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파, 배고파, 밥 먹자. 밥, 밥, 밥.” “은아, 캠핑은 먹으려고 오는 게 아니야.”
1996년 강원도에 무장간첩이 나타났다. 당시 군 수색작전에는 육군 상병이던 이세영 기자도 포함돼 있었다. 수색작전을 벌인 50일 동안 오대산에서 야영했다는 이 기자는, 배고프다고 보채는 여섯 살배기 딸 은이에게 ‘캠핑이란 이런 것’이라며 폼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준비한 것은 먹는 거밖에 없지 않은가. ‘캠핑의 꽃’ 바비큐용 생삼겹살 3근(1800g), ‘캠핑의 꽃다발’ 백숙용 토종닭 1마리, 타마시기용 맥주 4팩(나중에 2팩 추가), 뇌관용 소주 1병(나중에 백세주 추가), 힘은 역시 밥심 햇반 5개, 아침 해장에는 역시 신라면 5개, 바비큐와 백숙에는 깐 마늘 한 봉지. 이게 다였다.
보이스카우트 출신의 ‘캠핑 신동’?
장교 출신에, 게다가 공군 장교에, 심지어 공군 정훈장교라는 내 비야전적 출신 성분을 12년째 비웃어온 이 기자에게 내가 할 수 있는 항변은 “나도 한때는 보이스카우트였다”는 것뿐이었다. 그렇다, 나는 보이스카우트였다. 그것도 무려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그 이름도 두근두근 소년척후대의 후신. 당시 청조끼에 베레모 뒤집어쓰고 다니던 ‘아람단’이라는 일단의 무리가 생겨났다.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낸 한국청소년연맹이었다. 정권의 ‘비호’를 받았지만 그래도 보이스카우트와 비교할 바 아니었다.
보이스카우트는 뭘 준비하라는 건지도 모른 채 끊임없이 ‘준비’라는 구호를 외쳤다. 한쪽을 잡아당기면 순식간에 줄이 풀리도록 말아둔 포승줄을 허리에 차고 다녔다. 사람은커녕 강아지 한 마리, 이 줄로 구한 적 없다. 보이스카우트 교범에는 텐트 치는 법, 매듭법, 독도법, 산속에서 길 잃었을 때 살아남는 법, 목에 두른 삼각건을 이용한 응급처치법 등이 가득했다. 쓸 데는 없었다. 더 쓸 데가 없는, 값비싼 보이스카우트 용품들도 사들였다. 인디언들이 백인 기병대 머리를 쪼갤 때나 쓸 법한 손도끼가 어린 초등학생 손에 쥐어졌다. 총포·도검류 자진신고 기간에 신고해야 마땅할, 사이다병만 한 길이의 손칼도 허리에 찼다. 국방색으로 칠해진 플래시, 양철 수통, 수통을 차기 위한 요대, 판초 우비, 키만 한 침낭, 복잡한 주머니가 달린 배낭 등. 어쨌든 ‘초딩’ 같지 않은 반듯하고 빈틈 없는 자세, 꼼꼼한 야영 준비, 세계잼버리 참가…. 그렇다. 나는 일찍이 1980년대 중반 한국보이스카우트 총재상까지 받은 ‘캠핑 신동’이었다.
오대산 50일 용맹정진도, 한때 손도끼를 들었던 캠핑 신동도 아무 소용없었다. 지난 10월4일 오후 급조돼 5일 저녁부터 6일 오전까지 진행된 캠핑은, 우리들이 ‘콘도형 인간’, ‘펜션형 남자’에서 한 발짝도 진화하지 못했음을 확인시켰다.
시작부터가 누더기였다. 4일 오후 이세영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일 캠핑 간다. 기사는 네가 쓴다.” 조혜정 기자는 “일을 빙자해 놀러 간다”며 “도덕적 해이”를 질타했다. 도덕적으로는 누구 말처럼 완벽했는데, 준비는 완전 허술했다. 5일 오후 캠핑 출발 직전까지 제대로 갖춰진 장비가 없었다. “쓸 만하다”는 김보협 기자의 말에 텐트를 빌렸다. 침낭도 2개 받았다. 이세영 기자의 친구가 일하는 직장으로 찾아가 코펠과 버너를 빌렸다. 우리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장 열정적으로 한 것은 장보기였다. 삼겹살과 술이 차에 실렸다. 이 기자의 첫째 딸 은이도 차에 태웠다. 둘째 딸 담이는 엄마에게 맡기고 대신 닭백숙 끓일 압력밥솥을 주방에서 뺏어왔다. 은이에게는 “캠핑 가면 동갑내기 새 친구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다. 이정훈 기자와 딸 세영이도 캠핑에 오기로 했다. 기사 쓰기 힘들게 이세영이 2명이다.
