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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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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없는 영국’은 잊어버려!

등록 2006-03-02 15:00 수정 2020-05-02 19:24

세계인들에게 ‘비호감’으로 찍힌 음식문화 바꾸려는 정부와 민간의 몸부림
새로운 미각 패키지 상품 내놓고 다문화 국가 이미지 부각시키려는 노력

▣ 런던=안수정 자유기고가

“동아시아 담당 기자로 내가 누린 가장 큰 행운은 지난 15년간 내 나라 음식 대신 중국과 한국, 일본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영국 신문 <가디언>의 동아시아 지역 전문 특파원 조너선 와츠에게 영국 음식에 대해 묻자 대뜸 이렇게 대답했다.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피부 색깔 때문에 차별받거나 남자 혹은 여자라는 이유로 불평등을 겪는다. 영국인들은 지구촌 어디를 가도 ‘음식’ 때문에 폄하된다. 세계의 그 누구도 호감을 가지지 않는 음식의 나라 영국. 역사적으로 영국인들이 기를 쓰고 세계 곳곳을 탐험하고 여행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내 나라 음식을 안 먹어서 행복했다?

이런 악평을 뒤로하고 최근 영국의 음식문화는 주목할 만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2005년 4월 은 요리사, 식당주, 요리전문 기자 등 전문가 그룹으로 이뤄진 심사위원단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레스토랑으로 영국 런던 교외의 오리구이 전문점 ‘팻 덕’을 선정했으며, 고든 램지, 톰 에이큰스, 세인트 존스 등 영국에서만 세 곳의 레스토랑이 순위 10위 안에 포함돼 있다고 보도했다.
의 <네이키드 셰프>는 요리와 요리사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미소년 제이미 올리버는 주방에서 굴러다니는 값싸고 흔한 재료로도 쉽고 다양한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요리의 즐거움’을 영국인들에게 일깨워주었다. 여기에 더해, 2005년 <채널4>의 <제이미 스쿨디너>(Jamie’s School Dinners)는 정크푸드인 학교 급식과의 전쟁을 선언한 프로그램으로 정부가 급식의 질을 높이기 위해 2억8천만파운드의 추가 예산을 편성하게 만들었다. 요리사가 단순히 음식 만드는 사람이 아닌, 국가의 먹을거리 정책과 교육 분야에도 혁명을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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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축구선수 고든 램지는 요리사로 전업한 뒤, 미디어의 각종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거칠고 무례한 태도로 큰 인기를 끌어 유명인사가 됐고 뛰어난 레스토랑 경영 수완으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겸비한 최고의 ‘셰프’(요리사)가 됐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요리 관련 서적이 수위를 차지하는 것이 언제부턴가 당연한 일이 됐고, 요리 프로그램은 각 TV 프로그램의 편성표를 바꿔놓았다. 셰프는 영국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가장 ‘쿨’한 직업으로 떠오르기에 이른다.
최근 영국 관광청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사업은 영국 각 지역 특산물과 관광을 엮는 창의적인 프로그램 개발이다. 요크셔의 활기찬 치즈 제조장에서 직접 만든 치즈를 맛보거나, 조용한 링컨셔의 시골 농장에서 전통 소시지와 지역 특산 맥주를 함께 경험할 수 있는 ‘미각 패키지 상품’(Taste Britain)이 그것이다. 영국 정부는 지역 전통음식을 다문화주의 먹을거리와 결합시켜 식음료에 관한 대대적인 행사도 벌이고 있다. 이에 따라 지역별로 다양한 음식 축제가 활성화됐고 지역의 전통 식음료 마켓이 되살아나고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속속 정책화되고 있다. “영국으로 미각 여행을 떠나보세요!”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자신감의 표현이다.

