사인 PML-Q 대표조차 최대 지지 기반인 펀자브주의 구자라트 지역에서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의 후광을 입은 ‘파키스탄인민당’(PPP) 후보에게 대패했다.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위성도시 라왈핀디 출신의 6선 의원인 셰이크 라시드는 군과 무샤라프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높이다 ‘괘씸죄’로 6년간 옥살이한 자비드 하슈미 ‘파키스탄 무슬림리그’(PML-N) 후보에게 졌다. 지난 2002년 PPP를 등에 업고 당선된 뒤 친무샤라프 진영으로 ‘날아가’ 국방부 장관까지 역임한 셰이크 라시드 아흐메드도, ‘불패의 신화’로 불리던 초드리 쇼바즈 같은 노회한 정치인도 무샤라프 대통령과 함께 모조리 파키스탄 유권자들의 냉혹한 심판을 받아야 했다.
선거 다음날인 2월19일 PML-Q의 이슬라마바드 본부를 찾았다. 문지기와 심부름을 하는 직원을 포함해 예닐곱 명의 당직자들만이 초상집처럼 얼어붙은 당사를 지키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지금 내 상사와는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PPP가 1등을 할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제2당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무총장 공보비서인 무스탁 아흐마드 칸(30)은 선거 참패의 원인으로 무샤라프 대통령의 ‘독선’을 첫손에 꼽았다. “대법원장을 해고하고, 언론의 입을 틀어막고, 붉은 사원에 로켓포를 쏘아댄 그 세 가지가 화근이었다. 그 모든 건 우리와 상의 없이 무샤라프 대통령 혼자서 결정한 일이다.” ‘억울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 2월16일부터 선거를 전후로 닷새 동안 부지런히 파키스탄 거리의 민심을 들어봤지만, 무샤라프 대통령에 대해선 ‘중립적인’ 평가조차 들을 수 없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이제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들에게서조차 공공연히 원망의 소리를 들을 정도다. 각기 다른 인종, 지역과 계층을 뛰어넘는 ‘공공의 적’이 돼버린 모양새다. 선거를 이틀 앞둔 지난 2월16일 북동부 펀자브주의 중심도시 라호르의 마나르 파키스탄 광장에 모여 선거 불참 집회를 벌이던 ‘인민민주운동’(APDM) 소속 시민 몇천 명은 그 좋은 본보기다.
APDM은 ‘자마테 이슬라미’(JI)라는 이슬람 근본주의 정당, 분리주의 기운이 강한 발루치스탄과 신디 지방 등 민족주의 정당들, 그리고 사회주의 좌파 정당들과 크리켓 선수에서 정치인으로 변한 임란 칸이 이끄는 ‘테릭인사프’(Tehreek Insaaf)에 이르기까지 ‘반무샤라프’란 깃발 아래 얼마나 다양한 세력들이 서로의 차이를 제쳐놓고 하나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APDM은 무샤라프 정권의 정당성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법부를 무력화한 무샤라프 정권 아래서 모든 법의 기능이 정지된 상황에서 치러질 선거는 정당성이 없다는 게 이들이 선거 불참 운동을 벌인 이유다. 선거 불참 운동이 올린 가장 큰 ‘성과’는 ‘이슬람 근본주의 정당연합’(MMA)의 분열이었다. MMA에 참여한 주요 정당인 ‘자마테 울레마이 이슬람’(JUI)은 선거에 참여한 반면, ‘자마테 이슬라미’는 선거 불참 진영에 가담한 것이다. 결국 MMA는 지지 기반이던 북서 변경주에서 3석밖에 얻지 못해, 이 지역에서 10석을 차지한 ‘아와미민족정당’에 대패했다. 투표에 참여한 정치인들이 내건 ‘이슬람 무장세력 반대’란 구호가 선거 불참 운동의 ‘혜택’을 톡톡히 본 셈이다.
27명 사망, 그래도 이 정도면 ‘평화’
그리고 마침내 선거날이 밝았다. 펀자브주 최대 도시 라호르의 ‘격전지’를 중심으로 표심의 향방을 훑어보기로 했다. 라호르와 펀자브주는 전통적으로 무슬림리그(PML-N)가 절대 강세를 보여온 지역이다. 6년여 전 당을 깨고 ‘분가’해 무샤라프 정권의 ‘파트너’가 된 또 다른 무슬림리그(PML-Q)와의 갈등은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더욱 고조돼온 터다.
