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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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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투쟁을 대신할 것인가

등록 2005-01-19 00:00 수정 2020-05-03 04:24

팔레스타인 수반으로 당선된 아바스의 험난한 길…내부 개혁을 통해 아라파트 넘어서야

▣ 김동문/ 중동 전문가 yahiya@hanmail.net

지난 1월9일 임기 4년의 팔레스타인 수반으로 당선된 마무드 아바스(69)는 국제 사회의 뜨거운 러브콜을 받고 있다. “팔레스타인 선거에 고무됐다. 아바스 수반을 백악관으로 초청한다. 팔레스타인의 안보와 경제 회복을 위해 (약 2억달러를) 적극 지원할 것이다.”(조지 부시 미 대통령) “아바스 수반을 프랑스로 초청한다. 프랑스와 유럽연합은 팔레스타인을 지원할 것이다.”(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일본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인도적 지원 규모를 9천만달러로 대폭 올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지난해 지원 규모의 2배에 달하는 액수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도 그를 초청했다.

이스라엘의 샤론 총리도 그의 당선 축하 행렬에 합류했다. “축하한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가자지구 철수 관련 문제 등을 조정할 준비가 돼 있다.“ 한 걸음 나아가 이스라엘의 한 정부 관계자는 “양국 정상회담이 수일 내에 이뤄질 것”이라며 “회담이 이미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아바스의 반응도 호의적이다. 그는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 재개를 고대하고 있다. 우리는 정의에 바탕을 둔 평화를 맞이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스라엘의 보수 언론들도 중동 평화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아바스와 함께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제 불행 끝 행복의 시작인가.

침묵하는 60%의 속마음

사실 이번 선거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낸 점령지 내 피정복민들의 제한된 민주주의 실험이었다. 팔레스타인 수반 선거는 독립국가의 대통령을 뽑는 것도 아니었고, 제한된 자치권을 가진 주민 대표 기구의 수반을 뽑는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이번 선거를 놓고 이스라엘과 미국의 의도를 대신 수행해줄 대리인을 뽑는 것이었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이번 선거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전체 유권자 180여만명의 60%나 된다. 표심에 반영되지 않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속내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아바스가 유력한 대안이라거나 무장 투쟁에 이력이 나서 그를 지지한 것이 아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아라파트의 후광과 인티파타 운동의 투쟁적인 선거운동, 혹시나 하는 기대감 등이 어울려 아바스의 당선을 이끌어냈다.

아바스는 카리스마도 없고, 그렇다고 거느리는 친위 세력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아바스의 한계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우선은 아바스 체제가 성공적인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바스 당선자는 민생 개혁에 집중할 것이고, 실제 경제 현안 타개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에서 경제적 선물 보따리를 안겨주겠다고 성화이기 때문이다. 자금 유치와 민생 개혁을 우선시하는 아바스의 이해관계가 충족되고 있다. 만성적인 빈곤과 살인적 실업률 등은 한시적으로는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내부 개혁의 승리가 특별한 상징성도, 계파도 없는 아바스가 선택할 길이다. 그는 친정 체제의 구축을 통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개혁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자치정부 내 아라파트 측근의 부정부패 사슬은 얽히고설켜 있다. 아바스는 필연적으로 아라파트를 넘어서야 한다. 아라파트와 연루된 42억달러에 이르는 비자금도 처리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아라파트 시대와의 단절이 요청된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내 인적 청산 과제와 개혁 등은 그래도 힘들지 않게 처리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 파악되고 있는 아바스의 내각 구성에 얽힌 기본 밑그림은 아바스의 개혁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스라엘에 전리품 얻어내야

