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번째 가난한 나라 버마에 닥친 사이클론, 군부독재 견제와 인도 지원 사이의 딜레마 다시 고개 들어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지난 5월2일 밤 버마(현 미얀마) 남부지방을 덮친 사이클론 나르기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시속 190km의 강풍을 동반한 나르기스가 이라와디 삼각주를 일대를 휩쓸고 간 뒤, 집채만 한 파도가 5천㎢에 이르는 드넓은 평야를 집어삼켰다. 애초 몇백 명 규모라던 사망자 수는 계속 불어나, 5월8일 현재 10만 명을 넘어설 것이란 추정까지 나오고 있다. 이재민은 일찌감치 100만을 헤아린다. 재난지역으로 선포된 이라와디 일대에만 2400만 인구가 몰려 있다. 사망자와 이재민 규모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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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헌장 조항을 들먹이기도
참담한 자연재해 앞에 국제사회는 망설임 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며 ‘문단속’에 골몰해온 버마 집권군부도 모처럼 외부 지원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썩 내키지는 않았던 겐가? 버마 군부의 몸놀림은 더디기만 하다. 응급구호 요원들에게조차 입국사증 발급을 늦추면서 시각을 다투는 응급구호 작업이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국제사회도 슬며시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기 시작한다. 영국 은 5월8일치 인터넷판에서 유엔 내부문건을 따 “버마 정부가 발을 질질 끌어 구호작업이 언제나 본격화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전했다. 프랑스 정부는 아예 유엔 헌장의 ‘긴급구호 책임’ 관련 조항을 들먹이며, 버마 군부의 허락 없이도 직접 사이클론 피해지역으로 구호물품을 실어나를 수 있다고 열을 올렸다.
여기에 버마 당국은 지원받은 구호물품을 직접 분배하겠다고 고집하면서, 오래된 논쟁에 다시 불을 지피는 모양새다. 구호물품이 버마 군부의 손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버마 지원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논란은 기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버마에 대한 인도 지원 물품이 군부 쪽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다”거나 “인도 지원이 되레 군부정권의 안정화에 기여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아왔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자국 인도 지원 단체가 버마를 직접 지원하는 것을 금지해왔으며, 사이클론 피해 규모가 커지자 지난 5월6일 이 규정을 일시 해제했다. 문제는 사이클론 피해를 입기 전에도 버마는 충분히 비참하고 가난한 나라였다는 점이다.
자원 부국인 버마는 1950년대 초반만 해도 동남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로 손꼽혔다. 하지만 196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가 ‘우리식 사회주의’를 내걸면서, 버마 경제는 나락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지난해 “지구상에서 13번째 가난한 나라”로 꼽았을 정도인 버마에선 전체 인구의 약 75%가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이의 절반가량이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고, 5살 미만 영유아 사망률도 1천 명당 104명에 이른다. 신생아 10명 중 한 명이 5살 생일을 맞지 못한다는 얘기다. ‘빈곤의 대륙’ 아프리카를 제외하면, 영유아 사망률이 이 정도로 높은 나라는 아프가니스탄과 버마 둘뿐이다. 한때 세계 제1의 쌀 수출국이었던 버마지만, 이젠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들로 넘쳐난다. 신생아의 20~30%가 저체중으로 태어나고 있으며, 5살 이하 어린이 3명 중 한 명은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다.
