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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이 선착순이라잖아요

등록 2007-12-14 00:00 수정 2020-05-03 04:25

벨기에, 중·고등학교 입학 대기자 정책 바뀌면서 이름을 올려놓으려는 학부모들은 밤샘 줄서기

▣ 브뤼셀(벨기에)=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지난달 마지막 주 목요일이던 11월29일, 벨기에 브뤼셀과 왈룬 지역의 명문 사립 중·고등학교 정문 앞은 여느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각 학교마다 학부모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길게 줄을 늘어선 풍경이 보였다. 추위 탓인지 모닥불을 지펴놓고 수프나 커피를 타서 나눠 마시는 학부모들의 모습도 보였다. 일부 학교에서는 교문을 열어줘 학부모들이 강당에서 기다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에선 학부모들이 노상에서 밤새 줄서기를 했다. 이날 벨기에 학부모들이 줄서기를 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입학 대기자 명단에 자녀의 이름을 올려놓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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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에스컬레이터

벨기에의 진학 제도는 한국과는 다소 다르다.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벨기에 학교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가 한 울타리에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가톨릭 계열의 명문 사립학교일수록 이런 경우가 많은데, 이런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같은 울타리 안에서 그대로 올라간다.

또 다른 특징은 명문학교의 기준이 학생들이 속한 가족의 계층으로 구분된다는 점이다. 귀족 가문 출신이거나 변호사·의사·교수 또는 정부 고관 같은 ‘고급 직업’을 가진 학부모가 많은 학교일수록 명문 대접을 받는다. 물론 이런 학교는 대학 진학률도 높고, 이런 학교 출신이 사회의 명망 있는 인사가 될 확률도 높다.

마지막 특징은 형제자매의 경우 같은 학교에 우선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벨기에 가정은 보통 두세 자녀를 둔 경우가 많은데, 형이 먼저 그 학교에 다니면 동생도 쉽게 그 학교에 다닐 수 있다. 다른 학교나 지역에서 오는 신입생은 이미 그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학부모의 추천을 받아야 입학이 허가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명문학교 입학에는 ‘백’과 ‘연줄’이 중요하다.

이러다 보니 부작용도 생긴다. 학생의 능력은 곧 집안의 환경으로 평가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벨기에에서는 상급학교 진학에 특별한 시험이 없기 때문에, 입학은 대부분 학부모 면담을 통해 이뤄진다. 그래서 가정환경이 윤택하지 않은 학생은 명문학교 진학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 이럴 경우, 학교 쪽은 “이미 자리가 다 찼다”는 뻔한 대답을 하곤 한다.

입학이 비교적 쉬운 공립학교에는 동유럽 출신이나 유색인종 이민자들이 많은 반면, 명문으로 꼽히는 가톨릭계 사립학교에는 ‘본토인’들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학교의 이런 폐쇄성은 사회 계층구조를 공고화하는 부작용을 수반한다. 잘사는 집 아이들이 다니는 ‘백색 학교’와 못사는 집 아이들이 다니는 ‘흑색 학교’가 자연스레 구분된다. 상급학교에 진학해도 예전의 동무들이 그대로 같이 가므로, 다른 학교 출신이나 다른 직업군의 부모를 둔 자녀들과의 교류는 여전히 없다.

이 때문에 외부에서 오는 교육열이 높은 학부모들은 결원이 생길 것을 대비해 여러 학교의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는다. 하지만 명단의 앞 순위에 이름이 있어도 입학을 장담할 수 없다. 기존에 다니던 아이들이 위 학년으로 전원 진학을 하거나 이미 다니던 학생의 학부모가 다른 자녀를 밀어넣으면 그만큼 순위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 내가 몇 번째 대기자인지 알 수 없다. 학교 쪽에서는 나중에 자리가 나면 연락을 준다고만 말해줄 뿐이다. 혹시라도 후순위자가 새치기해 들어간다고 해도 알 수 없다.

