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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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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추안2] “추안에게 20바트를 걸어라”

등록 2004-08-12 00:00 수정 2020-05-03 04:23

[아시아 정치지도자의 고백 | 추안 리크파이 타이 전 총리 2 ]

‘개똥보다 못한 이름’이 거친 정치판으로 들어서던 시절… 헝그리 정신으로 민주당 의원이 되다

▣ 추안 리크파이(Chuan Leekpai)/ 타이 전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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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65년 무렵, 수많은 법학도들은 온갖 애를 쓰며 판사 임용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판사가 되기를 포기한 나는 변호사로서 동부 해변 촌부리주에 자리잡은 작은 법률회사에 취직했다. 나는 부모님께 판사보다는 변호사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은 정치가가 되고자 신헌법 공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헌법이 제정되면 총선이 실시될 것으로 믿었고, 나는 그 기회를 통해 입후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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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선거운동, 지프 타고 현장으로!

결국 1968년 신헌법 공표에 따라 나는 법률회사를 그만두고 고향 뜨랑으로 내려갔다. 비록 총선 날짜가 발표되지도 않았고 나는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혼자서 선거운동을 준비해나갔다. 그때 내 손에는 오직 3만바트(현재 환율 기준 약 90만원)가 들려 있었다. 나는 그 가운데 1만2500바트라는 ‘거금’을 뚝 잘라 나보다 나이 많은 고물 지프를 구입해 현장을 누볐다. 그 지프가 내 정치 입문 동기였고, 또 내게는 전부였다. 난 지금도 그 지프를 고향집 뜨랑에 보관하고 있다. 우리 집을 찾는 이들 가운데는 때때로 나나 우리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동차를 만나러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 자동차 번호판에 적힌 숫자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소문이 돌아 복권을 사겠다는 이들이다. 근데 웃기게도 그 번호를 보고 간 이들은 복권에 당첨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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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정치 입문자이던 나는 내 이름 ‘추안’을 알고 있는 이들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나는 지프와 함께 집집을 돌았고, 길거리 국수판을 찾아다녔다. 선거일이 공표되자 나는 그 동안 뜻을 품어왔던 민주당(Democrat Party)을 대뜸 찾아갔다. 그 무렵, 타이 정치판은 군사독재 소유물인 사하프라차타이당(Sahaprachathai Party)과 야당인 민주당 둘로 대표되던 시절이었다. 뜨랑에서 나와 민주당 후보 경쟁을 했던 이들은 전직 의원과 또 유명한 집안 출신 교사, 그렇게 둘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여론조사 결과 대중 인지도가 부족한 나를 쫓아버렸다. 그럼에도 신이 돌봤는지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얼마 뒤, 교사 출신 후보가 민주당의 재정 지원 부족을 탓하며 후보등록을 철회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어부지리로 후보가 되었다. 비록 민주당은 선거 홍보물자 인쇄용지 12면만 지원해주었지만, 의욕에 불타던 내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승리할 수 있다”는 말로 마음을 달래며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내게 무기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뿐이었고, 내게 실탄은 내가 배운 법과 헌법뿐이었다.

‘노라 떰’ 유랑극단을 등에 업다

나는 민주당에서조차 가능성이 전혀 없는 눈밖에 난 후보였고, 속된 말로 시민들 사이에 유행했던 선거 도박판에서도 기껏 20바트(600원)짜리로 불렸다. ‘개똥’만도 못한 후보라는 뜻이었다. 만약 내가 길거리 국수판의 표밖에 얻지 못한다면 결과는 백전백패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유랑극단을 쫓아다니며 막전이나 막간에 연설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주인들에게 매달렸다. 당시 오락거리가 없던 시골에서 유랑극단은 수천 군중을 몰고 다녔다. 그렇게 나는 타이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유랑극단을 선거운동에 이용하는 아이디어를 짜냈다. 몇몇 작은 극단들은 내 뜻을 받아들였지만, 그 시절 가장 유명했던 유령극단 레퍼토리 ‘노라 떰’(Norah Term)의 주인 ‘떰’은 다른 후보자가 불평할 것이라며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노라 떰에서 연설을 하는 것이 승부처라 여겼던 나는 뒷문으로 가서 떰의 두 아내에게 부탁했다.

