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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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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그 불안한 도전

등록 2007-06-15 00:00 수정 2020-05-03 04:25

‘자급형 전략’의 창괄리 정착촌, 고향 땅 포성은 멈췄는데 그들은 왜 귀향을 망설이는가

아프리카 난민캠프 르포 ② 우간다

▣ 캄팔라·호이마(우간다)=글·사진 정인환 기자inhwan@hani.co.kr

‘아프리카의 진주’란 말은 허투루 나온 게 아니었다. 지난 5월17일 오전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내려 수도 캄팔라까지 1시간 남짓 달리는 사이 마주한 빅토리아 호수의 풍광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멀리서 온 객을 마중이라도 하듯 미리 내린 빗줄기에 촉촉이 젖은 거리는 희미한 물안개가 깔린 호수와 그림처럼 어우러져 묘한 우수를 자아냈다. 그러나 우간다가 숨겨놓은 ‘진주’는 정작 따로 있었다. 복잡한 캄팔라 도심을 빠져나와 시 외곽으로 들어서자마자 시작된 열대우림이 그 주인공이다. 서부 호이마까지 포장과 비포장 도로를 이어가며 4시간여 달리는 사이, 길 양편으로 끝없이 이어진 짙푸른 숲의 향연은 긴 여정의 피로를 한꺼번에 날려보냈다.

20m는 족히 넘어 보이는 훌쩍한 망고나무가 지키고 선 한적한 마을 길을 따라 이튿날 이른 아침 창괄리 난민 정착촌으로 향했다. 콩고 땅과 맞닿아 있는 앨버트 호수를 끼고 있는 창괄리 정착촌까지는 호이마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약 98km, 붉은 황토로 뒤덮인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꼬박 2시간을 달려야 했다. 연방 날리는 흙먼지와 이슬을 머금은 밀림의 싱그런 녹음이 떠오르는 햇살을 품고도 코발트빛으로 영롱한 하늘과 어우러져 절정의 색감을 연출해냈다. 제 몸집보다 큰 물통을 이고 진 맨발의 아이들이 황토 언덕을 힘겹게 오르고 있다.

식구 수에 따라 농토 지급

창괄리 정착촌은 르완다에서 벌어진 종족 간 유혈사태로 국경을 넘어온 투치족 난민을 수용하기 위해 1960년대 초반 일찌감치 세워졌다. 1994년 투치족 반군이 르완다 수도 키갈리에 진주한 이후 르완다 난민 대부분이 귀환하면서 잠시 폐쇄됐던 창괄리 정착촌은 1997년 3월 종족 간 유혈의 잔혹극을 피해 콩고 난민들이 몰려들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02년 8월 우간다 북부 키트굼 지역에 있는 아촐피 난민 정착촌에서 삶을 의탁해온 수단 난민 8천여 명이 한꺼번에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규모가 대폭 커졌다. 현재 창괄리 정착촌엔 수단 출신 1만2천여 명(64%)과 콩고 출신 6700여 명(34%) 등 모두 6개국 1만9506명의 난민이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창괄리는 난민을 임시로 수용하는 게 목적인 ‘캠프’와 다른 도드라진 특징이 있다. 난민 스스로 자급자족이 가능하도록 지원하는 ‘정착촌’ 개념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일정한 수준의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는데다, 농사를 지으며 식량을 자급할 수 있도록 식구 수에 따라 농토도 지급된다. 캄팔라에서 만난 스테파노 세레리 유엔난민기구(UNHCR) 우간다 대표는 “우간다 정부의 난민정책은 기본적으로 ‘자급형 전략’(SRS)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이런 식의 난민정책은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많지 않다”고 소개했다.

“4인 가구 기준으로 가로 100m, 세로 80m가량의 땅을 내준다. 식구가 많으면 그에 따라 지급되는 농토가 늘어난다.” 난민정책을 총괄하는 우간다 총리실에서 파견된 키와누카 프레드(28) 창괄리 정착촌장은 “난민들은 이 땅을 스스로 일궈 식량을 자급하고 있다”며 “수확한 생산물의 50~60%는 지역 시장에 내다팔아 다른 생필품을 마련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독거노인과 모자 가정, 고아 등 특별한 지원이 필요한 1928명에 대해선 세계식량계획(WFP)이 달마다 따로 식량배급을 해주고 있단다.

