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지는 헤즈볼라 앞에 사분오열된 정권… 한국군 주둔 지역의 민심은 호의적, 치안까진 안심 못해
무장해제 vs 전쟁, 레바논 르포
▣ 티레·카나·벤트즈베일·베이루트(레바논)=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이스라엘이나 유엔군이나 그게 그거야!”
레바논 남부 카나 주민인 라티필(65)은 조금 까탈스런 표정에 목소리도 카랑카랑했다. 인생 절반 이상을 이스라엘 점령 아래서 ‘치 떨리게’ 살아왔다는 그는 지난 2000년 이스라엘군이 철수한 빈자리를 레바논 주둔 유엔군(UNIFIL·이하 유니필)이 메운 것은 ‘점령’을 연장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유니필과 이스라엘군을 동급으로 취급하는 게 놀라웠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인식이 카나 주민들 사이에선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깊게 새겨진 배신감과 불신
가정주부인 렐라 슐룹(36)도 똑같은 말을 했다. 그는 “유니필은 미국이 데려온 군대”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1978년부터 레바논에 주둔하기 시작한 유니필에 미군은 물론 영국군도 단 한 명 포함된 적이 없지만, 일부 주민들은 유엔군 주둔을 그들이 치를 떠는 이스라엘의 배후 세력인 미국의 개입 때문이라 여겼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마친 알리 발라드(19)는 “이스라엘과 유니필은 똑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니필은 이스라엘이 우리를 공격하는 걸 막지 않았다. 우리를 보호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야세르(34) 같은 이들은 “유니필이 이곳에 와서 사진을 찍어가는 것도 다 이스라엘에 정보를 넘기기 위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레바논 남부 거점도시 티레에서 동남쪽으로 약 10km 떨어져 있는 카나 마을. 그 옛날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한 마을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폭격 앞에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차례의 ‘학살’로 130여 애꿎은 목숨이 스러져갔고, 남은 건 페허의 흔적과 희생된 이들의 집단 무덤뿐이다. 주민들의 가슴속에 유니필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도 깊게 남겨놓았다.
“주민들이 유니필 건물 안으로 피신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유니필 사령부는 우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1996년 4월18일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첫 번째 ‘학살’은 벌어졌다. 피난처를 찾아온 수백 명의 민간인들을 유일하게 받아들였던 유니필에 딸린 피지군 캠프가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박살이 나고 말았다. 캠프 안에 있던 민간인 106명이 숨졌고, 116명의 민간인과 피지군 4명이 부상을 입었다. 제1차 카나 학살이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지난해 7월30일,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의 ‘7월 전쟁’ 당시 어린이 16명을 포함해 30여 명의 목숨이 이스라엘군에 의해 또다시 한꺼번에 스러졌다. 제2차 카나 학살이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일부 주민들은 “피부색이 검은 유엔군은 좋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한국군은?” 묻는 말에 쉽게도 “오케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지난해 전쟁 뒤 새로 동참한 유니필 국가들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의 반영으로 보였다. 주민들은 유니필의 국가별 특성까지 제법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티레 시내에서 타이어 가게를 운영하는 후세인 후세이니(58)는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군은 주민과 말도 하려 하지 않아 별로다. 이탈리아와 독일군은 뭐 그리 나쁘지 않고, 스페인과 포르투갈군도 그리 딱딱하진 않다. 아프리카 출신 유니필은 주민들과 친근하게 지내 평판이 좋다.”
1978년 이래 30년 동안 유니필은 주로 유럽 각국에서 온 병력으로 채워졌다. 유니필의 주둔에도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점령과 크고 작은 전쟁을 끊임없이 경험해왔으니, 이들에게 감정이 좋을 리 없다. 한국군 파병을 두고 유니필 부사령관 네흐라 준장이 “아시아 국가 출신 유엔군 파병”이란 점을 강조한 것도 이런 민심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거의 10분에 한 번꼴 신분증 검사
유니필에 대한 레바논 남부 민심을 종합해보면 지역·종교·직업별로 세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남부 중심 도시 티레만 놓고 보면 “그래도 전쟁을 막아주니까 좋다”는 수준이다. 대체로 ‘참한 반응’이라 자칫 남부 민심을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 티레 시내 식당가나 기업을 운영하는 이들은 외국군 주둔이 불러올 경제적 효과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티레 해변에서 식당 매니저로 일하는 유수프 무하마드도 이 부류에 속한다. 무하마드는 “저녁이면 스위스·프랑스 출신 유니필들이 종종 오니까 장사도 좀 되고 좋다”며 “이번 기회에 관광이 다시 살아나면 좋겠다”고 말했다. 티레 해변은 기독교도 구역으로 식당들이 몰려 있다. 주민 상당수는 실질적이고 정치적인 판단보다는 유럽권에 대한 ‘호감’으로 환영을 말하는 부류에 속했다. 한 여성 주민은 “얼마 전 스위스군과 오랜만에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눠서 정말 기뻤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또 다른 식당 주인 엘리아스(56)는 “지난 6월24일 스페인 병사를 겨냥한 폭탄 공격이 벌어진 뒤 유니필이 통 밖으로 나서지 않는다”며 손을 내저었다. 실제로 관광객이 제법 몰릴 것 같은 티레 해변을 끼고 늘어선 식당들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둘째 카나 마을처럼 이스라엘 침공으로 쑥대밭이 된 지역은 유니필에 대한 불신이 만만치 않았다. 주민들은 피부로 느낀 유니필의 역사를 토대로 자기 견해를 분명히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레바논 국경지대인 벤트즈베일 마을은 그 대표적인 본보기다. 이 마을은 지난해 전쟁으로 가장 많은 폭격과 피해를 입었다. 가게가 늘어서 있던 시내 중심가는 완전 초토화됐고, 마을 절반 이상이 여전히 페허다. 주민 대부분이 유니필에 대해 언급조차 하기 싫다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벤트즈베일에선 특히 거의 10분에 한 번꼴로 “신분증 좀 보자”고 다가서는 젊은이들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헤즈볼라 강성 지역에선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신분증을 보자던 젊은이들이 모두 헤즈볼라 조직원인 건 아니었다.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아온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외부인에 대해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주민들은 스페인·이탈리아·프랑스 등 유럽계 병사들에 대해서는 “지겹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다른 얼굴 좀 봤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왜 그렇게 밤마다 군용 트럭을 몰고 시끄럽게 이동하는지 모르겠다”는 짜증스런 반응은 벤트즈베일 마을 주민들이 공통적으로 보였다.