4년차 전문 ‘캠퍼’의 ‘황금마차’
주말마다 미어터진다는 서울 근교 캠핑장이지만 평일에는 텅 빈다고 했다. 경기도 양주의 ㅎ캠핑장으로 차를 몰았다. 캠핑장이 그럴듯했다. 예상대로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사장 아저씨가 ‘캠핑 불가’라며 나가란다. 수도공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먹는 물도, 화장실 물도 나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전화 문의도 하지 않고 무작정 내달린 우리 잘못이다. 사장 아저씨의 추천을 받아 근처 ㅍ캠핑장으로 갔다. 진입로는 상당히 그럴듯했다. 나무가 쭉쭉 솟아 있었다. 그런데 웬걸, 캠핑장은 나무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캠핑장 바로 옆에는 경기 북부 지역의 ‘명물’인 공동묘지가 펼쳐져 있었다. 밤이면 서늘하겠다. 까치 수십 마리가 캠핑장에서 뭘 쪼고 있었다. 마른 흙바닥에 꽃뱀이 허연 배를 뒤집고 죽어 있었다. 풍수는 잘 몰라도 진짜 여긴 아니다 싶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뺐다.
한참을 달려 세 번째 캠핑장으로 이동했다. ㅂ캠핑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가 다 돼서였다. 캠핑장 바로 앞 도로에 트럭이 내달렸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은이는 배고프다 하고, 해가 지면 텐트는 어떻게 치나 싶었다. 김보협 기자가 “쓸 만하다”고 한 텐트를 꺼냈다. 뭔가 굉장히 작았다. 게다가 김보협 기자와 20년 정도 인생을 함께했을 텐트였다(다음날 김 기자는 “아버지가 쓰시던 30년된 텐트”라고 고백했다). 폴대는 몇 개 안 되었지만, 그런데도 “이게 거기로 가는 거냐” “무슨 소리냐 그건 아니다”며 이 기자와 둘이서 100분 토론 하듯 텐트를 세워야 했다. 손바닥만 한 텐트를 오대산과 신동 둘이서 세우지 못하고, 결국 여섯 살 은이에게 한쪽 폴대를 잡고 있으라고 했다. 아동학대다. 손바닥만 한 텐트를 세우고 나니 이제 할 일이 없다. 은이 하나로 꽉 차는 텐트 옆에 돼지고기, 닭고기, 술이 든 검은 비닐봉지 네댓 개를 들고 서 있자니 부끄러웠다. 이건 순전히 캠핑족들의 으리으리한 텐트, 타프, 테이블, 의자, 그릴, 화로, 스토브, 더치오븐이 없어서였다. 존재가 의식을, 물질이 남자의 자존심을 규정한다. 사실이다.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은이가 배고프다고 한다. 내 딸은 아니지만, 야전 출신 아빠 때문에 아이가 고생이다. 그때였다. SUV 차량 한 대가 지는 해를 뒤로 하고 먼지를 일으키며 캠핑장으로 들어왔다. 4년차 전문 ‘캠퍼’ 정용일 기자였다. 우리의 딱한 처지를 그리 심하게 비웃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 기자가 차 뒷문을 열었다. 매점이 없는 격오지 부대에 과자를 가득 싣고 찾아온다는 ‘황금마차’를 맞이한 기분이 이럴까. 거기에는 아웃도어 용품 백화점이 있었다. 으리으리한 텐트, 테이블, 의자가 쏟아졌다. 식기·주방기기 세트가 든 가방은 흡사 외과의사의 수술가방을 방불케했다. 우리가 세운 30년 묵은 텐트 6개가 들어갈 만한 텐트가 뚝딱 세워졌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텐트 안에 진짜 텐트가 들어섰다. 오대산과 신동은 그저 “우와” “우와”, 비명만 질렀다. 날이 어둑해졌다. ‘콘도형 남자’는 어두워지자 불안해졌다. 정 기자가 차에서 전기 릴선을 꺼냈다. 그는 50m짜리 노란 전선을 끌고 문명을 찾아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저녁 6시 28분 텐트에 걸린 백열등에 불이 들어왔다. ㄷ중공업 텔레비전 광고가 바로 이런 거였다. 나는 광고 속 오지 어린이들처럼 처음 들어온 전깃불을 향해 환히 웃으며 뛰어갔다.
