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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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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추안3] 두번의 위기, 두번의 총리

등록 2004-08-20 00:00 수정 2020-05-03 04:23

[아시아 정치지도자의 고백 | 추안 리크파이 타이 전 총리 3 ]

민주주의가 구석에 처박혔던 92년, 최악의 국가경제 상황이던 97년에 총대를 메다

▣ 추안 리크파이(Chuan Leekpai)/ 타이 전 총리

나는 1992년 민주화 투쟁으로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처음 총리가 되었다. 새로운 쿠데타 발생을 염려하는 시민사회는 “문민정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하는 의문에 빠져들었다. 그 모든 의문들이 총리가 된 내게 도전으로 다가왔다.

수익, 기회, 권력의 분산에 힘쓰다

나는 쿠데타 발생을 막아 시민들의 안전과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일을 국가 통치 목표로 삼았다. 군인들의 전문성을 존중하면서 그이들이 정치판을 기웃거리지 못하게 했고, 정치가들도 군부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군대를 결코 정치적 도구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시켰고, 한편으로는 시민정부에 충성을 다한 국방장관 위지트르 수크막 장군 같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군부를 이해시켰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총리직 3년을 마칠 즈음 타이 사회와 정치판은 정상을 되찾았고, 군부 내에도 서서히 올바른 민주주의 태도가 형성됐다.

나는 첫 번째 총리 임기 동안 ‘분산’이라는 내 정치철학을 바탕 삼아 정부를 운영했다. 타이 사회의 도시와 지방간 극심한 격차를 줄이고자 ‘수익’ ‘기회’ ‘권력’의 세 가지를 분산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격차는 전 정부들이 지녔던 ‘신흥공업국’ 진입이라는 꿈에서 비롯됐다. 그 결과 젊은이들이 다투어 방콕으로 달려가면서 시골은 공동화됐고, 반대로 방콕에는 빈민촌이 버섯처럼 늘어났다. 그리고 각종 사회 문제가 불거졌다. 그래서 나는 방콕과 지방간 균형 발전에 초점을 맞춘 개발 전략으로 방향을 틀었다. 시골 사람들이 시골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정책을 다듬었다. 그 일환으로 먼저 투자 정책부터 바꿨다. 지방 투자를 자극하는 각종 정책을 실행하는 한편, 지방정부가 스스로 자치행정을 펼 수 있도록 장려했다. 대학을 비롯한 각급 학교를 지방에 세우면서 특히 가난한 아이들이 교육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교육기금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체력 증진을 위해 임기 동안 나는 매일 초등학교에 우유를 무료로 배급했다.

그렇게 거의 3년 동안 총리직을 수행한 나는 농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소 포 코 4-01’(Sor-Por-Kor 4-01)이라는 문서와 상관없이 무상 경작을 허락하면서 정치적 불신임 논쟁에 휩쓸렸다. 그에 따라 나는 의회를 해산했다. ‘소 포 코 4-01’은 땅 없는 농민들이 오랫동안 ‘불법’으로 농사를 지어왔던 걸 정부가 정책으로 인정해주는 매우 중요한 조처였다. 그러나 푸켓섬의 토지개혁 사무처가 집권 민주당 정치가 가족에게 영농지를 주면서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했다. 사실은 그 민주당 정치가 가족은 수십년 동안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왔기 때문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경우였지만, 야당은 정부가 권력을 남용했다고 비난했다. 고백컨대, 그건 우연한 정치적 사건이었을 뿐이다. 그에 따라 농업장관과 차관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그 사건에 담긴 순결한 ‘정신’을 강조했다.

나는 왜 ‘느림보 추안’이 되었나

그럼에도 야당은 그 우연한 사건을 정치적 게임으로 몰고 갔다. 그런 가운데 연립정부에 참여했던 정당들 중 일부가 야당으로 옮겨가면서 사태는 최악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해서 정부가 소수로 전락했고, 결국 나는 의회를 해산하기로 결심했다.

