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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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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정, 환호성은 이르다

등록 2004-06-25 00:00 수정 2020-05-03 04:23

유럽연합 곳곳에 드러나는 암초…유럽의회 저조한 투표율·동유럽의 불만과 독일 사민당의 몰락

베를린= 강정수 전문위원 jskang@gmx.net

지난 5월1일 동유럽 10개국을 새로운 회원국으로 받으면서 유럽연합은 거대 공룡 국가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또 유럽연합이 한 국가로서 면모를 갖추기 위한 마지막 단계인 유럽연합 헌법 제정 작업도 강력한 반대 국가이던 스페인에서 사회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한결 수월해질 전망이다.

유로 2004에 의회 선거가 밀렸다

지난 6월12일부터 포르투갈에서 시작된 유럽축구대회 ‘유로(Euro) 2004’는 유럽연합의 화폐인 유로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유럽인들의 일체감을 한결 높이고 있다. 6월13일 저녁 영국(잉글랜드)에 1 대 0으로 뒤지던 프랑스가 경기 종료를 불과 2~3분 남기고 동점골과 역전골을 연속으로 뽑아내며 승리하자, “믿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축구다!”라는 열광과 탄성이 온 유럽 대륙을 뜨겁게 달구었다. 반면 같은 시각에 진행된 유럽의회 선거결과 발표 방송에 대한 반응은 냉랭하기 그지없었고, 저조한 투표율로 선거결과 방송 속의 숫자는 초라하기만 했다. 다음날, 영국과 프랑스의 신문과 방송도 전날 밤의 ‘믿을 수 없는 한판 승부’를 특종으로 다루면서, 유럽연합 의회선거는 언론의 푸대접을 감당해야만 했다. 22.3%의 지지율로 참패를 기록한 영국의 집권 노동당이나, 유럽연합 탈퇴를 주장하며 이번 선거의 최대 승자로 기염을 토한 영국독립당(UKIP·16.8%)도 국민적 관심에서 멀찌감치 밀려나기는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에서도 야당인 사회당(28.9%)이 여당을 따돌리고 승리했지만, 이러한 이유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여유 있게 미소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스페인에서는 (이라크에서 철수해) “우리는 유럽으로 돌아간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사회당(PSOE)이 43.4%의 높은 지지율을 얻으며, 정권교체 이후 국민적 지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지난 3월, 총선을 사흘 앞두고 스페인에서 일어난 열차 테러는 192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여론조사에서 크게 앞서던 집권 보수 국민당에게 패배를 안겨줬다. 국민당(41.3%)은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 ‘복수’를 노렸지만, 이라크에서 자국 군대를 철수하고 이를 선거의 최대 쟁점으로 끌어올리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 사파테로 총리의 사회당을 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부에서는 지난 6월10일부터 13일까지 사흘간 진행된 유럽의회 선거결과를 ‘좌파 정당’의 승리나 ‘이라크 전쟁 참전국’ 여당의 패배로 규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스, 스페인, 스웨덴 등 4개국을 제외하면 이라크전 참전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집권 여당이 패배했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는 집권 여당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선거의 가장 큰 승자는 ‘투표하지 않은 유권자’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저조한 투표율(평균 45.5%)은 유럽연합에게 커다란 과제를 안겨주었다. 무엇보다도 행정부에 해당하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아직까지 최고 의결기관인 각국 정부 대표자 회의, 각종 법률을 입안·심의하는 기구로 권한이 제한되어 있는 유럽의회 등 복잡하고 다층적인 유럽연합의 권력구조가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큰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자유로운 취업은 여전히 벽 높아

여기에 ‘높은 봉급’과 ‘정치인 2군의 휴식처’ 등 계속 이어지는 유럽의회에 대한 비판도 유권자들이 등을 돌리는 데 한몫하고 있다. 또 유럽의회 투표방식에도 비판의 목소리가 모인다. 유럽연합 전체 차원의 정당 투표가 아닌 각기 자국 내 정당들에 지지 의사를 표시하고 이 정당들이 유럽의회에 의원을 파견하는 지금의 투표방식은, 선거 쟁점을 결국 자국 내 문제로 제한함으로써 ‘중간평가’의 성격을 띠게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동유럽 10개국에서 나타난 평균 40% 미만의 저조한 투표율이다. 이 국가들이 유럽연합에 공식 가입한 지 두달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선거가 치러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히 충격적인 무관심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동유럽 국가들의 국민정서를 이번 선거를 통해 일거에 파악하기란 쉽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유럽연합의 현재 모습에 대한 분명한 거부 의사가 표시됐다는 점이다. 이 국가들에 뿌리 깊게 자리잡은 옛 소련과 러시아에 대한 군사적 안보 문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으로 사실상 해결됐다.