난민들 사이 ‘빈부격차’ 조짐도

광활한 대지를 차지하고 들어선 창괄리 정착촌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뉜다. 창이 좁고 네모 반듯한 초가집 주변을 바나나가 에워싸고 있는 곳은 콩고 난민 집단 주거지다. 이들은 바나나와 카사바·옥수수를 주로 재배한다. 수단 난민들은 집을 둥그런 모양으로 지어놨다. 지붕과 벽 사이에 틈을 두어 통기성을 강조했고, 경작지를 늘리기 위해 나무를 베어낸 탓인지 빽빽한 숲이 초원으로 변해 있었다. 수단 난민들도 옥수수와 카사바를 기르지만, 요즘 뜨는 작물은 단연 환금성이 높은 담배란다. 인근 현지인 마을에서 담배를 입도선매해온 ‘브리티시아메리칸타바코’(BAT)가 4년여 전부터 아예 창괄리 정착촌 안으로 진출하면서 생긴 변화다. 정착촌 관계자는 이 업체가 “수단 난민 거주지역 들머리에 담배 수거작업을 위한 창고까지 확보하고 있다”며 “해마다 파종기에 담배 농사에 필요한 종자와 각종 농사도구를 준 뒤, 수확기에 생산량에 따라 비용을 제한 나머지 돈을 내준다”고 전했다.

창괄리 정착촌의 ‘상대적 여유’는 5월18일 오전 정착촌 들머리 카송가 마을 한켠에서 열린 장마당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서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앨버트 호수 인근 롼야와와 마을 난민들은 호수에서 잡은 생선을 말려 내왔고, 크고 작은 좌판마다 각종 곡물과 싱싱한 채소, 송이째 따온 바나나 등 갓 수확한 과일이 즐비했다. 프레드 촌장은 “카송가·응고로외·카고마·롼야와와·모시사 등 정착촌 전역에 크고 작은 장마당 11개가 마련돼 있으며, 난민들은 자체 자치위원회에 약간의 돈을 유지비 명목으로 내고 언제든 장사에 나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적어도 에티오피아 케브리베야 난민캠프에서 만난 배고픔과 절대 빈곤의 서글픈 그림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심지어 난민들 사이에서 ‘빈부격차’의 조짐마저 엿보일 정도란다. 극히 일부지만 장사 수완을 발휘해 제법 돈벌이를 하는 이들이 나오고 있다는 게다. 이를테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정착촌에서 발전기를 구해다 전기를 뽑아, 입장료를 받고 텔레비전을 보여주는 업소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이렇게 ‘부’를 쌓은 난민 자녀를 중심으로 캄팔라 등지의 대학에 진학한 사례가 20여 명에 이른다는 게 정착촌 관계자의 귀띔이었다. 물론 절대다수 난민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얘기다. 바헤무카 플로라 알리스 희망행동 교육담당관은 “2006년 7월부터 중등교육비 지원이 중단된 뒤 중퇴율이 25~30% 급증했다”며 “지난 4월에는 교사 월급조차 제때 주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고 전했다. 같은 시점에 유엔난민기구가 전세계 900만 어린이·청소년 난민 지원을 위해 의욕적으로 시작한 ‘나인밀리언캠페인’이 무색하기만 하다.

그래도 난민이다. 당장의 배고픔은 면했지만, 난민 생활의 고단함이 크게 나아질 건 없었다. 고향을 떠나올 때 겪어야 했던 참혹한 유혈의 잔영은 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오랜 난민살이는 삶의 무기력을 부추겼다. 더 나빠질 건 없지만, 그렇다고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면서도, 그 끝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창괄리 난민 가정 상당수가 알코올 남용과 그로 인한 가정폭력에 허덕이고 있는 것도 이런 막막한 현실의 반영이다.