“단 1분만이라도 좋으니, 군사독재의 부당성과 민주주의의 정의를 말할 수 있게 해달라.”

그 아내들은 내 간곡한 청을 받아들였고, 나는 수만명 관중 앞에서 연설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나는 노라 떰에 기대어 이름을 알렸고, 많은 관중들이 내 정치 연설을 듣고자 노라 떰의 표를 사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뜨랑에 선거 지원을 나왔던 세니 프라모테(Seni Pramote) 민주당 대표는 “이렇게 많은 청중들이 등장하는 선거유세는 난생처음 본다”며 감탄했다.

그리고 나는 투표권이 없다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초·중·고등학생들을 만나러 다녔다. 나는 그 아이들과 마음을 터놓고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함께 나눴고, ‘추안 아저씨’를 각인시켰다. ‘추안 아저씨’는 곧 유명해졌다. 나는 그 아이들의 영향력이 선거 승리에 원동력이 되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어느 동네 어귀를 지나다가 한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 일을 돕지 않고 방에서 노는 한 아이의 어머니가 “당장 나와서 일하지 않으면 ‘추안 아저씨’를 찍지 않는다”고 성화를 부리자, 그 아이는 놀란 듯이 달려나와 어머니를 도우면서 “엄마, 이제 추안 아저씨 찍을 거죠”라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그 아이들의 믿음’ ‘그 주민들의 희망’을 평생 안고 가는 올바른 정치가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특히 아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열기를 띠면서 돈이 없던 나는 그 지프마저 굴릴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친구에게 부탁해서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선거운동 현장을 뛰었다. 낮과 밤이 없었기에, 오토바이가 이동하는 때가 유일한 휴식시간이었다. 친구는 내가 오토바이 뒤에서 잠자다 떨어질 것을 염려해 자신의 몸과 내 몸을 한데 묶어 이동했다. 그렇게 해서 30년 전 뜨랑 전역에서는 두 사람 몸이 하나로 묶인 별난 오토바이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만큼 유명해졌다.

결국 나는 그 선거에서 2만8천표를 얻어 1만8천표를 얻은 사하프라차타이당 후보를 눌렀다. 그러나 승리자가 있으면 패배자도 있게 마련이다. 나의 승리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성화를 부렸고, 그날 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억울하게 불길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 불길의 사연을. 그때부터 뜨랑 사람들은 단 한번도 변함없이 나를 선택해주었다.

나는 그 선거에서 승리해 의회로 진출했고, 민주당과 뜨랑은 처음부터 내게 정치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어려움이 도사라고 있는 직업적인 정치 인생이 시작됐다. 그러나 첫 번째 의원 임기는 2년9개월 만에 끝났다. 정권을 잡은 타놈 키타카촌(F. M Thanom Kittakachorn) 원수가 타이 역사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자신의 정부를 쿠데타로 또 뒤집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무렵 군사 독재자들의 소유물인 사하프라차타이당(Sahaprachathai Party)이 거의 모든 의석을 차지해버린 상태에서 민주당은 야당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이는 정부 전복 사유를 “의회가 혼란스러워 국정을 이끌 수가 없다”고 밝혔으나, 사실은 부정부패로 제 몫 챙기기에만 온 신경이 쏠려 있던 정부와 의회를 조종할 수 없었던 탓이다. 뜻하지 않게 정치 실직자가 된 나는 변호사로 되돌아갔다.

파벌정치, 학생봉기, 쿠데타…

그리고 타이 정치판은 타놈, 프라파스(Prapas), 사릿 타나랏츠(Sarit Thanaratch)라는 세 원수가 날뛰는 파벌정치로 혼란을 겪다가 1973년 10월14일 학생봉기로 끝장났다. 그 결과 타놈은 해외로 도망쳤고, 그 시절 가장 존경받던 법학자 산야 탐마삭(Sanya Thammasak)이 총리가 되었다. 1년 뒤 산야 정부는 신헌법을 제정했고, 그에 따라 1975년 총선을 치렀다.