우려한 대로 라호르에서 가장 민감한 선거구 가운데 한 곳으로 꼽힌 ‘괄’(Gwal)에서 선거 전날 총격전이 벌어졌다. 총격전이 벌어진 바로 그 거리의 한가운데 이튿날 투표소가 들어섰다. 선거 당일에 만난 지역 치안책임자 아흐마드 아마난 경감은 “두 당에 속한 ‘갱단’이 이 지역에선 워낙 강력하지만, 어제의 총격전은 그냥 부족 간 싸움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진 질문엔 입을 다물었다.
라호르 중심가인 그린타운에 위치한 ‘굴버그3 지역’. 마찬가지로 선거 전날 총격전이 벌어져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2월17일 밤 10시30분께 PML-N 후보인 아시프 아슈라프 일행이 이 지역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목격자들은 “한 3천 발쯤 총알을 쏜 것 같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난사’였다. 아슈라프 후보와 비서 등 5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모두들 PML-Q을 배후로 지목하며 이를 갈았지만, ‘불미스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건 현장 주변에서 목격자들의 얘기를 듣고 있는 사이, 일부 시민들이 대뜸 “무샤라프 물러가라”고 외치며 ‘즉석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투표가 끝나는 오후 5시 이후 시위를 벌이겠다고 벼르고 있던 주민들은 ‘후보자의 갑작스런 부재시 90일간 선거를 연기한다’는 규정에 따라 투표가 연기되자 김이 빠진 표정이었다.
하지만 일부 민감한 지역을 빼고는 큰 사건·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선거를 앞두고 언론에선 연일 대규모 폭력 사태가 임박한 듯 호들갑을 떨었지만, 대체로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선거가 치러졌다. 현지 일간 의 아심 술탄(32) 기자는 “선거 당일 파키스탄 전역에서 27명이 각종 폭력 사태로 목숨을 잃었다”면서도 “모든 폭력 사태가 선거와 관련된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평화로운 선거라 부를 만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선거 당일 상황만 놓고 보면 ‘완벽하진 않아도 비교적 공정한 선거였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무샤라프 대통령 진영의 참패 자체만으로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시민들 일부는 “역사상 가장 공정한 선거”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고 선거 부정이 전혀 없었다는 건 물론 아니다.
밀가루 받고 찍어주는 ‘밀가루 표심’
라호르 시내 ‘NA-144’ 선거구에서 ‘독립참관인’으로 선거 과정을 입회한 수메라 다니엘(28)은 자신이 참관한 ‘엠시 하이스쿨’ 투표소에선 여성 유권자를 전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개표를 마친 지역 선거관리위원회의 발표는 사뭇 달랐다. PML-N 소속 마흐붐 자비드 하시미 후보를 지지하는 여성표가 263건이나 나온 것으로 집계된 게다. PML-N이 펀자브 주정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 비춰, 선거 부정이 무샤라프 대통령이 장악한 중앙정부 차원에서만 이뤄지는 건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는 사례로 꼽을 만하다.
무엇보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암살과 폭력 사태가 끊이지 않은 것도 선거 부정 시비가 지속되는 이유다. 선거에 앞서 집중됐던 ‘관변단체’ 주도의 각종 선심 공약 남발도 선거 부정 의혹을 부추기고 있다. 또 야당 쪽은 물론 상당수 시민들은 2001년 무샤라프 정권이 도입한 ‘지역 위원회’ 제도를 ‘선거 부정의 본산’으로 지목한다. 한국의 통장쯤 되는 ‘나짐’이라는 불리는 지역위 의장이 선거 직전 중앙정부가 제공하는 공공자금을 뿌려가며, 갑작스레 ‘길 닦기’와 ‘일자리 제공’에 발벗고 나섰다는 게다.
‘매표 행위’ 역시 성행했다. 1500~2천루피(약 3만원)를 주면 일가족의 표를 사들일 수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라호르 시민 샤르프라즈(33)는 “그 정도 돈이면 한 가족이 몇 달은 먹고살 수 있는 수준”이라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겐 ‘매표’가 충분히 유혹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선거 이틀 전에 방문한 라호르 외곽 인도 국경 지대 부라흠 아바드 마을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접할 수 있었다. 벽돌공장 노동자인 아흐메드 라시드(38·가명)는 지지 후보를 묻는 질문에 “밀가루 300g을 받기로 하고 PML-Q를 찍기로 했다”고 말했다.
‘밀가루 표심’은 무너진 사법부를 복원하는 문제와 함께 사실상 이번 선거 최대의 쟁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시민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밀가루 값 폭등과 경제난이 “무샤라프 대통령 책임”이라며 ‘바꿔, 바꿔’를 외쳤다. 그런데도 권력 유지에 혈안이 된 무샤라프 정권은 경제 불안으로 인한 ‘민생고’를 부정 선거의 도구로 ‘활용’하는 기막힌 상황을 연출해냈다.