‘무장해제’ 대상 헤즈볼라는 ‘무당 정당’ 으로
이런 가운데 지난 7월5일 선발대에 이어 7월19일 본대 280명이 도착함으로써 한국군 동명부대의 레바논 주둔이 시작됐다. 현지 주민들에게 얼마나 호응을 얻을 수 있는지에 파병의 성패가 달렸다는 건 상식에 속한다. 이제 막 주둔을 시작한 동명부대가 예민하고 다양한 현지 여론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지켜볼 일이지만, 부대 위치가 여론이 ‘괜찮은’ 티레 시내에서 가깝다고 해서 치안 문제나 부대 활동까지 괜찮을 것으로 보는 건 오산일 수 있다.
레바논 남부의 검문검색은 검문소 수에 비해 질적으로 느슨하기 짝이 없다. 유니필에 대한 여론의 ‘반감’은 분명 현실태다. 게다가 레바논은 지금 ‘잠재적 전선’이 워낙 많아 어디서 불꽃이 먼저 튈지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영국 의 중동 전문기자인 로버트 피스크는 지난 1월 일찌감치 “세계가 레바논의 내전 기운에 무관심하다”는 경고를 내놓은 바 있다. 유니필 대변인 출신으로 공신력 있는 발언을 해온 티모르 곡셀도 “레바논에서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지적했다.
“유니필은 조금씩 약해지고 있고, 계속해서 약해질 수밖에 없다.” 레바논 유력 영자지 의 고참 기자 미셀 영은 “아랍권의 크고 작은 무장단체들이 유니필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며 “특히 알카에다의 제2인자로 알려진 알자와히리는 이미 유니필을 겨냥한 공격을 공언한 바 있다”고 지적했다. 레바논 북부 분쟁에서 보듯 이런 무장세력들은 팔레스타인 난민촌의 취약성, 레바논군의 취약성, 레바논 정치권의 내분 등을 이용해 이 땅에서 별 어려움 없이 근거지를 다져왔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욱 심해지리라는 게 현지 안보 전문가들의 대체적 전망이다.
무엇보다 남부 레바논 전면전의 주인공들을 빼놓을 수 없다. 유니필 주둔에 ‘떨떠름한 태도’를 보여온 이스라엘은 여전히 레바논 상공에 무인기를 띄워가며 꾸준히 정찰행위를 하고 있다. 명백한 휴전협정 위반행위지만, 유니필 부사령관조차 “지금은 우리도 답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방치할 수밖에 없는 상태다. 반면 유니필이 ‘무장해제’시켜야 하는 대상인 헤즈볼라는 더욱 강력한 ‘무장 정당’으로 변해가고 있다.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지난 7월23일과 24일 이틀에 걸쳐 방송된 아랍 위성채널 와의 인터뷰에서 “헤즈볼라의 로켓은 텔아비브를 포함해 이스라엘 구석구석 어디든 닿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헤즈볼라에 비판적인 미셀 영 같은 이조차 “헤즈볼라의 비무장보다는 레바논군에 합병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현실 때문이다. 유니필에게 헤즈볼라 무장해제를 바라는 건 그만큼 현실성이 떨어지는 얘기다.
이스라엘 재침공 빌미될지도
문제는 헤즈볼라의 무장해제가 이뤄지지 않는 한, 이를 빌미로 이스라엘이 언제든 레바논을 재침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유니필은 레바논 정치권 내부에서 협상을 통해 헤즈볼라 무장해제가 이뤄져야 한다는 태도지만, 취약한 푸아드 시니오라 정권과 사분오열된 레바논 정치권의 끝모를 분열 앞에 이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정치적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지는 레바논에선 오히려 ‘내전’이란 불행한 낱말이 힘을 얻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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