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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아웃’ 없는 경기의 재미를!

경기 초·중반 가릴 것 없이 무사 1루, 1사에서도 번트를 대는 한국 야구… 번트를 종교처럼 믿던 롯데 이종운 감독은 결국 경질돼
등록 2015-10-15 18:43 수정 2020-05-02 04:28
신소윤

신소윤

야구만화의 전설, 아다치 미쓰루의 'H2'에는 “타임아웃이 없는 경기의 재미를 보여드리죠”라는 대사가 나온다. 야구라는 스포츠의 핵심을 조준하는 명대사다. 그러니까, 야구는 기회의 스포츠다. 다른 구기종목처럼 정해진 시간 안에 득점을 많이 하는 팀이 이기는 경기가 아니라, 정해진 기회(9회까지 총 27개의 아웃카운트) 안에 득점을 많이 하는 팀이 이기는 경기다. 27개의 기회가 소진될 때까지, 5시간을 넘게 치고 달리기도 하고, 밤 12시를 넘은 시간에 도루를 하기도 하는 스포츠가 야구다. 26번 실패해도, 마지막 남은 27번째 아웃카운트를 끝까지 붙들어매고 드라마 같은 승부를 연출할 수 있는 것이 야구의 매력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침대축구’로 유명한 중동 국가들이 야구를 할 수 없는 이유는 (날씨와 인프라의 탓도 있겠지만) 야구는 ‘드러누워서’ 시간을 끄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스포츠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기기 위해서는 4시간이든 5시간이든,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주어진 27번의 기회를 무산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야구에서 ‘번트’가 논란이 되는 것은 이 지점이다. 번트는 1개의 기회(아웃카운트)를 포기하면서 주자를 득점권으로 진루시키는 작전이다. 메이저리그처럼 대부분의 선수에게 홈런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아시아 야구에서, 병살타를 예방하고 차곡차곡 점수를 쌓아갈 수 있는 번트는 모든 감독들이 포기하지 못하는 유혹이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1회든, 9회든, 무사에(심지어 1사에도) 주자가 출루한 경우 다음 타자가 번트를 대는 것은 (‘작전’이랄 것도 없는) 일종의 공식이 되었다. 팀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10개 구단 모두 번트를 댄다.

지난 9월11일 삼성 라이온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 치열한 5강 싸움을 펼치던 롯데는 2점차로 뒤지고 있던 5회와 6회, 두 번의 무사 1루 상태에서 번트를 선택했다. 그리고 두 번 모두 점수를 얻지 못했고 결국 그 경기에서 패했다.

2점차로 뒤지고 있는 팀이 ‘우선 1점이라도 따라가기 위해’ 무사 1루에서 번트를 선택하며 경기 중반에 1개의 소중한 기회를 소진시키는 것이 정상적인 작전일까. 게다가 롯데는 한 시즌 내내 불안한 불펜 때문에 경기 종반이 불안했던 팀이라 1점을 더 내는 것으로는 승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팀이었다. 더구나 두 번의 번트 중 한 번은 당시 팀내에서 가장 뜨거운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던 3번 타자 정훈에게 지시한 작전이었다. 2점차로 지고 있는 시합에서 ‘1점이라도 쫓아가기 위해’ 팀의 중심 타자에게 번트를 지시하는 감독의 철학은, 한 번의 기회에서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는 야구라는 종목 본연의 가능성을 스스로 지워버렸다.

근래의 한국 야구는 대표적인 ‘타고투저’의 리그가 되었다. 1점을 추가하는 것으로는 어떤 팀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리그다. 선수들의 근력과 파워가 증가하며 홈런이 가능한 타자도 대폭 늘었다. 그러나 2015년에도 한국 프로야구엔 번트가 난무했다.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의 문제다. 앞선 사례처럼 2점차로 지고 있는 무사 1루 상황에서도 번트를 대는가 하면 1사에서도 번트를 댄다. 사실 번트는 감독이 책임을 면피하거나 상황에 대한 불안증을 지울 수 있는 가장 편리한 작전이기도 하다. 물론 메이저리그에서도 번트를 댄다. 그러나 대부분은 경기 종반, 확실한 1점이 필요할 때이다. 한국의 번트는 1회부터 1점부터 얻고자 한다.

롯데 자이언츠의 이우민은 올 시즌 내내 들어섰던 174번의 타석에서 17번의 희생번트를 댔다. 본인 타석의 10%를 ‘희생’하는 것에 썼다는 말이다. 5강 탈락이 확정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도, 롯데의 김대륙은 희생번트를 댔다. 이 정도면 번트는 철학이 아니라 거의 종교에 가깝다. 승패에 대한 부담이 없는 마지막 경기에서 신인 선수의 소중한 타석에 지시한 희생번트. 무엇을 희생하여 무엇을 얻고자 한 것일까. 그것이 신인 선수의 성장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단 하나의 아웃카운트로 어떤 상황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야구다. 선수의 한계를 미리 규정한 채 고질적인 번트 작전으로 선수의 능력에 대한 불신과 감독 스스로의 불안증만 노출시키며 ‘고교야구’라는 비아냥을 들어온 롯데의 이종운 감독(사진)은 결국 경질되었다. 내년 시즌엔 정말 타임아웃이 없는 경기의 재미를 느끼고 싶다.

김준 스포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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