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에이펙에 6번 참석한 아시아의 ‘고참뻘’ 정치인 추안 릭파이 전 타이 총리
반테러리즘은 중심과제가 될 수 없고 ‘돈잔치’는 경제협력이 될 수 없다</font>
▣ 방콕=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news.hani.co.kr
두 번씩이나 총리를 지냈고 지금도 여전히 ‘폭발력’을 지닌 야당 정치가로 현장을 뛰고 있는 그이에게서 변화를 찾기란 쉽지 않다. 1990년인가 먼발치에서 그를 처음 본 뒤부터 열 번도 넘게 그이와 인터뷰를 했지만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다. 총리 때나 야당 당수 때나, 또 현장에서나 사무실에서나 똑같은 정중함과 친절함이 그이를 상징하고 있다.
초기 회원국 사이의 간극이 문제였다
11월8일 오후 1시30분, 민주당(Democrat Party) 당사 한쪽에 자리잡은 2평 남짓한 서재로 들어서는 추안 릭파이 전 총리는 오늘도 수줍은 소녀 같은 웃음을 머금고 “올드 프랜드”를 외치며 인사를 건넸다. 민주당 마크가 찍힌 흰색 점퍼를 걸친, 그 지겨운 차림새는 40년 정치 역정을 줄곧 따라다닌 ‘깨끗한 손’이라는 별명과 함께 그의 변함없는 성격을 말했다. 시민들은 스캔들도 없고 날뛰지도 않는 심심한 정치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일까? 아무튼, 그이는 타이 시민들 사이에 별로 인기가 없는 건 사실이다. 시민들은 그에게 고리타분하고 융통성이 없다며 “원칙주의자”라 부르기도 하고, 너무 따지다 보니 정책 결정과 집행이 더디다며 “느림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타이의 현대정치사를 놓고 보면, 그는 그의 말마따나 두 번 모두 국가는 위기상황에서 그를 필요로 했지만 사회적 인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상황에서 총리가 된 조금 ‘비극적인 결함’을 지닌 정치가임이 틀림없다. 1993년 처음 총리가 되었을 때는 나라 전체가 군사독재 반대투쟁으로 정치적 진통을 겪던 시절이었고, 1997년 두 번째 총리가 되었을 때는 경제위기로 엉망진창이 된 정부를 약간 억울하게 떠맡은 꼴이었으니.
어쨌든, 산전수전 다 겪은 아시아에서 최고참 정치가인 그이와 마주 앉으면 늘 해묵은 역사책을 핥듯 뭔가를 캐내고 싶은 욕망이 앞선다. 신중하기로 소문난 그이가 말을 마구 터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font color="6b8e23">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 총리로는 몇 번 참석했는가.</font>
1993~94년, 1997~2000년 그렇게 해서 모두 6번인가?
<font color="6b8e23">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건.</font>
아무래도 APEC 정상회담이 개념적으로 정리하면서 구체적인 경제협력 방안을 짜나가던 초기인 1993년 미국 시애틀과, 이른바 ‘양꿍병’이라 부르며 아시아 경제위기의 발원지로 타이를 꼽았던 1997년 캐나다 밴쿠버지.
<font color="6b8e23"> 초기 APEC 정상회담 참석자로 어려움도 있었을 텐데.</font>
회원국들 사이의 간극이 문제였다. APEC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최부국과 극빈국, 최강국과 약소국이 혼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차별성을 하나로 묶어 개념을 세우고 구체적인 실행안을 만들어내는 게 만만찮은 작업이었다. 시애틀 회담이 바로 그런 틀을 잡았다면, 94년 인도네시아 보골에서 ‘보골 선언’으로 완전한 모습을 갖춘 셈이지.
<font color="6b8e23"> 1997년 양꿍병 치료에 APEC 정상회담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는가.</font>
물론이다. 모든 회원국들이 타이에 집중하며 함께 고민했고, 특히 우리보다 앞서 경제위기를 경험했던 멕시코가 좋은 선생 노릇을 해주었다.
<font color="6b8e23"> APEC 정상회담을 여러 차례 드나들며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건 없었는가.</font>
1999년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우리가 2003년 APEC 정상회담 방콕 개최를 결정하고 준비했는데, 2001년 총선에서 우리 민주당이 패하는 통에 결국 모든 기회를 현 탁신 총리에게 넘겨주고 말았으니. (한바탕 웃은 뒤) 난 늘 그랬어. 1994년에는 고촉통 싱가포르 총리와 함께 주도적으로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를 준비했는데, 그 다음해 내가 선거에서 지는 바람에 모든 공이 반한 총리에게로 넘어가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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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국 차별보다는 문화적 차이
<font color="6b8e23"> APEC 정상회담과 동남아국가연합(ASEAN) 정상회담은 분위기로 볼 때 어떤 차이가 있는가.</font>
ASEAN 정상회담은 아시아 국가들끼리 형제를 만나는 것처럼 편안한 분위기라면, APEC은 서로 다른 대륙에서 온 회원국이 모이다 보니 아무래도 조금 어색하지.
