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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라, 고향 아프리카로

등록 2006-05-19 00:00 수정 2020-05-03 04:24

내전 겪은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의 ‘귀환 프로젝트’ 현지 리포트… 지긋지긋한 빈곤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의 재정착이 절실하다

▣프리타운(시에라리온)·부두부람(가나)=박용현<한겨레>24시팀 기자 piao@hani.co.kr

“쿠셰, 하우 디 버디?”

지난 5월4일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 기자의 현지 안내를 맡은 국제이주기구 요원 에디 카마라는 이른 아침 호텔로 찾아와 ‘크리오’말로 인사를 건넸다. “하이, 하우 아 유”라는 뜻이다. 크리오말은 영어와 토속어가 섞인 변종 언어로, 공식 공용어인 영어를 제치고 서민층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해방된 노예들이 건설한 나라의 독특한 지문 같은 언어다. 서아프리카는 몇백 년 전의 노예 수출에서부터 1990~2000년대의 내전으로 인한 대량 난민 발생에 이르기까지 늘 ‘떠나는 땅’이었다. 하지만 노예들이 다시 돌아와 나라를 세웠듯, 고향을 떠났던 난민들의 귀환이 이어지고 있다. ‘귀환의 땅, 서아프리카’야말로 국제사회의 최대 화두가 되고 있다.

귀환 패키지 제공하는 라이베리아

이날 카마라가 안내한 곳은 프리타운 동쪽 21km의 그라프톤 마을. 이웃나라 라이베리아에서 내전을 피해 온 난민들과 지난 2002년 끝난 시에라리온의 12년 내전 동안 고향을 떠난 국내 유민들이 한데 모여사는 난민 캠프다. 흙과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집들이 남루하게 서 있고, 흙집 안에는 가구라곤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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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을 들여다보니, 맨바닥에 담요 한 장만 덩그러니 깔려 있었다. 말 그대로 비바람을 막는 것이면 족한 생활이다. 우물이 한 곳밖에 없어, 아이들이 땡볕 아래 물통을 들고 우물가에 줄지어 서 있었다.

앞서 지난 4월27일 방문한 이웃나라 가나의 난민 정착촌 ‘부두부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도 아크라를 출발하자마자 찜통으로 변한 차량 안에서 한 시간여를 버틴 끝에 다다른 이곳엔, 141에이커 넓이에 4만2천여 명의 라이베리아 난민이 살고 있다. 화장실이 12개에 불과하다는 설명을 거리의 악취가 증명했다. 3천여 명의 아이들이 학교 시설 부족으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물은 물탱크로 실어와 배급하는데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갈 곳 없는 난민들인지라 이런 환경임에도 거주자가 많았지만, 차츰 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라프톤 캠프의 경우 한때는 주민이 1만3천여 명에 이르렀지만 지금은 몇천 명에 불과하다. 캠프를 관리하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이 난민정책을 ‘자립’과 ‘재정착’에서 ‘자발적 귀환’으로 바꾸면서 이곳 정착민들에 대한 지원은 줄고 있다. 난민들에게 목수일, 재봉 등을 가르치던 기술교육소도 텅 비어 칠판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상태였다. 캠프 안에는 하릴없는 젊은이들이 배회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나의 부두부람 정착촌에서도 마을 입구에 설치된 상담소에서 라이베리아 난민의 귀환 상담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루 20여 가족이 상담을 하고, 주마다 60여 명씩 귀환한다고 한다. 최근엔 정착촌의 자치기구인 주민복지위원회 대표 5명이 유엔 직원과 함께 라이베리아를 직접 찾아 현지 상황이 귀환해도 좋을 정도인지 점검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오랜 내전으로 피폐해진 라이베리아는 지난 1월 아프리카 첫 여성 국가 원수인 엘렌 존슨 설리프가 선출된 뒤 국가 재건의 길에 들어섰다. 유엔도 라이베리아 난민들에게 자발적 귀환을 권유하고 있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 프리타운 사무소의 이사벨 미시치는 “라이베리아 난민의 자발적 귀환에 집중한 올해 1~4월 8천여 명이 돌아왔고, 앞으로 1만4천~1만5천 명의 추가 귀환을 기대하고 있다”며 “귀환 난민에게는 돌아가는 길의 교통 수단과 식량, 도착 뒤 정착 지원 등 ‘귀환 패키지’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4년 전 내전이 끝난 시에라리온의 경우,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나 시에라리온 사람이 있다”고 할 만큼 국민들이 각국으로 흩어져 있었으나, 그동안 13만 명이 유엔의 귀환 프로그램에 따라 돌아왔다. 이제 인근 서아프리카 지역에 남아 있는 난민은 1만4천여 명에 불과하다는 게 미시치의 설명이다. 외국 대신 국내의 다른 지방으로 피해갔던 국내 유민도 16만 명이 유엔의 도움으로 고향에 재정착했다. 붕괴된 마을에 벽돌과 나무로 집을 짓고, 농토를 다시 일구고, 일부는 비누를 만들어 파는 등 소규모 자영업을 시작했다.

다이아몬드는 있으나 개발자가 없다

난민의 귀환은 이들 아프리카 나라에 어떤 의미이며, 왜 국제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을까?