남자의 공간, 남자의 잠자리
저녁 7시 11분. 배가 고프다던 은이가 데우지도 않은 햇반을 뜯어 맨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동학대다. 화로에 장작을 넣었다. 가죽장갑을 낀 정 기자가 가스 토치로 불을 댕겼다. 뭔가 서부극 이미지가 연출됐다. 남자다. 석쇠를 올리고 삼겹살을 굽기 시작했다. 정 기자가 꼬챙이에 삼겹살을 꿰어서 석쇠에 올렸다. 허브소금을 뿌렸더니 돼지고기에서 양고기 풍미가 난다. 유목민이 여기에 있었다. 오대산에서 수련한 이세영 선생이 “기마민족의 웅혼한 기상이 느껴진다”고 했다. 부끄러웠다.
밤 8시 31분. 사위는 이미 깜깜했다. 메타세쿼이아 나무 밑 화롯불에 운치가 감돌았다. 캠핑장으로 차가 들어왔다. 한 남녀가 우리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승용차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텐트를 치는가 싶더니 얼마 뒤 텐트를 접고 캠핑장을 떠나버렸다. 평일, 아무도 없기를 기대하며 캠핑장을 찾은 남녀의 깊은 뜻이 우리도 아쉬웠다. 밤 8시 58분. 이정훈 기자가 딸 세영이와 함께 왔다. 이정훈 기자도 “동갑 친구 소개해주겠다”며 딸을 데려온 것이다. 세영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친구야, 친구야 어딨니?” 하며 은이를 찾았다. 그러더니 처음 보는 은이에게 “너 나 알아?”라고 묻는다. 아이들 대화가 이렇다. 가족주의는 이렇게 완성된다.
정 기자는 “캠핑을 오면 시간관념이 사라진다”고 했다. 그 말에 퍼뜩 휴대전화를 보니 밤 9시 50분이다. 신세경이 나오는 TV 드라마 첫 회가 시작할 시간이다. 텔레비전도, 리모컨도 없다는 사실에 금단 현상이 일어나듯 엄지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자정이 다가오자 전문 캠퍼 정 기자는 초짜들을 남겨 두고 집으로 떠났다. 극기훈련 온 고등학생들을 캠프에 두고 회식하러 떠나는 선생님이 따로 없었다. 정 기자는 “캠핑장에서 대화는 모닥불과 똑같은 톤으로 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밤이 산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가까이서 개 짖는 소리가 “컹컹” 들렸다. 캠핑족 음식쓰레기에 의지해 살아가는 고양이 한 마리가 슥 지나갔다. 새벽 2시. 아이들은 자고 남자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화로, 토치, 가죽장갑, 찬바람, 별, 입김…. 캠핑은 가족주의의 외피를 썼지만 남자의 공간, 남자의 잠자리였다.
그러나 추웠다. 콘도형 인간, 펜션형 남자들은 추위가 무섭다. 기마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얘기하던, 추위에 약한 남자들의 잠자리에 집에서 가져온 전기장판이 소심하게 깔렸다. 아이들이 덮던 침낭도 빼앗았다. 차마 딸들을 버리지 못한 아비들이 딸들을 하나씩 안았다. 딸을 흡사 탕파(뜨거운 물을 넣은 캠핑용 보온주머니)로 이용하겠다는 불온한 심사가 느껴졌다. 딸이 없는 나는 그 사이에 나를 안고 누웠다. 다음날 아침 8시 30분. 술 마시고 길바닥에서 잔 적 있는 우리 세 남자는 전기장판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전기장판 끝자락에 매달려 잔 탓에 목부터 요추까지 뻣뻣하게 굳은 이정훈 기자가 텐트에 벗어놓은 내 안경을 밟았다. “빠그작” 소리가 나며 안경알이 빠졌고, 캠핑은 그렇게 끝났다.
캠핑형 인간으로의 진화
6일 오전, 기자 3명이 ‘거지 캠핑’을 떠났다는 소문이 한겨레신문사 사옥에 떠돌았다. 오후에 거지들은 초췌한 몰골로 회사에 나타났고, 일단 침낭부터 사자고 결의했다. 캠핑형 인간으로의 진화는 시작됐다.
양주=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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