“난민 남성 가운데 일부는 추수할 때 갚기로 하고 파종 때부터 외상 술을 마신다. 자연스레 농삿일은 뒷전이고, 남겨진 일은 여성과 아이들의 몫이 된다. 이에 반발이라도 할라치면 주먹다짐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정착촌 깊숙이 들어온 맥주를 가득 실은 대형 트럭을 신기하게 바라볼 일이 아니었던 게다. 독일계 구호단체인 ‘아프리카희망행동’(AAH·이하 희망행동)의 사뮈리 무가야 대표는 “올 들어 정착촌에서 발생한 가정폭력 및 성폭행 사건은 지난 4월 말 현재까지 보고된 것만 45건으로, 한 달 평균 10건 이상인 셈”이라며 “하지만 웬만한 건 쉬쉬하는 분위기니 실제 사건 발생 건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떠나야 하는 땅, 정을 쏟지 못하지만…

농사를 짓고 있다지만 내 땅이 아니다. 거처가 있다지만 언젠간 떠나야 한다. 맘 붙이고 살아가야 함을 잘 알면서도 못내 정을 쏟지 않는 것은 10년을 훌쩍 넘긴 난민생활이 끝없이 이어져선 안 된다는 마지막 희망의 몸부림이다. 그러나 고향 땅의 포성이 멈춘 뒤에도 난민들은 이내 귀향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밤에 반군이 들이닥쳐 마을을 휩쓸었다. 가족 5명이 비명에 갔다. 남편도 그때 숨졌다.” 5월18일 오전 창괄리 들머리에 자리한 카송가 마을의 한 오두막에서 만난 아이린 라레치(65)는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수단 남부 고향 마을을 등지고 난민으로 떠돌기 시작한 것은 1994년. 살아남은 가족·친지의 손에 이끌려 황망한 발걸음 재촉해 허위허위 국경을 넘은 뒤로 벌써 13년을 천덕스레 버텨왔다. 우간다 북부 아촐피 난민캠프에서 지내던 1997년, 이번엔 우간다 반군세력이 야수처럼 캠프를 유린했다. 함께 피난을 나온 친척과 맏딸(당시 38살) 등 7명이 죽거나 다쳤다. “아득한 세월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창괄리로 옮겨와서도 그의 수난은 끝날 줄 몰랐다. 이주 직후 어린 나이에 가장 노릇을 해온 아들(당시 19살)을 말라리아로 잃었다. 그때부터 14살 막내가 노모를 도와 밭일을 도맡고 있다. “고향에 아무도 없으니,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아직도 떠나올 때만 생각하면 몸소리가 쳐진다.” 라레치가 맥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고향인데, 죽기 전엔 돌아가야겠지. 그래도 지금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돌아가서 어떻게 사는지 보고, 그때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게다.”

비교적 최근인 지난 2004년 6월 창괄리에 정착한 조세핀 케이와니(27)도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2003년 7월18일은 수단 남부 바라알카진 지역에 살던 케이와니의 삶이 송두리째 뒤바뀐 날이다. 병원에서 행정요원으로 일하던 그의 남편이 그날 반군들의 손아귀에 붙들려갔다. 이유는 알 수 없었고, 그저 흉흉한 소문만 떠돌았다. 남편이 꿈처럼 탈출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안도한 것도 잠시, 반군들이 득달같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지옥보다 더 끔찍한 밤의 시작이었다.

“정말 남편이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모른다고 할 때마다 뭇매가 퍼부어졌다.” 그를 묶어놓은 채 한동안 매질을 하던 반군들은 급기야 성폭행까지 저질렀다. 더 이상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밤을 새워 악귀처럼 죽음의 문턱으로 그를 몰고 가던 반군들은 날이 밝자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을 챙긴 뒤 사라졌다. 그대로 죽을 줄만 알았는데, 밤새 숨죽이고 있던 이웃들이 구원의 손길을 뻗쳐왔다.