국제이주기구(IOM) 프리타운 사무소의 앤드루 초가 소장은 그 사활적 의미를 역설했다. “시에라리온은 다이아몬드와 보크사이트가 나오고, 어족도 풍부하고, 어떤 식물이든 꺾어 심기만 하면 저절로 자라는 비옥한 토지를 가졌지만, 기술과 노동력이 없어 개발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내전이 끝난 뒤 파괴된 학교, 병원, 법원 등을 새로 지어봐야 이곳에서 일할 인력이 없어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에서 6·26 전쟁 때 많은 인력이 해외로 피난한 뒤 전쟁이 끝나고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해보라.” 시에라리온 개발경제계획부의 데스먼드 코로마 국장은 정부의 빈곤 극복 프로그램 중 제1단계 목표가 난민의 재정착이라고 말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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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을 겪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시에라리온의 최대 문제는 빈곤이었다. 프리타운 시내에 즐비한 빈민가를 돌아보면 난민촌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생활 수준이 목격된다. 국민 대다수가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상황이다. 이런 빈곤을 극복하려면 개발과 투자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인적 자원 확보가 다급한 것이다.

1994년 내전을 피해 영국으로 건너갔다 돌아온 압둘 카림 코로마(45)는 그렇게 귀환한 난민 중 한 명이다. 그는 영국에서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호텔과 식당에서 2년 동안 일한 뒤, 영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계속 불법 체류자 생활을 해오던 코로마는 지난해 IOM이 운영하는 자발적 귀환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IOM의 도움을 받아 지난 3월 귀국한 그는 프리타운의 상업지구인 프레딕가에 조그만 가게를 열어 운영하고 있다. 막상 돌아온 뒤 코로마는 약간 실망한 기색이다. “도로나 교육 여건, 전기 공급 등 인프라가 10년 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가게를 닫고 싶지 않다”며 “정부가 국가를 재건하고 국민들이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벌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물론 대다수 난민이 흔쾌히 돌아오려 하는 건 아니다. 가나와 시에라리온의 난민촌에서 만난 라이베리아 난민들은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말했다. 부두부람 마을의 주민복지위원회 부위원장인 아무 토와는 “우리가 지금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기술 훈련 등 조국 재건설의 준비가 덜 됐기 때문”이라며 “우리에게 고기보다 낚싯법을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를 지원해줌으로써 라이베리아가 정상 국가로 재건될 수 있다”며 “한국 정부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영국·스위스 등 유럽 국가들은 코로마의 사례처럼 불법 체류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정착할 수 있도록 귀환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한 사람당 영국은 1천파운드(173여만원), 스위스는 1천스위스프랑(76여만원)을 준다. 앤드루 초가 소장은 “한국 정부도 불법 체류 난민을 그냥 추방만 할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귀환해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시에라리온에 정신과 의사는 단 한 명

내전 이후 국가들이 겪는 특히 심각한 문제는 고급인력 유출(Brain Drain)이다. 이들은 난민으로 외국에 가더라도 직장을 구하기 쉽고 해당 국가에서도 쉽게 내치지 않기 때문에 돌아올 가능성이 더 희박한 반면, 고국에서는 그만큼 더 긴요한 인력들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시에라리온에는 정신과 의사가 단 한 명뿐이다. 내전 때 전쟁터로 끌려가 적군의 팔다리를 자르는 등 잔혹 행위를 강요당했던 몇천 명의 소년병들이 심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정을 감안하면 끔찍한 현실이다. IOM의 카트린 그린우드는 이런 사정을 설명하며 “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 때문에 영국·네덜란드 등에서는 이른바 ‘아프리카 개발을 위한 이주’ 프로그램을 운영해, 아프리카 출신 전문직업인들에게 고국에 일정 기간 체류하면서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고 돌아오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아예 눌러살기를 원하게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아프리카 현지의 부족한 전문인력난을 조금이나마 메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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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프리타운 브룩필즈가의 ‘법률지원센터’에서 만난 젊은 변호사 멜런 니콜윌슨은 내전 때 외국으로 피신했다가 귀환했다. 1997년 시에라리온을 떠난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랑스, 스웨덴 등지에서 살다 내전이 끝난 2001년 3월에 돌아와 사무실을 열었다. 이 사무실은 이름이 말해주듯 공익변호사 단체다. 4명의 변호사가 해외의 후원자들한테서 기금을 모아 빈곤층 무료 법률 지원, 경찰 인권 교육, 국선변호, 여권 신장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내전 때 전투에 동원됐던 소년병들을 상대로 인권교육을 실시해 사회 재적응을 돕기도 했다. 니콜윌슨의 귀환 동기는 간단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동포들을 돕고 싶어 돌아왔다”는 것이다.

“한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

그라프톤과 부두부람 등 난민촌을 방문할 때마다 난민 젊은이들은 한국에서 온 기자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한국에 가면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느냐” “한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연방 말을 걸어왔다. 그들에겐 내전 후유증을 겪는 고국도, 남루한 이국의 난민촌도 더 이상 살고 싶은 장소가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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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재건을 기다리는 아프리카 땅에는 니콜윌슨과 같은 젊은이들도 있었고, 많은 국제기구와 단체가 이들을 돕고 있었다. 그런 젊은이들의 귀환이야말로 아프리카의 희망인 것 같았다.

‘다시 내전과 같은 위기상황이 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얄궂은 질문에 니콜윌슨은 피식 웃으며 “가장 가까운 안전한 곳으로 다시 피해야겠지요”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라면 얼마든지 또 돌아올 것이다. 돌아와 비참한 삶의 이웃들에게 나직이 인사를 건넬 것이다. “쿠셰, 하우 디 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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