그렇다면 이른바 서방 세계로 통하는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일이 이 나라들의 국민들에게 어떤 생활상의 변화를 주는 것일까? 자유로운 이동은 보장됐지만, 자유로운 취업은 아직까지 요원하다. 값싼 노동력의 유입을 우려한 기존 회원국들이 신생 가입국 국민들의 자국 노동시장 유입을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낙후한 의료·학교 시설에 대한 유럽연합 차원의 지원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로 밀려나 있고, 선망의 대상인 서방의 연금·실업지원 제도는 자국의 경제력에 맡겨져 있다. 회원국 가입으로 활짝 열린 시장만이 장밋빛 미래에 대한 보증수표로 국민들에게 던져져 있을 뿐이다. 이 신생 회원국들에서 공통적으로 유럽연합 가입을 반대하는 민족주의 계열 정당과 공산주의 계열 정당이 선전했다는 사실에서도, 이 회원권 유권자들의 거부 의사를 읽을 수 있다.

한편 독일의 집권 여당 사민당은 이번 선거에서 21.5%의 지지율을 기록함으로써 2002년 단 3석 차이로 재집권에 성공한 슈뢰더 총리의 사민당은 사실상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전국적인 투표에서 이번 사민당이 얻은 지지율은 2차대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로, 2002년 총선과 비교해도 무려 280만명의 유권자가 사민당에 등을 돌린 것이다. 야당은 재선거를 요구하고 나섰으며, 집권 사민당 내부에도 위기의식을 넘어 “대안 없음”이라는 한탄이 넘쳐나고 있다. 집권 초기 약 77만5천명에 이르던 당원 수도 크게 줄어 현재 약 64만명 수준이다. 급격한 원심력에 휘말린 사민당에 대해 어떠한 통제력도 발휘할 수 없던 슈뢰더 총리는 이미 지난 3월 당 대표직을 내놓아야 했다. 유럽의회 선거 다음날, 급기야 새로운 노동자 정당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당 내부에서 현실화되면서 이들에 대한 당원 제명 조치가 이루어졌다.

통일 이후 적립됐던 국민연금기금은 옛 동독 시민들에게 분배되면서 바닥을 드러냈고, 급격히 늘어난 고비용으로 국민의료보험은 파산 선고를 예고하고 있다. 지난 3년간 계속된 경기침체는 이러한 사회보장제도의 재정 상태에 독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높은 실업률과 함께 실업 지원비 지출은 늘어나고, 실업자들이 납부할 수 없는 연금·의료보험료를 국가 재정이 떠맡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통일 비용 때문에 늘어난 천문학적 수치의 국가 부채는 국가 재정기능을 마비시킨 지 오래며, 1998년부터 진행된 긴축재정의 배경이 되고 있다. 기업인들은 조세율 인하, 연금 및 실업보험의 사용자 분담비율 축소, 해고 조건 완화 등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면서 정부를 흔들어댔고, 회사의 본사를 해외로 이전하겠다는 압박 수단까지 내놓으면서 슈뢰더 총리의 사민·녹색 연정을 궁지로 몰아갔다.

독일 사회보장제도의 재정 악화

이러한 배경에서 태어난 ‘어젠다(Agenda) 2010’은 노동자와 서민의 부담을 증가시키고 기업의 부담을 줄이는 것을 뼈대로 하면서 ‘형평성 잃은 고통분담’으로 평가돼 유권자들의 냉대를 받고 있다. 독일 노조와의 공동 전선으로 집권에 성공한 사민당이 독일 노조쪽의 주장을 ‘국가 경쟁력 약화’를 근거로 거부한 점과 슈뢰더 총리의 ‘당을 무시한’ 행정부 중심의 정치 스타일이 야기한 당원들의 소속감 저하 등도 전통적인 사민당 지지세력이 빠르게 이탈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물론 야당 기민·기사련의 정책적 대안은 한층 더 강한 노동자와 서민의 분담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야당에 대한 지지율 급상승이 사민당에 대한 거부감 이상의 것으로 평가받지는 못하고 있다. 선거 다음날 열린 독일기업연맹(BDI) 총회에서 슈뢰더 총리는 기업가들이 그에게 보내는 격려의 박수로 연설을 수차례 중단해야 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행사장 밖에서는 소수의 노동자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저항과 거부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들과 유사하게, 하나의 유럽을 추구하는 유럽연합이 당면한 사회·경제적 도전에 이념적 좌·우를 막론하고 어떤 유럽 정부도 명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유럽연합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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