로스트 비프와 요크셔 푸딩을 아십니까

흔히 영국 음식이라고 하면 대구와 감자를 튀긴 ‘피시 앤드 칩스’를 떠올리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영국에도 전통음식이 몇 가지 더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로스트 비프와 요크셔 푸딩. 로스트 비프는 원래 중세시대 가톨릭 전통 때문에 고기를 잘 먹지 못하다가 온 가족이 교회를 다녀온 일요일 점심에 모처럼 푸짐하게 고기를 먹던 풍습에서 유래된 음식이라고 한다. 쇠고기를 양념 없이 통째로 오븐에 구워 조리하는데, 이 과정에서 흘러나온 고기 기름에 달걀, 밀가루를 섞어 요크셔 푸딩이라는 빵을 만든다. 이 두 가지에 역시 양념 없이 그대로 끓는 물에 푹 익힌 야채를 곁들인 요리가 바로 영국인들이 즐겨먹는 ‘선데이 런치’다. 대체로 심심하고 느끼한 이 맛의 특성은 전통 아침식사 메뉴에도 정확히 반영된다. 빵과 커피로 이뤄진 ‘컨티넨털 브렉퍼스트’와 정반대 개념인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는 맛보다는 양으로 승부하기에 항상 앞에 ‘푸짐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기름에 튀긴 베이컨과 계란, 데친 토마토와 버섯, 블랙푸딩(돼지고기와 지방, 선지를 섞은 소시지), 콩과 식빵을 오트밀이나 홍차, 주스와 함께 먹는다. 그 엄청난 양과 느끼함 때문에 아침으로 먹고 나면 점심을 걸러도 배가 고프지 않은 고칼로리의 실용적인 음식이다. 향신료 없이 재료를 그대로 굽거나 튀기는 단순하고 기름진 영국 요리는 맛없는 음식의 대명사가 되어 문화 선진국의 자존심을 무너뜨려왔다. 특히 가까운 음식 선진국 프랑스로부터는, ‘영국 요리를 먹는 건 혀에 대한 테러’ ‘영국 음식을 먹느니 차라리 정크푸드 햄버거를 먹겠다’ 등의 혹평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러한 혹평은 영국 특유의 기후와 농산물의 특성을 알고 나면 다소 관대해질 수도 있다. 한여름에도 잠깐씩 햇빛이 내리쬘 뿐이고 나머지 달에는 바람과 불안정한 온도 변화 때문에 제대로 농산물이 자라기 어렵다. 그런 연유로 감자와 당근 같은 근채류만 수확량이 풍부하고 과일이나 채소는 지금도 상당량을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수입한다. 이런 열악한 조건에서 창의적인 방법으로 다양한 요리를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요리처럼 맛이나 화려한 기교 없이 재료의 풍미만을 살린 요리만이 존재했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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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악조건의 기후와 유럽 국가 중 가장 긴 노동시간으로 인해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인스턴트 식품 수요가 높은 나라로 알려져왔다. 1999년 소비액은 1조3천억파운드로, 이는 프랑스와 독일의 2배, 이탈리아의 4배가 넘는 수치다. 이렇게 끼니를 간단히 ‘때우는’ 문화에 오랫동안 익숙해졌던 많은 영국인들이 집 밖에서 ‘맛있는’ 음식을 골라 사먹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전통적으로 주류만 제공하던 펍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반세기 영국 요식업에 혁명을 가져온 사건’이라고 불릴 정도로 영국인들의 식습관을 바꿔놓은 ‘개스트로펍’(gastropub)은 영국적인 친밀함과 전통적 펍의 소박함을 살린 새로운 형태의 음식점이다. 전국에 430개가 넘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 몇 년간 영국의 외식산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2006년 1월 정부가 발표한 통계(ONS)에 따르면 영국의 외식산업은 연간 6조파운드 규모이며 매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2001년에 비해 2005년은 2.3조파운드 증가했으며, 여타 경제 분야에 비해 10% 이상 큰 폭으로 성장하고 있다.

프랑스를 대신한 인도·중국·타이

영국은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주의 역사를 지닌 나라다. 오랜 식민역사에서 비롯된 영국의 다문화주의는 최근 영국에 불고 있는 외식 선호와 ‘요리’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도, 중국, 이탈리아, 타이, 그리스 등 다양한 외국 음식이 영국에 들어오기 전까지 외식은 평범한 서민이 아닌 귀족계급의 특권이었다. 다문화주의는 까다로운 테이블 매너와 원어로 된 값비싼 프랑스 요리 위주이던 외식문화에 ‘평등’의 바람을 몰고 온 셈이다. 21세기 ‘쿨 브리튼’ 이미지 구축에 새로운 코드가 된 음식문화는 이런 배경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셈이다. 영국 음식도 다문화적 특성을 가미하면 ‘맛’이 있을 수 있다는 공격적인 홍보는 미디어와 관광산업계의 지원을 받아 점차 호응을 얻고 있는 듯하다.
2005년 가을 영국 체신청은 ‘미각의 변화’(Changing Tastes in Britain)라는 주제로 우표 디자인을 공모했다. 영국인들에게 사랑받는 글로벌 음식과 전통음식들을 소개하는 이 행사에는 대대적인 홍보로 많은 작품이 응모했고, 최종 당선된 디자인은 우표로 발행됐다. 음식을 통해 다인종 다문화 국가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전략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오랫동안 좋지 않은 이미지로 낙인찍힌 자국 음식을 어떻게든 다문화주의 안에서 ‘영국적인’ 것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키려는 노력이 눈물겹다. 과연 이들이 짜고 있는 새로운 영국 식단이 맛없는 음식문화를 얼마나 향기롭게 만들지 몹시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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