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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샤라프, 시간이 얼마 없다

등록 2007-11-23 00:00 수정 2020-05-03 04:25

‘킹메이커’ 미국 국무장관 협상 위해 파키스탄으로… 부토 전 총리와 연합, 제2의 쿠데타 가능성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존 네그로폰테 미 국무부 부장관이 11월16일 이슬라마바드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의 가택연금을 전격 해제했다. 지난 11월3일 무샤라프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촉발된 파키스탄 정국의 혼돈이 서서히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분위기다.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었던 파트너

무샤라프 대통령이 지금껏 권좌를 지킬 수 있었던 건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 탓이다. 미국이 그를 지원한 이유는 분명하다. 이웃나라인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그 전진기지로 삼은 파키스탄에서 정정 불안이 야기돼선 안 된다는 계산 때문이다. 지난 2001년 가을 아프간 침공 초기만 해도 무샤라프 정권은 대테러 전쟁의 믿음직한 동맹이었고, 그런 파키스탄에 조지 부시 행정부는 정치·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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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월14일 파키스탄 제2 도시로 꼽히는 펀자브주 주도 라호르 도심에서 소총 등으로 무장한 파키스탄 경찰 병력이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의 집으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한 채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이틀 뒤인 11월16일 부토 전 총리의 가택연금을 해제했다.
(사진/REUTERS/ MIAN KURSHEED)

하지만 이제 상황은 바뀌었다. 파키스탄의 ‘안정자’ 구실을 해야 할 무샤라프 대통령은 이제 ‘불안정자’가 돼버렸다. 스스로 부른 결과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대테러 전쟁에서 무샤라프 대통령은 미국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미국의 아프간 침공 이후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는 이슬람 강경파의 온실이 돼갔지만, 이슬람 진영의 반발을 우려한 무샤라프 대통령은 이들을 강력히 단속하지 않았다. 올 들어 ‘붉은 사원’ 등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단속을 시도하긴 했지만, 뒤늦은 ‘과욕’은 오히려 화를 키우고 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미국에도, 이슬람주의자들에게도 비난의 표적이 돼버렸다.

둘째, 무샤라프 대통령의 과도한 권력욕이 파키스탄에 정정 불안을 불러왔다. 1999년 쿠데타로 집권한 무샤라프 대통령의 권력 기반은 군부다. 그가 집권한 이후에도 육군참모총장직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파키스탄 헌법은 현역 군인의 대통령 선출을 금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지난 10월 대통령 연임에 나섰다. 반발하는 사법부를 향해 “조만간 군복을 벗겠다”고 공언했지만, 파키스탄 대법원은 그의 당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이 자신의 당선 효력에 대한 법적 판단을 내리려는 즈음 무샤라프 대통령은 ‘비상사태 선포’란 도발을 감행했다. 헌법의 효력은 정지됐고, 자신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의회도 해산했다.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자유는 군홧발로 짓밟았다. 사실상의 ‘계엄’이다. 파키스탄 정국은 거친 격량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무샤라프 대통령이 져야 한다. 미국으로선 그를 더 이상 ‘지속 가능한’ 파트너로 보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게다.

8년여에 걸친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지난달 귀국한 부토 전 총리가 무샤라프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고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파키스탄 최대 야당세력인 인민당(PPP)을 이끌고 있는 부토 전 총리는 그동안 무샤라프 대통령과 정치적 흥정을 끊임없이 벌여왔다. 그는 지난 8월15일 미 외교관계위원회(CFR)에서 한 강연회에서 “무샤라프 정권과 ‘동거 정부’를 구성할 수 있냐”는 질문에 “무샤라프 대통령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대중의 반발을 살 수 있지만, 파키스탄 안정화를 위해 지난 1년여 동안 협상을 벌여왔다”며, 권력 분점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만약 아프간에 ‘브로큰 애로’된다면…

