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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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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감축과 한반도] 자주국방 ‘무기 쇼핑’으로 해결되나

등록 2004-06-24 00:00 수정 2020-05-03 04:23

화력전 보강 중심의 자주국방 계획… 연구개발 인력 · 예산 늘려 한국적 지형에 맞는 비전 제시해야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자주국방의 실현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다.

미국은 2005년 말까지 1만2500명의 미군을 감축하겠다고 한국 정부에 통보했다. 실제로 이렇게 빨리 미군이 줄어들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가 이를 기정사실화하고 스스로 전력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방안에 착수한 만큼 입 안에서만 맴돌던 자주국방은 이제 손에 잡히는 현안이 됐다. 국방부는 6월11일 정보수집용 군위성 통신장비와 미사일 방어능력 확보를 위한 차기유도무기(SAM-X) 도입 등을 골자로 한 ‘2005년 국방예산 요구안’을 내놓았다. 전체 국방비는 올해보다 13.4% 늘어난 21조4752억원이다. 이 가운데 순수 전력투자비는 16.5% 늘어난 7조3003억원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비율은 올 2.8%에서 0.1% 늘어 2.9%가 됐다. 물론 현재 협상 중인 용산기지 이전이나 주한미군 감축 협상이 타결되면 비용은 껑충 뛰어 3%를 넘길 가능성이 높다.

과연 문제는 돈인가

이는 지난 6월8일 정부의 핵심 고위당국자가 “노 대통령의 임기 내 GDP 대비 3.2%로 늘리고 당장 3%로 증액하겠다”고 밝힌 대목과 일치한다. 늘어난 국방비는 정보와 화력전을 보완하는 데 맞춰진다. 주한미군 감축에 따른 전력 공백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야가 화력전 수행 임무다. 한국 군 당국은 비무장지대 인근에서 수도권을 사정권에 두고 있는 수백문의 직경 170mm 자주포와 240mm 방사포를 가장 위협적인 요인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한 견제는 주로 미 제2사단 내 포병여단이 맡아왔다. 특히 미군의 한 포병대대는 가공할 만한 다연장로켓포(MLRS)를 보유하고 있다. 한국군도 유사 무기를 갖고 있기는 하나, 북한의 장사정포의 조기 발견과 타격을 지휘하는 정보감시 및 지휘통제 시스템은 주로 미군에 의존하고 있다. 정부가 정보와 화력전 보강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는 배경이다. 국방의 최전선에 있는 군 관계자들은 대부분 ‘자주국방’ 하면 ‘돈’을 떠올린다. 이는 “지금 돈이 없어 자주국방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수십년간 군 관계자들의 머리에 박힌 고전적인 논리이기도 하다. 얼마 전 다수의 전·현직 군 고위관계자들이 모여 군사 혁신을 논의하는 자리가 있었다. 오늘날 한국군 고위 간부들의 자주국방 비전을 엿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자리였다. 이들의 견해는 일사불란했다. 자주국방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천문학적 돈이 필요하며, 이를 확보하기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달라는 주문이었다. 거의 한해도 빠짐없이 나오는 비슷비슷한 목소리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국민들이 자주국방을 위해 기꺼이 많은 돈을 국방비로 내놓을 생각이 없으면 주한미군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게 순리다.

국방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군 전력을 획기적으로 혁신해 북한과 주변국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많은 예산이 소요된다”며 “문제는 돈”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국방부는 2020년께 첨단 정보·기술군을 창출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한국이 지닌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기술(IT) 분야 기술을 무기체계 개발에 접목함으로써 군 전력을 획기적으로 혁신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는 이어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한 분야로 감시·정찰(위성, 무인항공기, 장거리 레이더, 조기경보통제기), 지휘통제(전략 및 전술 C4I), 정밀타격(장사정 PGM, 탄도탄과 순항미사일), 정보전(정보보호와 사이버전 체계 구축) 등을 제시했다. 국방연구원(KIDA)은 이런 주요 무기체계를 획득하기 위해 2010년까지는 약 64조원, 향후 20년 동안 약 209조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현재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2.8%의 국방비로는 모자라며, 적어도 3.5% 수준의 국방비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게 국방부쪽의 주장이다. 또 국방비는 국가 생존과 이익 수호를 위한 안보보험료이고, 최소한의 투자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렇게 투자하면 북한을 제압하고 주변 군사 강국들의 군사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전문가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중국과 일본의 군사력 수준은 이미 너무 앞서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대만 통일과 동북아 패권 유지를 위해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전략무기들을 보유하고 있고, 유인 우주시대에 돌입했다. 중국은 10년 안에 탄도탄 1천기와 순항미사일 1천기를 실전에 배치한다. 7천t급 미사일 구축함 2척, 전략핵 잠수함 1척, SU-30 전투기 57대는 이미 현장에 배치돼 있다. 내년에는 공중조기경보통제기 5대를 손에 넣는다. 일본은 한국이 10~20년 뒤에나 가질 수 있는 정찰위성, 조기경보기, 이지스함 등 아시아에서 으뜸가는 첨단 해·공군과 정보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일반 유지비는 민간위탁 등으로 절감해야

