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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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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가까운 바다에 침몰한 세월호

한국 영화 흥행 기록 갈아치우는 <명량>… “청와대는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리더십과 이순신의 “충은 왕이 아닌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얼마나 다른가
등록 2014-08-13 14:37 수정 2020-05-03 04:27
리더십 부재의 시대가 의 흥행 돌풍을 낳았다는 분석은 온전한 진실을 담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영웅에 대한 조력자로서 중장년 세대의 정체성이 투사돼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리더십 부재의 시대가 의 흥행 돌풍을 낳았다는 분석은 온전한 진실을 담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영웅에 대한 조력자로서 중장년 세대의 정체성이 투사돼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이 한국 영화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61분간의 해전 장면이 주는 역동적인 볼거리와 불가능해 보였던 승리가 빚어내는 카타르시스가 대단하다. 그러나 과연 그뿐일까. 영화는 흔히 ‘민족의 영웅’이라 일컫는 이순신에 대한 성찰적 재해석을 통해, 심각한 리더십의 실종을 앓는 한국 사회에 뜨거운 경종을 울리고 있다.

1. 최종병기 리더십

은 세계 해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대승인 명량대첩을 재현하며 허구적 상상력을 가미했다. 함포전을 위주로 한 당시 전투에 백병전을 삽입한 것은 영화적 재미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순신이 처한 상황은 역사적 고증에 충실하다. 영화는 이순신이 고문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은 한산도대첩 등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하지만 전쟁이 소강 국면에 접어들자 선조는 항명의 죄를 물어 이순신의 관직을 박탈하고 압송한다. 전쟁이 터지자 의주로 도망가서 완전히 민심을 잃은 선조가 전쟁영웅으로 민심의 지지를 얻은 이순신을 숙청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1597년 일본의 재침 때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고 있던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하자, 선조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한다. 이순신에게는 칠천량에서 도망친 배설 장군의 배 12척과 두려움에 휩싸인 패잔병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것으로 어떻게 330척의 왜선과 대적할 수 있을까.

수군을 포기하라는 왕명이 내려오자, 병사들의 탈영이 속출한다. 배설 장군이 거북선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는 장면은 절망감에 정점을 찍는다. 이순신은 동요하는 병사들에게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이 어찌 논리로 설득될 수 있으랴. 이순신은 그 말의 뜻을 몸소 보여준다. 전투 초반 겁에 질린 11척의 배들이 뒤로 물러나 있는 동안, 이순신의 대장선은 홀로 330척의 적선과 싸운다. 이순신의 대장선이 죽기 살기로 싸우며 버티는 모습을 보고, 다른 장군과 병사와 백성들마저 감화돼 죽을힘을 다해 싸운다.

은 흔히 전쟁영웅을 그린 영화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훌륭히 피해간다. 아무리 걸출한 영웅이라 해도 전투는 장군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명을 따르는 병사가 있어야 하고, 함께 배에 타고 노를 저어야 하는 격군이 있어야 한다. 그들을 어떻게 설득하여, 어떤 마음으로 전투에 나서게 할 것인지가 진정한 장군의 능력이다. 은 이순신의 무예나 지략 같은 개인기에 집중하지 않고, 겁에 질린 병사나 손에 피가 나도록 노를 젓는 격군들을 비춘다. 이들이 두려움을 용기로 전환시켜 싸우도록 하는 이순신의 자기 헌신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순신이 ‘충파’의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조선의 판옥선이 일본의 세키부네보다 컸기 때문이 아니라, 배를 빠르게 진격시킬 수 있는 격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병사들의 자발적인 헌신을 이끌어내는 솔선수범의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은 명량해전의 불가해한 승리의 전법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는 영화가 아니라, 진정한 리더십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승전 뒤 이순신은 조류가 아닌 백성들이 ‘천행’이었다고 말한다. 이순신의 최종병기는 거북선이나 화포나 조류가 아니라, 병사와 백성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자기 헌신의 리더십이었다.

2. 왕이 아닌 백성을 향한 충

이순신의 자기 헌신적 리더십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영화는 이순신 아들의 입을 통해 묻는다. “승리한다 한들 왕은 이순신을 버릴 것이다. 그런 몰염치한 왕을 위해 왜 목숨을 버리려 하는가?” 이순신은 “충은 왕이 아닌 백성을 향해야 한다”고 답한다. 이순신이 진정으로 구하려 했던 것은 정권에 대한 욕심만 가득한 왕이나, 이미 시스템의 한계를 다 내보인 조선이라는 왕조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태어나 무능한 왕과 부패한 왕조로부터 착취당하며 살다가 이제는 외국군의 침입이라는 절체절명의 재난을 맞아도 국가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무참하게 살육당하는 백성들이었다는 뜻이다. 이는 박정희 정권 때부터 이순신을 내세워 강조했던 국가주의적 가치관과는 매우 다른 해석이다. 은 이순신을 국가주의에서 해방시키는 동시에, 왕이 아닌 민을 바라봐야 한다는 충의 진정한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명량 가까운 바다에 침몰한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청와대는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고 말하던 리더십의 완벽한 실종과, 재난에 처한 국민이 아닌 대통령의 심기만 살피던 관료와, 대통령의 심기 따위를 국가 안위와 동일시하던 언론의 퇴행적 모습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격군들은 “우리가 이렇게 고생한 것을 후손들이 알까?” 하고 말한다. ‘한국전쟁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닌’ 재난의 시대를 살면서, 이순신이 아닌 원균의 대장선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듯한 위기감을 느끼는 지금의 관객들은 차라리 그들이 부럽다. 이순신은 승전 뒤 나지막이 읊조린다. “이 쌓인 원한들을 어찌할꼬….” 억울하게 수장된 304명의 원혼들을 다 어찌한단 말인가. 이순신에겐 12척의 배가 있었지만, 우리에겐 이순신이 없다… 이순신이 없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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