지난 10월 무샤라프 대통령은 부토 전 총리의 귀국을 가로막았던 ‘부패’ 혐의를 거둬들였고, 두 사람이 일정한 형태의 ‘공동 정부’ 구성에 합의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이는 무샤라프 대통령이 ‘비상사태 선포’라는 최악의 카드를 꺼내들기 전까지 유효했던 상황이다. 이제 부토 전 총리는 무샤라프 대통령의 사임과 함께 내년 1월로 예정된 의회선거 때까지 파키스탄 정국을 이끌어갈 과도 연립정부 구성을 외치고 있다. 파키스탄 정국 상황이 계속 나빠질 경우, 미국도 무샤라프 정권을 더는 지탱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라도 든 듯싶다.

우연일까? 때맞춰 미 워싱턴 정가에서도 심심찮게 ‘포스트 무샤라프’ 체제를 염두에 둔 시나리오가 새나오고 있다. 는 11월15일치 기사에서 “부시 행정부가 무샤라프 대통령의 정권 유지가 어려울 수도 있다고 보고, 향후 대응책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부시 행정부 당국자들의 말을 따 “미국 입장에선 밀실 협상을 통해 파키스탄에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듯한 모습으로 비쳐지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면서도 “(미국이) 또 다른 군사 쿠데타를 부추기는 듯한 모양새는 피해야겠지만, 무샤라프 정권이 골칫거리가 됐다는 점은 정부 당국자들도 깨닫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무샤라프 대통령이 갑작스레 물러날 경우, 파키스탄 정권은 ‘과점 체제’로 갈 공산이 크다. 이런 상황이라면 미 하버드대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수학한 ‘친서방파’인 부토 전 총리가 유력한 ‘바지 사장’ 후보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부토 전 총리가 무샤라프 대통령의 사임을 강력 촉구하고 나선 것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움직임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부토 전 총리도 파키스탄 정국에 안정을 가져다주기는 어려워 보인다. 지난달 말 파키스탄 최대도시 카라치에서 그의 귀국 환영인파를 강타한 자살폭탄공격으로 140여 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은 그 불길한 전조다.

그렇지만 문제는 미국의 처지다. 미국으로선 앞뒤 잴 시간적 여유가 없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아프간의 상황이 좋지 않다.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 정부는 자칫 탈레반과 권력 분할을 선언해야 할 정도로 약세다. 이미 화려하게 부활한 탈레반의 위세를 꺾기 위해 미국으로선 하루라도 빨리 파키스탄이 안정을 되찾아야 한다. 둘째, 파키스탄은 핵 보유국이다. 벌써부터 ‘브로큰 애로’(핵무기 유출)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파키스탄 핵무기가 유출된다면, 이를 손에 넣을 가능성이 제일 높은 세력은 알카에다를 포함한 이른바 ‘과격 이슬람 세력’이다. 부시 행정부로선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쿠데타 중심에 육군참모총장?

그래서 나오는 게 ‘제2의 쿠데타’ 시나리오다. 정정 불안이 장기화하고 미국이 무샤라프 정권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한다면, 전통적으로 ‘킹메이커’ 역할을 해온 파키스탄 군부가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벌써부터 무샤라프 대통령의 뒤를 이어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으로 유력한 아슈파크 파르베즈 카야니 장군에 대한 하마평이 워싱턴 정가에서 오르내리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는 미 행정부 관계자들의 말을 따 “친미 성향의 온건파로 분류되는 카야니 장군은 파키스탄 군부에서 신망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그동안 미국의 중요한 동맹이었다. … 가능한 한 이른 시일 안에 비상사태를 끝내고, 참모총장직에서도 물러나길 바란다.”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11월15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AFP통신〉은 게이츠 장관의 말을 따 “무샤라프 대통령이 계속 ‘테러와의 전쟁’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지 여부는 앞으로 몇 주 동안 파키스탄 정정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도했다. 집권 이후 최대 위기에 몰린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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