현재 쿠레이 총리 유임은 구시대 청산 과정에서 일어난 반발을 최소화하게 될 것이다. 아라파트 시대와 아바스 시대의 과도기적 포석이다. 표면적으로 총리는 국정을 이끄는 책임 총리이다. 그래도 아바스 코드가 반영될 것이다. 아바스 정부 1기 내각에는 적어도 6개 부처 장관이 경질될 것으로 보인다. 나빌 샤스 외무장관, 하캄 발라위 내무장관 등 명실상부한 아라파트 최측근들이 배제될 것이다. 이들의 경질은 아바스의 홀로서기와 아라파트와의 차별성 정책의 시작으로 간주할 수 있다. 공보장관이 확실시되는 나빌 아므르, 입각이 확실한 라키프 안나츠헤는 아바스 코드를 읽게 해준다. 아므르는 아바스 내각의 공보장관 출신으로, 지난해 여름 텔레비전에 출연해 아라파트의 실정을 맹렬히 공격한 이유로 암살될 위기를 맞기도 했다. 라키프 안나츠헤는 팔레스타인 자치 의회 의장 출신으로 아라파트 고위 측근들의 뇌물 스캔들에 맹공을 가해 자리에서 밀려난 적이 있다. 아바스는 현재 12개에 이르는 각종 보안 기구를 통폐합해 3개로 축소하려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총리가 국가안전보장회의 의장의 역할을 맡게 된다. 처음으로 보안부대에 대한 문민정부의 감독이 이뤄지게 되었다. 이런 개혁 과정에서 수구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예상되지만 민심을 얻고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을 옥죄는 더 큰 힘은 이스라엘과 미국이다. 가혹한 검문·검색과 높은 보안장벽, 빈번하게 반복되는 봉쇄 정책 등 이스라엘군의 점령 정책에 지칠대로 지친 민심은 내부 개혁만으로 쉽게 해소될 수 없다.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권과 예루살렘의 지위, 요르단강 서안 보안장벽 설치와 국경 획정 문제 등은 언제든지 협상을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아바스에 대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러브콜은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 기조가 변해서가 아니다. 미국은 유엔이나 국제 여론이 비판한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리장벽 건설이나 정착촌 건설 등에서 맹목적으로 이스라엘을 두둔해왔다. 샤론 총리는 정착촌 건설을 중단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정착촌에서 철수하는 것도 아닌 가자지구 철수안조차 대대적인 저항을 받고 있다. 이런 판에 예루살렘 문제나 다른 구체적인 현안들을 풀 수 있는 힘도 없다. 본격적인 가자지구 철수 작전에 들어갈 경우 리쿠드당 강경파와 극우세력, 정착민들의 반발과 폭력 저항의 위협도 잠복되어 있다.

구체적인 협상의 전제 조건은 처음부터 걸림돌이다. 무엇보다 미국이나 이스라엘 정부는 양보가 아니라 먼저 받고 그 성의에 보답하겠다는 자세다. 아바스 당선자의 힘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의 이스라엘 공격 차단을 전제로 내세우고 있다. 이스라엘 점령군의 폭력이 중단돼야 무장 저항을 멈추겠다는 팔레스타인 저항조직과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협하는 테러가 근절돼야만 평화가 시작된다는 이스라엘쪽의 입장은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를 논하는 논란마냥 뒤엉켜 있다. 협상을 위한 전제조건인 무장세력 제어를 힘으로 성사시키려다 보면 자칫 내전에 휘말릴 가능성도 있다. 마치 이라크의 임시정부가 겪고 있는 모습이 연상될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아바스 당선자는 팔레스타인 내 모든 무장세력을 합법적인 정치세력으로 전환하고 일정 지분을 양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7월 총선은 권력 분점의 실험장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도 아바스 당선자는 이스라엘쪽에서 전리품을 얻어내야 한다.

실패하면 내전 가능성도

팔레스타인은 모처럼 혁명가, 투사에 의해 이끌어지던 시대를 넘어 정치인에 의해 이끌어지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정치인인 아바스는 투쟁이 아닌 정치 협상을 통해 팔레스타인인들의 실질적인 권리도 회복하고 민심도 얻는다는 두 마리 토끼를 좇고자 한다. 관망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과제가 아바스에게 있다. 그가 정치적인 대화를 통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이익을 확보하지 않으면 팔레스타인인들은 더 이상의 출구를 찾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아바스의 당선은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 이외의 방식으로 이스라엘과 공존하기 위한 마지막 실험인 셈이다. 무장단체들은 당분간 아바스의 정책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스라엘과 협상을 통해 결과물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은 오래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인 대화를 통해 상실감만 늘어간다면 그들에게 대안은 없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안은 무엇인가. 승자 없는 전쟁의 악몽으로 더욱 가위눌리게 될 것이다. 아바스와 함께 가는 팔레스타인인의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은 ‘기대 반 우려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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