군 관계자들도 중국과 일본을 따라잡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 즉, 지금처럼 군사력을 증강해서는 독자응징 능력 확보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체 연구개발 능력을 크게 늘려 독창적인 첨단 무기체계를 개발하고 보유함으로써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제시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연구개발 예산을 크게 늘리고 전문인력을 우대하는 인력관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늦은 감은 있지만 비대한 군 인력을 재조정하고, 소수 정예 중심의 첨단 군대를 지향하자는 군 혁신안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방향과 비전은 바람직하나 실제 이행 여부를 놓고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군 간부들이 더 많아 보인다.

지금까지 수차례에 걸쳐 국방 개혁을 시도했으나, 매번 수립된 계획마저 내부 반발로 추진되지 못했던 탓이다. 더 넓게는 과학기술과 국방운영 전반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고자 ‘군사혁신(RMA) 기획단’을 발족했으나, 각 군의 조직 이기주의로 한 발짝 앞을 나가지 못하고 있다. 또 지나치게 장기적인 개혁 과제에 매달려 일찍이 개혁 피로감에 빠져 지속성을 갖지 못했다는 게 군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그렇다고 너무 성급하게 군 개혁을 몰아붙이는 것에도 경계감을 표시한다. 지금과 같은 과도기에는 군부의 동요가 국가 안보에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다. 따라서 군 고위 간부들은 진정한 자주국방 달성의 핵심은 국방 정책의 일관성에 달렸다고 입을 모은다. 자주국방력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국방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무기체계 전력화에 보통 10~15년이 걸리며, 전문인력 양성에도 10~20년이 걸린다.

돈 타령만 할 게 아니라 군 내부 혁신에 더 치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추세다. 국방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한국군은 주어진 예산 범위 내에서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국방 개혁이라는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해야 한다”며 “국방부는 특히 지원활동을 더 효율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오늘날의 도전에 대응하고, 미래 현대화에 요구되는 추가 자원을 미리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의 지원활동은 주로 경상운영비를 일컫는 것으로, 최근 제출된 2005년도 국방예산 가운데 경상유지비도 전체의 66.8% 수준인 14조1749억원에 이른다. 2003년에도 국방예산의 67.1%인 11조6936억원이 경상운영비로 지출됐다. 따라서 급변하는 안보 환경에 맞춰 군 병력을 줄이고, 국방 기능을 과감하게 민간에 넘겨 불필요한 국방 비용을 절약함으로써 첨단 장비의 획득을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 첨단 무기 구입 중심의 자주국방 비전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높다. 과거 무기체계 획득시 해외 도입에 과도하게 의존함으로써 방산 기술 개발이 미흡하고, 이로 인해 국내 방위산업도 가동률 저하 등 운영 실태가 열악한 실정이다. 따라서 앞으로 무기체계 획득시에는 가능한 한 국내 연구개발로 추진함으로써 기술을 축적하고 유지비 절감, 성능개발 활성화 등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이때 백화점 나열식으로 전력화해서는 안 되며, 유사시 독자적으로 응징이 가능한 목표 지향적인 첨단 무기체계를 선별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개발해 전력화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국방부 내 자체 지적이다.

‘미제 무기 구입’ 은근한 압력

미국은 앞으로 3~4년에 걸쳐 약 110억달러를 투자해 주한미군의 전력을 증강할 계획을 발표하면서, 한국도 이에 상응한 투자를 해야 한다고 은근히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는 곧 110억달러어치의 미제 무기를 한국이 구입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미군 감축에 따른 안보 공백을 미제 무기 구입으로 메우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새로운 안보전략에 대한 중장기적 구상 없이 돈과 무기로 자주국방을 하겠다는 발상은 미국에 대한 의존과 종속을 더욱 심화하는 결과만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한국의 국방비 증액은 한국군의 자주적 역량 강화보다는 미국의 군사패권주의를 재정적으로 지원해주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자주국방은 국방비의 산술적 증가가 아닌 한국형 지형에 맞는 독자적인 무기체계와 기술 및 전략의 개발, 작고 강한 기술집약형 군 개혁, 국민적 합의 기반 확보 등이 어우러져야 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노무현 정부의 자주국방 비전과 실천은 국민들이 안심하기에 일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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