나는 민주당 뜨랑 지역 책임자로 두 번째 의회 진출을 준비했다. 그 선거에서 민주당은 제1당으로 새 연립정부를 떠맡았다. 나는 재선의원에 지나지 않았지만, 법무부 차관에 임명됐다. 그러나 법무차관직은 20일짜리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야당이 민주당의 새 정책을 거부해버렸기 때문이다. 단 20일 동안 일했던 그 법무차관직은 내 정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의회에서 노련한 정치가였던 쿠릿 프라모테(Kuek-rit Pramote)와 민주주의 원칙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나가면서 나는 뜨랑이라는 시골 정치가에서 벗어났던 셈이다.

이어 민주당이 정부에서 손을 뗀 뒤, 쿠릿은 수많은 군소정당들을 규합해 총리가 되었으나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그 정부도 전복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총선이 벌어졌다. 민주당은 다시 승리했고 정부를 결성했다. 나는 총리실 장관직과 법무차관직을 동시에 임명받았다. 그러나 쿠데타는 끝없이 벌어졌고, 그 쿠데타에 반대하던 시민·학생들을 대량 학살하는 1976년 10월9일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 학살은 타이 국헌을 유린한 가장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그 학살 뒤, 수많은 젊은이들이 언젠가는 공산주의가 군사독재를 물리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타이공산당(CPT)을 좇아 국경 밀림으로 빠져나갔다. 나도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나 나는 군사독재를 반대했을 뿐, 공산주의 이념으로 현실을 대답하기는 힘들다고 믿었다. 나는 도시에 머물렀지만 여전히 군사 독재자들이 전 민주당 정부에 참여했던 나를 정적으로 여겨 감시하는 통에 숨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매일 밤 잠자리를 옮겨다니는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군사 독재자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 선전해댔다. 그들은 나를 잡겠다고 뜨랑의 부모님 집까지 뒤졌다. 내가 정치에 입문한 뒤 처음으로 부모님께 시련을 안겨다준 시절이었다.

1979년 들어 상황이 수그러들면서 새로운 총선을 맞았다. 그러나 얄궂게도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크리엥삭 차마난드(Gen Kriengsak Chamanand) 장군이 새 총리가 되었다. 민주당은 야당이 되었고. 그리고 1년 뒤 크리엥삭 장군이 물러나고 다시 프렘 틴나수라논드(Gen Prem Tinnasulanond) 장군이 총리에 임명됐다. 민주당은 프렘 총리 초대로 정부에 합류했고, 나는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교육제도 개선’에 강한 자부심

그리고 1980년 나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동안 잘 돌봐드리지 못했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이다. 그 일로 나는 크게 낙담했고, 시간만 나면 뜨랑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보살피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정성을 다해 돌봐드리는 일이 그나마 자식으로서 후회를 줄일 수 있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1년 뒤, 내각 개편이 있었다. 프렘 총리는 내게 통상부 장관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 무렵 통상부는 투명성이 부족한 대표적인 부서였다. 나는 비록 통상부에 대한 전문성과 경험이 부족했지만, 내 ‘투명성’을 믿고 맡긴 통상부 장관직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정치에 입문하고 초기 20년 동안 나는 많은 장관직을 거쳤다. 특히 내가 1983~85년 3년간 봉직했던 교육부 장관직은 지금도 명예롭게 여기고 있다. 그 시절 실행했던 여러 가지 교육정책들은 지금도 타이 교육의 뼈대로 이어지고 있다. 내가 교육부 장관일 때, 도시에만 있던 유아원을 지방으로까지 확대하고 학생들에게 무료로 우유를 배급하게 한 정책들은 모두 내 어린 시절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방 아이들이 교육 혜택을 누릴 수 없었던 내 경험을 통해 나는 교육정책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교육제도를 개선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민주당이 하락하는 것과 반대로 내 정치 이력은 점차 높아졌다. 민주당은 선거가 있을 때마다 의석이 줄어드는 위기를 맞았다. 1991년 들어 민주당은 새 대표를 선출하기로 의결했다. 당시 대표였던 피차이 랏타쿨(Pichai Rattakul)이 물러난 가운데 나는 대표로 선출되어 2003년까지 12년 동안 민주당을 이끌었다.

그 민주당 대표직이 내게 기회를 주었던 셈이다.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정치가가 되고 다시 한 나라의 총리가 된다는, 비록 내가 정치가가 되고자 했지만 단 한번도 꿈꾸지 못한 그런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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