그에 따라 1995년 총선을 치렀다. 나는 지역구인 고향 뜨랑에서 재신임을 받아 8선을 기록했으나, 민주당은 찻타이당에 이어 제2당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반한 실파아차 찻타이당 대표가 제21대 총리가 됐고, 나는 야당 대표가 됐다. 그러나 연립정부 내부의 충돌로 반한 총리는 1년 만에 물러났고, 다시 총선을 치렀다. 나는 뜨랑에서 아홉 번째 의원으로 선출됐고, 민주당은 다시 123석을 얻어 차왈릿 용차이윳이 이끄는 신열망당에 두석 뒤진 제2당이 됐다. 그 선거에서 나는 민주당이 제1당이 되지 못하면 절대로 정부를 구성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선거 결과 민주당은 다시 야당이 됐다. 그러자 민주당 내부에서는 우리가 정부를 구성할 충분한 여력이 있다며 불만들이 터져나왔다. 그럼에도 나는 직업 정치가로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강조했다. 나는 그런 정치적 약속이 어떤 ‘자리’나 ‘위치’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면서 불만을 달랬다.

그렇게 해서 총리가 된 차왈릿 장군은 탁신 시나왓(현 총리)을 부총리로 하여 정부를 구성했다. 그리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타이는 경제위기라는 국가적 혼란에 빠져들었다. 차왈릿 총리가 예고도 없이 타이 바트화를 평가절하함으로써 경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차왈릿 총리는 “타이 경제는 죽어가는 환자와 같다. 나는 환자가 죽어가는 걸 내 눈으로 보고 싶지 않다. 다른 의사에게 환자를 맡기겠다”며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조를 요청한 뒤,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바로 그 ‘의사’라는 직책이 내게로 돌아왔다.

사실 차왈릿 총리는 내게 ‘의사’ 직책을 맡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이는 찻파타나당의 찻차이 춘하완 장군에게 그 자리를 맡기고 싶어했다. 그러나 정부 내의 많은 이들이 찻파타나당을 거부하면서, 결국 1997년 11월9일 나는 두 번째 국가 위기 상태에서 총리직을 받아들였다.

내가 총리에 취임한 첫날부터 모든 이들은 경제 복구에 사력을 다했다. 차왈릿 총리가 넘겨준 ‘환자’는 국가 부도였고, 수출입 분야는 무너진 상태였다. 그 무렵 외환보유고는 8억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내가 총리직을 수행한 3년 동안 국가 경제는 서서히 살아났다. 시민들의 기대만큼 빠른 속도로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혼수 상태에서는 벗어났다. 내가 총리직을 그만두던 날 외환보유고는 320억달러로 늘어났다.

그렇게 해서 국가 경제가 위기에서 벗어난 뒤 나는 현 탁신 시나왓 총리에게 정부를 인계했다.

나는 정부가 기업도 아니고 실험 도구로도 사용될 수 없다고 믿었다. 따라서 나는 어떤 정책이든 실행 이전에 결과를 놓고 심사숙고를 거듭했다. 그러다 보니 ‘거품경제’가 절정이던 호시절로 재빨리 되돌아가고 싶어하던 중산층 이상 시민들에게는 만족을 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나를 “느림보 추안”이라 부르게 된 모양이다. 어쨌든 좋다. 나는 느림보든 아니든, 정부 정책은 신중해야 한다고 믿었다.

정직하게 말해, 나는 지난 35년의 정치 인생에서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을 놓고 후회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만큼 나는 정치가로서 정책 실행 이전에 결과를 놓고 신중하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선거에선 졌지만 정치적 명예를 지켰다

그렇게 나는 1997년 신헌법이 부여한 모든 의무를 다한 뒤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나는 독립적인 기관이 마련한 신헌법에 따라 의회를 해산하고 시민들이 새 정부를 선출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2001년 6월6일 선거에서 탁신 시나왓이 만든 새 정당인 타이락타이당이 전국적인 승리를 거뒀다. 우리 민주당은 완패했다. 그러나 나는 민주당이 선거에서는 패했지만 정치적 명예는 지켰다고 자부한다. 나는 총리가 지녔던 그 어떤 ‘유리한’ 조건들도 권력도 선거에서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민주당이 그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어떤 불법 행위도 용납하지 않았다. 선거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내 정치 역정에서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민사회가 나와 우리 정치가들을 믿느냐 마느냐를 가장 중요한 화두로 여겼다. 나는 승리의 전제조건을 ‘투명성’과 ‘합법성’으로 여겼고, 그에 반하는 어떤 정치적 승리도 결코 승리가 아니라고 믿었다. 나는 정치가로서 시민사회가 부여하는 ‘정통성’을 최대 명예로 여기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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