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유럽연합의 헌법인 ‘리스본 조약’, 일정 쫓겨 의회 비준만으로 끝내려는 결정에 반발하는 국민투표론자들 늘어나
▣ 브뤼셀(벨기에)=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지난 3월 열린 로마조약 체결 50주년 기념식에서 유럽 정상들이 유럽헌법을 대체할 새 조약(일명 개정 조약)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유럽헌법 부활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이어진 6월 정상회담과 7월 정부 간 회의에서는 개정 조약의 실체가 드러났다. 10월19일에는 마침내 최종 조약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른바 ‘리스본 조약’이다. 이 조약이 오는 12월13일 유럽 정상회담에서 공식 서명되고 회원국별로 비준 절차를 거치게 되면, 지난 2005년 부결됐던 유럽헌법을 사실상 대체하게 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번 조약의 채택 과정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유럽 정상들이 지난 2005년과는 달리 ‘리스본 조약’을 국민투표에 부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밝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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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유럽의회 선거 전 발효되도록 강행
각국 정상들은 국민투표를 피하려는 표면적인 이유로 시간 부족을 꼽는다. 리스본 조약은 오는 2009년 1월을 발효 시기로 예정해둔 상태다. 발효 시기를 이렇게 빨리 정한 이유는 이전 조약인 ‘니스 조약’이 정한 법적 근거가 이미 효력을 다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니스 조약은 유럽연합을 27개국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런 근거라면 현재 진행 중인 크로아티아나 마케도니아의 유럽연합 가입 협상은 모두 근거 없는 협상이 되고 만다. 또 유럽의회 선거가 2009년 6월로 잡혀 있는데, 조약이 그 이전에 발효돼야 새 의회 구성에 차질이 없다. 그래서 2009년 1월 이전에 조약안을 홍보하고, 27개국이 모두 국민투표를 거친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마고 월스트롬 유럽연합 집행위원은 지난 10월12일 에 기고한 글에서 “이번 조약은 회원국별로 의회에서 비준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의회 비준 방식만이 리스본 조약 발효를 보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유럽 내의 분위기는 얼렁뚱땅 의회 비준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는 견해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국민투표론자들의 가장 큰 논리는 ‘리스본 조약’이 무늬만 개정 조약이지 ‘실질적 유럽헌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처럼 “유럽헌법의 채택 여부는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선언한 회원국들은 이번 것도 역시 국민투표에 부쳐야 옳다는 것이다. 결국 리스본 조약이 과연 ‘헌법의 성격을 갖는가’가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다.
일단 리스본 조약은 헌법안이 가지고 있던 국가·국기와 같은 상징 체계들을 모두 없앴다. 명칭 또한 헌법이 아닌 ‘조약’으로 격하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유럽헌법의 핵심이었던 유럽연합에 ‘법인격’을 부여하는 내용이 그대로 계승됐다. 기존의 유럽연합은 집행위원회에만 법인격이 부여되어, 국제법적 주체로서 기능이 제한됐다. 하지만 구 헌법안과 리스본 조약은 똑같이 유럽연합이 일반 국가처럼 행동할 수 있도록 법인격을 부여했다. 리스본 조약에 대통령, 군대, 국경선 획정 권한 등이 담긴 것도 이러한 국제법 주체로서의 법인격에 따른 것이다.
유럽의회가 회원국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이 아닌 ‘유럽인’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바뀌었다는 것과 유럽연합의 법률은 회원국의 채택을 거치지 않고 직접 개인에게 적용된다는 점도 유럽연합이 지역 협력체나 국제기구가 아닌 일종의 국가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조제 마누엘 바호주 유럽연합 집행위원장도 지난 7월10일 연설에서 “유럽은 이제 하나의 제국”이라며 개정 조약이 단일 유럽국가의 기초가 됨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그래서 이런 내용이 포함된 리스본 조약은 이미 부결된 유럽헌법의 원안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내용도 헌법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게 국민투표론자들의 주장이다. 즉, 회원국의 국가 주권이 이양되는 중차대한 일이라는 것이다. 유럽헌법 초안을 만든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유럽헌법회의 전 의장도 지난 7월17일 유럽의회 헌법 소위에서 “형식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헌법안과 똑같다”고 밝혀 국민투표론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헌법안 부결 뒤 비밀리에 개정 작업[%%IMAGE5%%]
국민투표를 피하려는 유럽 정상들의 시도는 리스본 조약이 ‘과연 민주적 원칙과 절차에 따라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제까지 살펴보게 했다. 여기서 무엇보다 리스본 조약의 탄생 과정이 비밀리에 부쳐졌다는 점이 부각됐다. 지난 2005년 헌법안이 부결된 뒤 집행위원회는 줄리아노 아마토 전 이탈리아 총리의 이름을 딴 ‘아마토 그룹’이라는 비공식 그룹을 가동해 헌법안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헌법안 부결에 대해 “성찰의 시간을 갖겠다”던 유럽연합이 뒤로는 개정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는 것이다. 16명의 전직 각료와 총리들로 구성된 이 그룹의 활동은 지난 6월, 개정 조약의 윤곽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리스본 정상회담을 앞두고 조약안에 대한 실질적인 협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실제로 리스본 조약이 발표되기 전 리스본에 합류한 협상단은 각 회원국에서 2명씩 파견된 법률가들이 전부였다. 6월에 공개된 조약안이 프랑스어로만 돼 있었고, ‘미니 조약’이라는 별칭에도 각종 프로토콜과 선언문까지 합쳐 거의 3천 쪽에 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번역과 검토만으로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조율사로 파견된 전문가가 회원국별로 2명이라는 것은 실질적인 내용 토론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부결된 유럽헌법은 스페인·프랑스·네덜란드·영국 등 10개국이 찬반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쳤거나 부치기로 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리스본 조약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나라는 아일랜드가 유일하다. 반면 의회 비준을 결정한 나라도 체코밖에 없다. 나머지는 유보적이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야당이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여당은 반대 입장이어서 실행 여부는 미지수다. 특히 영국 보수당은 지난 10월9일 “개정 조약은 실질적으로 구 헌법안과 똑같으므로 국민투표를 해야 할 것”이라며 노동당 정부에 국민투표를 수용하라고 압박하고 나섰다. 의회 비준을 추진 중인 프랑스에서는 최근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 중 61%가 국민투표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회 비준 결정한 나라는 체코뿐
이런 논란 속에 유럽의회의 덴마크 출신 얀피터 본드 의원은 “헌법은 정치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임무를 갖는다”면서 “정치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국민에게 그 채택에 관해 의견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역설했다. 지금 리스본 조약은 실행에 앞서 그 채택 과정부터 과연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했느냐 하는 논란 속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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