이런 모순 때문에 최근 사회당 출신인 마리 아레나 왈룬 지역 장관은 초·중등학교 입학을 선착순 접수 원칙으로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대혼란이 생겼다. 11월 마지막 주의 낯선 풍경은 이런 혼란의 단면이었다.

대리접수 대가로 몇천유로 지불하기도

원서 접수 2~3일 전부터 브뤼셀의 최고 명문학교인 ‘생 미셸’을 비롯해 일부 사립학교는 밤샘 기다림을 하는 부모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출근 등으로 직접 줄을 설 수 없는 학부모들은 대리 접수의 대가로 몇백에서 심지어 몇천유로까지 지불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이날 가톨릭 명문인 ‘생 장 밥티스트’에 접수를 한 모니카는 “오후 4시부터 줄을 서기 시작해서 밤 11시30분에야 접수를 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요식업을 하는 그는 장녀의 중학교 입학을 위해 그날 장사는 아예 접었다. 그의 접수 순위는 5번이었지만 합격을 장담하기는 어렵다. 이 학교의 정원은 175명. 지금까지 140명 정도가 같은 계열의 초등학교에서 직접 올라왔고, 나머지만 외부에 할당됐다고 한다. 이번 시행령으로 외부에 할당된 정원이 늘 것으로 기대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학교 쪽의 ‘자율’이 보장돼 있어, 몇 명이 외부에 할당됐는지, 과연 접수 순서대로 합격이 될지는 불분명하다.

이런 혼란이 알려지자 11월29일 저녁, 책임자인 마리 아레나 장관이 직접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정책 의지를 재다짐했다. 그는 “밤샘 줄서기는 이미 예상됐던 일”이라면서 “이 제도는 학부모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학교 내 계층 간 통합에 목적이 있음을 이해해달라”고 호소했다. 즉, 상하 계층에게 똑같은 입학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조치는 예상과 달리 반대 의견이 더 많았다. 벨기에 방송 〈RTL〉은 이날 저녁 이번 시행령에 대한 긴급 여론조사를 했는데, 조사 대상자 988명 중 70.4%가 새로운 조치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냈다.

먼저 꼽을 수 있는 반대 이유는 선착순 입학이 사회 통합의 잣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우파 정당 ‘개혁운동’(MR)의 베르티오 의원과 보르수 의원은 “새로운 시스템이 벌써부터 통합은커녕 혼란을 주고 있지 않느냐”며 “이번 조치는 철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나 제도에 비춰 학교 전통에 맞지 않는 학생들이 입학할 경우 통합은커녕 부적응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경고의 목소리도 함께 나왔다.

‘백색 학교’ ‘흑색 학교’ 문제는

그러나 더 중요한 반대 이유는 선호도가 낮은 학교에 대한 대책이 여전히 미비하다는 데 있다. 이번 혼란도 왈룬 지역 700여 개 학교 중 이름난 18개 학교에서만 생긴 소동이었다. 이른바 ‘백색 학교’와 ‘흑색 학교’ 문제는 여전히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이번 조치를 가장 신랄히 비판한 환경당은 “아레나 시행령에도 공립학교는 여전히 선호도가 낮다”며 “차라리 인구 증가에 맞춰 학교를 더 세워 학급당 인원을 줄이고 비선호 학교의 예산을 늘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당 출신의 앙드레 앙투안 개발부 장관도 “왈룬 정부는 에너지 절약이라는 명목으로 최근 학교 건물 유지비 중 75%를 삭감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며 “공립학교 운영에 더 많은 재원을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루뱅대학 교육학과 니케스 교수는 “상류층 학생들도 공립학교 진학을 고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공립학교에 대한 충분한 재정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며 “학생들이 스스로 계층 간 문화 교류를 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지금 벨기에 교육 당국은 학생 선발과 사회 통합을 한정된 예산으로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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