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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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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를 잊지 말라

등록 2007-03-16 00:00 수정 2020-05-03 04:24

1954년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장 주변에서 조업 중 피폭된 일본어선을 기리는 ‘비키니 데이’…“비키니를 입고 즐기는 행사” 쯤으로 기억이 옅어지는 것은 군국주의 노골화와 한 몸일까

▣ 야이즈(일본)=글·사진 황자혜 전문위원 jahyeh@hanmail.net

녹차와 귤로 유명한 일본 시즈오카현 야이즈시, 후지산이 거대한 멀티플렉스 화면처럼 눈에 들어와 박히는 곳이다. 지난 3월1일 이곳으로 일본 열도 전역에서 1천여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평화롭기만 한 도시 풍광에 걸맞지 않게 이들이 몰려온 이유는 ‘핵’ 문제 때문이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그리고 비키니…

일본의 대표적 반핵단체인 ‘원수폭 금지 일본협의회’(이하 원수협)가 ‘평화로운 아시아를 위해 지금 피폭국 일본의 역할을 묻는다’는 주제로 연 이날 국제교류포럼은 일본은 물론 미국·중국·한국·필리핀 등지의 평화운동가까지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대한 반성으로 전쟁을 포기한다는 일본의 ‘평화헌법 9조’를 지키고, 히로시마·나가사키의 비극을 두 번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시민사회의 의지를 드러내기 위한 행사였다.

반세기 전, 1954년 3월1일 새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계속된 미국과 옛 소련 사이의 핵무기 개발 경쟁이 격화하면서 미국은 핵폭탄 독점 체제의 아성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핵무기 개발실험을 벌였다. 태평양의 마셜군도 비키니섬에서 벌어진 수소폭탄 실험이 그것이다. 히로시마를 잿더미로 만들었던 원자폭탄의 1천 배 이상의 위력이라니, 상상력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게다가 수소폭탄은 원자폭탄에 비해 그 폭발력도 폭발력이지만 다량의 방사선, 이른바 ‘죽음의 재’를 뿜어낸다. 미국은 언제나처럼 살상무기에다 ‘브라보’라는 이름을 붙여 비키니섬에 투하했고, ‘죽음의 재’는 마셜군도 주민만 할퀴고 지나가지 않았다. 두 차례의 피폭으로 ‘핵 악몽’이 채 가시지 않은 일본인들까지 수폭의 위력 앞에 다시 한 번 몸을 떨어야 했다.

미국이 ‘지상낙원’을 ‘불의 지옥’으로 몰아간 수소폭탄 실험을 할 당시 시즈오카현 야이즈를 출항한 참치어선 ‘제5 후쿠류마루호’는 비키니섬 인근 해역에서 조업 중이었다. 당시 참치어선에 타고 있던 23명의 선원 전원이 피폭을 당했고, 결국 그해 9월23일 무선기장 구보야마 아이키치(당시 39살)가 “원수폭 피해자는 나를 마지막으로 하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게 된다.

세계 유일의 피폭국 일본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그리고 비키니로 이어진 미국의 핵실험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었다. 삽시간에 ‘원수폭 금지’ 서명운동이 번져나갔다. 당시 일본 유권자의 과반수(3400만 명)를 서명운동으로 이끈 그 힘은, 이듬해 1955년 제1회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를 개최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 결과로 일본 ‘원수협’이 결성되면서 반세기에 결친 원수폭 금지운동이 바로 이날 ‘비키니 데이’를 기점으로 확산돼온 것이다.

세월은 무상한 것인가? 이번 비키니 데이를 기념하기 위한 이날 포럼에 참석한 필리핀 평화단체 ‘전쟁스톱연합’의 멜씨 프로렌시아 창 공동의장은 일본 입국사증(비자) 신청을 위해 방문한 일본대사관 직원에게서 ‘색다른’ 질문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비키니 데이를,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치르는 행사쯤으로 알더라”며 웃었다. 평화헌법 개악과 군국주의화 움직임은 피폭과 전쟁의 기억이 옅어지는 것과 한 몸인 게다.

반핵·평화운동의 세계적 연대를 선언하다

‘핵무기 폐절.’ 포럼 참석자들이 굵은 글귀가 새겨진 펼침막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잊혀져가는 비키니섬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의 시작이다. 참석자들은 또 지구촌 전역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는 한편 냉전 시절의 낡은 핵전략을 놓지 않는 미국에 맞선 ‘반핵·평화운동의 세계적 연대’를 선언했다. 일본 평화운동 세력이 반세기 동안 기억해온 비키니 데이 행사가 갈수록 노골화하는 아베 총리 정부의 군국주의화에 맞선 아시아와 세계 시민사회의 연대의 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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