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거리의 기억’을 두드리다

등록 2007-06-15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흩어져버린 6월항쟁의 시각문화 유산들을 되찾기 위하여</font>

▣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걸개그림요? 정말 보고 싶죠. 잃어버린 자식과 같은 건데…. 밤새도록 급박한 상황에서 그렸지요. 죽은 자의 초상은 미리 준비할 수 없잖아요. 급박감, 상상력이 뒤범벅되어 만든 것인데, 못 그렸어도 정말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그림들이에요.”

주먹 쥐고 날아오른 ‘이한열 부활도’

1987년 6월항쟁의 현장에서 걸개그림을 그렸던 중견 참여작가 최민화씨의 고백이다. 6월7일 서울 서대문 문화일보 갤러리에서 개막한 6월항쟁 20주년 개인전에 6월항쟁을 추억한 1992~2002년의 작품들을 걸면서도 작가는 내심 그때 거리의 그림들을 추억하고 있었다. ‘386’의 뇌리에 강하게 남은 이한열씨의 부활도와 초상, 김귀정씨 등 숱한 민주열사들의 걸개그림과 투쟁도를 그렸던 현장미술의 스타가 그였다. 그 시절 명작들은 이제 종적을 찾을 길 없다. 초현실적 터치로 주먹 불끈 쥐고 날아올랐던 이한열 부활도는 100만 인파가 모인 7월 장례식 때 전경들이 부숴버렸다. “그린 순간이 주마등처럼 기억난다”는 그 작품은 잔해조차 수거하지 못했다. ”나머지 그림들도 아마 집회하고 시위하는 과정에서 그냥 없어졌을 것”이란 최씨는 “찾으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했다.

최씨의 소망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6월항쟁은 그 주역이던 386세대에게 또 다른 문화 체험의 기억으로 남았다. 20년 전 최루탄 연기 일렁거리는 시위장을 감싸고 돌았던 운동가요, 투쟁가, 걸개그림이나 판화들의 이미지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이한열씨 장례식장의 100만 인파 속에서 꽃처럼 빛났던 그의 부활도와 황톳빛으로 빛났던 이씨의 영정(최병수씨의 작업이다)은 지금도 회자된다. 그러나 당시 현장을 수놓았던 걸개그림, 판화, 문화운동의 문건, 수첩, 회의록, 현장기록 등의 성과물들은 거의 대부분 흩어져거나 묻혀 있다. 20돌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항쟁의 정사 기록이 없는 것 또한 그런 맥락이긴 하지만, 그나마 가장 구체적인 실체를 양산했던 시각문화 유산들에 대한 기본 아카이브 작업(특정 장르에 속하는 정보를 모아 두는 작업)조차도 진척되지 않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기관이 나서 6월항쟁 문화유산 모으길”

현재 민주화운동 관련 문화 아카이브 작업을 추진하는 곳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유일하다. 지난해부터 70년대 말에서 92년까지의 민중가요, 참여가요 등에 대한 조사·정리 작업을 벌이고 있다. 올해는 80년대, 내년은 90년대까지 주요 민중가요의 디지털 재생, 악보화, 구술 채록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사료 소장자가 극소수에 편중돼 있고, 기억에 의존하는 구술 채록 작업도 어려움이 많다. 2009년부터는 마당극, 풍자극 등의 연희 콘텐츠 정리작업이 시작되지만 이런 어려움은 마찬가지일 것으로 예상된다. 민중미술의 경우 2005년 민족미술인협회 쪽이 10여 상자 분량의 활동 자료들을 사업회 쪽에 기증했으나 정리 등 콘텐츠화 작업은 인력과 시간 예산 부족으로 2011년께야 시작될 상황이라고 한다. 80년대 중반 이후 미술운동에 관한 정리된 성과는 2005년 나온 민족미술인협회의 라는 빈약한(?) 단행본이 고작이다. 6월26일까지 부산민주공원 기획전시실에서 20년 전 부산 지역 대학 그림패의 소장 자료를 수집 전시 중인 아카이브전 ‘거리의 기억’은 그런 맥락의 문제의식을 깔고 있다. 기획자인 민미협 소속 작가 배인석씨는 “작가들끼리도 사회 민주화의 역사만 이야기하지 문화운동 역사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며 “그 답답함과 과학적 아카이브의 필요성을 같이 부각하고 싶었다”고 했다. 미술평론가 최열씨도 “문화운동의 주체들이 뿔뿔이 흩어진 현 상황에서 자체 노력으로 아카이브를 기대할 수 없다”며 “공공미술관이나 지자체 사료관 등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6월항쟁의 문화유산들과 자료들의 기획 수집과 정리, 평가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