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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법 철폐보다 더 힘들까

등록 2000-07-26 00:00 수정 2020-05-02 04:21

효율성과 활동력 떨어지는 국회 패션…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면 옷부터 바꿔보라

“국보법 철폐를 이루는 것보다, 청바지 입고 본회의 들어가는 게 더 힘들다.”

민주당 정범구(46) 의원의 말이다. 그는 얼마 전 오렌지빛 넥타이를 매고 본회의에 나갔다가 “국회 역사상 이런 빛깔의 넥타이는 처음 등장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번은 일요일에 청바지를 입고 63빌딩에 갔다가 엘리베이터에서 한 3선의원을 만난 일이 있다. 상대는 별로 편치 않은 표정으로 “참 편해보이네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정 의원은 이런 일을 반복해 겪으며 국회 안에 획일적인 복장문화가 상당히 뿌리깊게 내려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의원회관 입구에서 제지당한 남경필 의원

한국정치 1번지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복장은 정해져 있다. 정복으로 통칭되는 규격 복장은, 진한 감색이나 쥐색 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튀지 않는 빛깔의 사선무늬나 땡땡이 무늬 넥타이를 매는 것이다.

한나라당 남경필(35) 의원의 경우 98년 10월 국정감사 기간에 청바지를 입고 의원회관으로 들어가다 경비에게 제지당한 일이 있었다. “어디 가십니까?” “남경필 의원실에 가는데요.” “무슨 일로 가십니까.” “제가 남경필인데요.” 경비는 몰라봐서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했으나 남 의원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복장 룰을 새삼 환기하게 된 순간”이라고 그때 일을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남 의원은 ‘변신’족이다. 사무실에서 밤샘 작업을 할 때는 추리닝까지 착용하지만, 본회의나 상임위회의에 들어갈 때는 ‘규격복장’으로 갈아입는다. 국회를 나서면서 캐주얼 복장으로 갈아입는 일도 잦다. “안 그래도 튄다는 소리를 듣는 마당에 옷차림까지 도드라지게 하기는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콤비나 캐주얼한 정장, 색깔 와이셔츠 등은 서로들 입고 다니는 분위기였으면 해요. 개량한복도 좋고요.”

여야를 막론하고 소장 개혁파 의원들 중에는 국회 복장문화에 대해 나름의 갈등을 겪는 이들이 많다. 고민의 내용은 이렇다. 국회 패션으로 불리는 규격화된 정복차림을 하자니 업무효율성과 활동력이 떨어지고, 개성껏 입자니 소신껏 주장하는 개혁비전까지 돌출 행동으로 한묶음에 치부될까 부담스럽고….

복장에 대한 피곤함은 비서관과 보좌관들에게는 더 크다. 의원은 공식적으로 얼굴 내밀 일이 많지만, 발로 뛰어야 하는 보좌진들에게까지 그와 똑같은 정복차림이 필요할까. 이런 옷차림은 심지어 출입기자들에게까지 암묵적인 룰로 통하고 있다.

물론 국회에도 복장문화에 신선한 활력을 준 인물들이 있기는 하다. 한나라당 김홍신 의원 보좌관 김학준(32)씨의 경우 지난해 가을 앞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갈색 염색을 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최근에는 발찌하는 여직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캐주얼 복장을 고집하는 남자 사무관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비서관들의 옷차림이 해당 국회의원의 사고방식에 영향받듯, 국회의원을 포함해 국회에서 일하는 이들의 복장은 국회의 일상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점퍼차림에 운동화는 어떨까

80년대 후반, 독일 연방의회가 열리던 첫날, 처음 등원하는 녹색당 의원들이 모두 점퍼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들어 온 일이 있었다. 일종의 집단행동이었다. 그런데 당시 연방의회 안에서의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격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민당 의원들까지 가세해 의원의 품위를 떨어뜨렸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우리 국회에서는 아직 그런 집단 행동은 없었지만 89년 서경원 전 의원이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국회에 나타난 이래, 김홍신 의원이 캐주얼 차림으로 의원회관을 돌아다닌 것을 빼고는 이렇다할 파격복장이 등장한 적은 없었다. 국회의 복장문화를 갑갑해 하는 이들은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개인일 경우 ‘왕따’되고 집단일 경우엔 ‘항명’으로 여겨졌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새로운 복장에 대한 수용 여부는 한 집단이나 사회의 포용력을 나타내주는 지표가 될 수 있다. 현대를 패션의 시대라고 한다. 패션은 단순한 옷차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태도, 역할, 실천, 비전까지 아우르는 것이다. 마음 바꾸기가 쉽지 않다면 옷부터 바꿔보는 것이 어떨까.

김소희 기자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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