“당시 임신 3개월째였다. 그렇게 당하고도 용케 유산이 되지 않았다. 이웃들의 도움으로 며칠 몸과 마음을 추스른 뒤, 남몰래 트럭을 타고 ‘예이’란 동네로 가 그곳에서 몸을 풀었다.” 출산 뒤 서너 달 동안 휴식을 취한 그는 이윽고 국경을 넘었고, 우간다 국경에서 체포돼 수도 캄팔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그가 창괄리에 정착한 것은 남편의 실종 이후 근 1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였다. “반군들은 아직도 남편과 찍은 내 사진을 가지고 있을 게다. 돌아가면 죽을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고,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셨다. 남편도 죽었으려니 한다. 수단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 그의 목소리가 높게 흔들리면서 안겨 있던 아이가 참았던 눈물을 대신 쏟는다.

‘자발적 귀환 프로젝트’ 신청자는 130여 명뿐

유엔난민기구와 우간다 정부는 올 4월 초부터 창괄리 수단 난민들을 대상으로 ‘자발적 귀환 프로그램’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2005년 1월 수단 정부와 반군인 수단인민해방운동(SPLM)이 휴전을 선포한 뒤 수단 남부 상황이 안정을 되찾았다는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5월 중순까지 귀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난민은 130여 명에 불과하다. ‘지켜본 뒤 결정하겠다’는 정서가 팽배하다. 귀환 신청자 가운데 56명은 애초 지난 5월16일 우간다 북쪽 국경 너머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수단 정부 쪽이 막판에 ‘준비 부족’을 이유로 일정을 무기한 연기하면서 그나마 발목이 묶였다.

“지난 1994년 수단 남부 마구윈에서 아버지가 반군들의 손에 죽은 뒤 어머니와 6남매가 함께 우간다 국경을 넘었다.” 케빈 벨라(22)와 조세핀 출라스(25) 자매는 고심 끝에 ‘귀환’을 결정하고 초조하게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케빈에게 귀환을 결정한 이유를 묻자 “여기선 할 게 없다”는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한 뒤 집안에서 농삿일만 거들며 지내왔다”며 “어차피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는데, 차라리 미리 가서 식구들 돌아올 때를 대비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언니 출라스는 3살배기 아이를 안고 있었다. 남편은 아이가 태어난 직후 수단으로 가 소식이 끊겼단다. “남편이 떠나고 나서 계속 시름시름 앓아왔다. 여자 혼자 애 키우는 게 어디 쉽겠나. 어려움이 많았다. 식량도 모자랐고….” 출라스는 남편이 수단으로 간 것도 “아이까지 태어난 마당에 이곳에선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수단에서 남편을 만났다는 사람이 있는데, 군인이 돼 있다고 하더라”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고향으로 돌아가 수소문하면 남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없게 말했다.

제시카 아쿠에로(25)도 ‘귀환’을 택했다. 그는 수단 남부 토리토 출신이다. 부모는 모두 숨졌지만, “고향 마을에 아버지 땅이 꽤 남아 있는 것으로 안다”는 게 그가 귀환을 결정한 첫 번째 이유였다. 그는 “돌아가면 아버지가 남겨둔 땅을 찾아 농삿일을 할 것”이라며 “친척들이 아직 살고 있을 테니 땅을 되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을 잇는 새 20개월 된 딸은 그의 품 안에서 칭얼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난민’으로 만나 정착촌에서 가정을 꾸린 남편은 지난 2월 콜레라로 비명에 갔다. 결혼하기 전까지 그를 돌봐준 할머니도 지난해 숨을 거뒀다. 이제 창괄리에 그의 피붙이는 아무도 없다. 귀환을 결정한 두 번째 이유다.

평화가 찾아왔다지만 선선히 믿기지 않는다. 모진 세월을 견뎌내는 사이 꿈도 희망도 사라진 지 오래다. 돌아가야 할 시점이 다가왔지만 여전히 망설이는 이유다. 본국 귀환은 난민들에게 ‘희망찬 미래’가 아니라, 절망의 끝자락에서 피할 수 없이 마주한 ‘불안한 도전’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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