<font color="6b8e23"> 개인적으로 APEC 정상회담이 더 긴장감을 준다는 뜻인가.</font>
그런 건 아니고. 난 참석자들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경험이 많은 ‘고참뻘’이니 별 다른 긴장감이 없었어.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와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정도가 나와 비슷한 단골손님이었을 뿐, 때마다 신참들이 왔으니….
<font color="6b8e23"> APEC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이 만만찮은 만큼 참석자들도 여러 모습들일 텐데.</font>
가장 중요한 건 준비지. 미리 상대방을 알고 들어가야 대화가 되니까, 서로를 철저히 공부해서 만나는 자리로 보면 돼. 근데 거기도 여러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각양각색이야. 수하르토처럼 성명서만 읽고는 시종 침묵하는 이들도 있었고, 또 외교적 관례를 무시하는 이들도 있었고. 상대방을 전혀 공부하지 않고 참석하는 이들도 있었고….
<font color="6b8e23"> 정직하게 말해보자. APEC 정상회담에서도 일반인들의 관계처럼 강대국과 약소국, 부국과 빈국 정상 사이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예컨대, 미국 대통령이 타이 총리를 대하는 투라든지.</font>
(몸을 비틀 만큼 크게 웃으며) 아냐, 아냐, APEC 정상회담에서 그런 건 없어. 정상들 사이에 개인적 경륜에 따른 차이는 있겠지만.
<font color="6b8e23"> 왜 그런 유의 정상회담 사진을 보면, 늘 미국이나 유럽 정치가는 빳빳하게 서 있고 아시아 정치가는 약간 조아린 모습으로 악수를 나누던데.</font>
사실이긴 하지만 그건 문화적 차이야. 어른을 존경하고 누구에게나 자세를 낮춰 상대방에게 예를 표하는 아시아식 같은. 그렇더라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내 정치적 경륜을 존경해서 아주 정중한 태도를 보였듯이, 서양 정상들 사이에도 개인적인 차이가 좀 있겠지.
<font color="6b8e23"> 정상들 사이에는 차별적인 격이 전혀 없다는 뜻인가.</font>
그건 좀 이해가 필요한 부분인데, 총리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뽑힌 뒤 정부를 대표할 뿐, 타이의 경우처럼 국가를 대표하는 이로 국왕이 따로 있단 말이야. 근데 대통령은 나라 전체에서 뽑힌 사람으로 정부와 국가를 모두 대표하는 경우지. 이건 누가 높고 낮고가 아니라, 기본 정치제도 속에서 서로 다른 격을 지니게 된다는 뜻이지. 그래서 나는 브루나이의 술탄 겸 총리인 하사날 볼키아나, 클린턴이나, 한국 대통령은 좀 달리 의전해야 옳다고 보는 거야.
<font color="6b8e23"> 좀 다른 이야기지만, APEC이 미국식 지배도구로 전락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데, 그런 배경에는 각국 정상들이 동등한 위치를 지키지 못한 게 또 다른 원인일 수도 있지 않겠나.</font>
9·11 이후를 보면 그런 비난을 받을 수도 있어. 미국이 국제사회에 강력하게 자신들의 반테러리즘을 이해시키는 과정에서 APEC 회원국들에도 강박감을 준 게 사실일 테니.
<font color="6b8e23"> 아시아와 태평양 국가들 사이에 경제협력이라는 개념을 안고 태어난 APEC이 그렇게 정치적으로 변질돼도 괜찮다고 보는가.</font>
나는 기본적으로 반테러리즘은 국제적 협력이 필요한 사안이라 믿고 있지만, 그렇다고 APEC이 안보 문제나 테러리즘을 중심과제로 다루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아. APEC은 경제협력을 목표로 삼았을 뿐, 지구적 규모의 안보를 다루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지. 물론 테러리즘이 국제 경제에 끼치는 영향 등을 놓고 부분적인 대화를 할 수는 있다고 보지만.
정상이 기억 못하는 정상회담이라니…
<font color="6b8e23"> 아시아의 선배 정치인으로서 탁신 타이 총리를 포함해 APEC 정상들에게 하고 싶은 충고는.</font>
다들 알아서 잘하실 거니 충고랄 건 없고. 다만 지난 2001년 방콕 APEC 정상회담같이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 어리석은 잔치판을 벌이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야. APEC 정상회담이 점점 그런 화려한 잔치판으로 변질되고 있는데, 특히 개발도상국들이 더 난리를 치고 있으니…. 그렇게 돈들을 낭비하는 게 경제협력의 요체가 아니잖아?
<font color="6b8e23">APEC 정상회담에 참석하면서 보고 느꼈던 사례를 들어보면 좋겠는데.</font>
1993년 시애틀 정상회담에 갔을 때, 한 지역 신문이 민항기를 이용하고 저렴한 호텔에 묵었던 우리 소수 타이 대표단을 특별하게 다루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렇게 각국 실정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지 않겠어? 누구처럼 전세기를 띄운다든지,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해 초호화판 호텔에 묵는 일들이 경제협력과 무관하단 말이야. 주최 쪽도 문제야. 지나치게 과시할 이유가 없어. 지나고 나면 그런 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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