‘공정하고, 자유롭고, 투명하고, 평화로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철석같이 공명선거를 약속했던 무샤라프 대통령은 선거 당일 한 표를 행사한 직후 카메라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PML-Q가 과반의석을 확보하길 바란다. PML-Q는 국민을 위해 정말 열심히 일해온 당이다.” 명백한 선거운동이자, 선거법 위반이었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만난 변호사 니사르(33)는 “사법부가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거 부정에 대해 손을 쓸 방도가 없다”며 “태생적으로 공정할 수 없는 선거이기에 불참을 선택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부토 당 PPP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럼에도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해온 당’은 참패했다. 온갖 위협에 시달려온 야당들은 전체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확보하는 대승을 거뒀다. 언제든 무샤라프 대통령 탄핵이 가능해진 게다. 부토 전 총리 암살이 PPP에 가져다준 ‘동정표’를 감안하면, 이번 선거 최대의 승자는 단연 PML-N이다.
PML-N은 지난해 3월 이후 반 무샤라프 민주화 운동의 상징처럼 떠오른 파키스탄 사법부 복원 문제를 이번 선거 최대 쟁점으로 만들면서 유권자들을 사로잡았다. 반면 최대 의석을 확보한 PPP는 이 문제를 ‘차기 의회로 넘기자’며 애매한 태도를 보여왔다. PML-N은 ‘무샤라프 즉각 퇴진’을 요구하고 있지만, PPP는 이 역시 ‘차기 의회로 넘기자’고 말하고 있다.
“모든 걸 새로 구성될 의회로 떠넘기는 건 심각한 문제다.” 2월20일 이슬라마바드의 거리에선 ‘민주화의 상징’처럼 떠오른 검은 양복 차림을 한 변호사들이 다시 시위에 나섰다. 무지브 헤흐만 키아니(39) 변호사는 “무샤라프 대통령이 또다시 의회를 해산시키기라도 하면 그땐 어쩔 테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파키스탄 헌법 제58조는 대통령에게 의회를 해산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선거에 앞서 “지면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참패가 현실화한 이후에도 사임 요구를 거부한 채 버티고 있다.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는 그가 ‘의회 해산’이란 최후의 무기를 다시 꺼내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제1당이 된 PPP는 ‘민주주의가 최대의 복수’라는 부토 전 총리의 유언만 되뇌고 있다. 별다른 정책 의제를 내세우지도 못한 채 애매한 태도로 일관하는 건 선거 전이나 마찬가지다. 와시프 사이드 PPP 대변인은 선거 직전까지도 무샤라프 대통령과의 연립정부 구성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며 “선거 이후 중앙위원회에서 모든 문제가 결정될 것”이라고 답한 바 있다. 부토 전 총리의 남편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PPP 의장 역시 〈BBC방송〉 등과 한 인터뷰에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일부 지역의 개표가 여전히 진행 중인 2월22일 현재까지 PPP는 87석을 확보했다. 기대했던 ‘대승’은 거뒀지만,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으니 ‘압승’은 아닌 셈이다. 반면 샤리프 전 총리의 PML-N은 펀자브주의 ‘압승’을 발판 삼아 PPP보다 20석 부족한 67석을 확보했다. 여기에 샤리프 전 총리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PML-Q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이들에게 선거 직후부터 ‘러브콜’을 보냈기 때문이다. 지난 2002년 당을 깨고 나가 새 당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초드리 형제들’(당 의장 초드리 수잣 후사인과 그의 동생 및 사촌들)을 제외한 당선자 누구라도 ‘Q’ 당적을 버리면 ‘N’ 당적을 내줄 수 있다는 게다.
PML-N, Q만 버리면 N 내주겠다
파키스탄 정치사는 적과 동지가 하루아침에 뒤바뀐 사례로 점철돼 있다. 현재로선 연립정부 구성의 앞날을 내다보긴 쉽지 않다. 그럼에도 한 가지만은 분명해 보인다. 선거에 참여했건 불참했건, 파키스탄 국민들은 무샤라프 정권에 대한 심판을 원하고 있다. 연립정부 구성 과정에서 누가 ‘반무샤라프’의 색깔을 선명하게 하느냐에 따라 민심의 향배가 결정될 게다. 2월21일 PPP와 PML-N, ANP 세 정당이 ‘반무샤라프’ 연정 구성에 전격 합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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