2.88달러 대 58달러
지난해 세계보건기구(WHO)는 버마의 의료수준을 세계 191개국 가운데 190위로 꼽았다. 캄보디아와 더불어 동남아에서 에이즈 환자가 가장 많은 버마에선 성인남녀의 2.2%가량이 에이즈에 감염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사정권의 정보 차단으로 정확한 통계수치를 확인할 순 없지만, 유엔에이즈(UNAIDS) 등 국제보건기구는 버마인 에이즈 환자가 최소 17만 명에서 최대 6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해마다 9만7천여 명이 새로 결핵에 감염되고 있고, 말라리아는 5살 이하 어린이 사망의 최대 원인으로 꼽힌다. 해마다 3천 명가량이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메고 있다. 그럼에도 군사정권은 전체 예산의 30~50%가량을 국방비에 쏟아붓고 있다. 교육과 보건·의료 분야에 투자하는 공적자금은 버마 국민 1인당 1달러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전해진다. 끝모를 가난과 정치적 박해를 피해 국경을 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타이-버마 국경에 사는 난민만 200만명을 헤아린다. 그보다 많은 이들이 국경을 넘지도 못한 채 국내난민(IDPs)으로 떠돌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국제사회는 버마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머뭇거려왔다. “치료를 위해선 겉으로 드러난 증세만 돌볼 게 아니라, 병의 원인을 없애야 한다”는 논리였다. 버마의 인도적 재난을 부른 것은 집권 군사정권이니, 군부독재를 무너뜨리지 않고는 버마의 비극에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는 게다. 하지만 인권과 민주주의를 압살해온 버마 군부를 겨냥한 각종 제재·봉쇄 조처는 버마 국민의 가난한 삶을 더욱 옹색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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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군부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하는 조처를 취할 때마다 국제사회는 버마에 대한 인도 지원을 줄여나갔다. 버마에 대한 직접 지원 대신 타이 국경지대 난민캠프에 대한 지원에 매달렸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펴낸 자료를 보면, 버마 국민 한 명이 지난해 지원받은 해외 개발원조자금은 2.88달러에 불과했다. 세계 50개 가난한 나라에 대한 지원금이 1인당 평균 58달러였다는 점에 비춰 턱없이 적은 액수다.
문제는 국제사회가 버마 민주화운동을 지원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되레 버마 군부가 민주세력을 탄압하는 계기만 만들어주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는 사이 국제사회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고 치켜세우는 5500만 버마 국민은 고립 속에 고통받고 있다.
“버마 지원단체들은 지나치게 교조적이며, 이념에 경도돼 있다. 서구의 엘리트들이 안락한 소파에 앉아 벌이는 배부른 논쟁에 평범한 버마인이 끼어들 자리는 애당초 없었다.”
세계적인 난민 지원단체인 ‘레퓨지스인터내셔널’(RI)의 조엘 차니 활동가는 지난 4월 이 단체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그는 “버마를 민주세력과 군부독재로 갈라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몰아가면서, 정의를 위한 싸움에 나서라고 부추기는 건 손쉬운 일”이라며 “버마의 민주화라는 한 가지 목적에만 사로잡힌 채 버마 국민이 겪고 있는 인도적 재난을 방치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변화의 기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도적 위기가 깊어지면서 유럽연합이 최근 들어 기존 정책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올해 버마에 2660만유로(약 363억원)를 지원하기로 하는 한편, 오는 2010년까지 한 해 지원금액을 4천만유로까지 인상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는 별도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와 공동으로 말라리아·결핵·에이즈 등 버마의 ‘3대 질병’ 치료기금으로 앞으로 5년간 1억4천만달러(약 1091억원)를 모으겠다는 뜻도 밝혔다.
한반도의 북녘 땅이 떠오른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에이즈와 조류독감 지원 프로그램 일부를 제외한 일체의 버마 내부지원을 금했다. 미국 정부는 사이클론이 휨쓸고 간 지 나흘 뒤인 지난 5월6일에야 자국 인도 지원 단체의 버마 직접 지원 금지령을 일시 해제했다. 물론 “버마 군부와 관련을 맺거나,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행위를 해선 안 된다”는 꼬리표를 붙인 채였다.
사이클론 나르기스의 파괴력은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피해지역이 고스란히 버마의 곡창인 탓에 조만간 대규모 식량부족 사태가 닥쳐올 게 뻔하다. 긴급구호 단계가 지나면 국제사회는 다시 ‘인도 지원’ 대 ‘정권 교체’로 갈려 손가락질을 해댈지도 모른다. ‘퍼주기론’도 어김없이 등장할 것이다. 버마의 비극을 바라보며 한반도의 북녘 땅을 떠올리는 이유다. 버마의 비극이 낯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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