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2019년 가을 서울 서초동과 광화문에 모인 군중은 서로 다른 ‘도시’에 살고 있다. 한쪽에는 최고의 시절이 다른 한쪽에는 최악의 시절로 다가온다. 누군가에겐 빛의 계절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어둠의 계절이다. 두 곳에 모인 군중의 심리적 거리는 물리적 거리보다 더 멀다.
“신뢰하는 매체가 아예 없어요”
하지만 두 공간을 가득 채운 군중을 공통으로 지배하는 정서가 있다. 바로 ‘불신’이다. 이들은 정치권과 언론을 믿지 않는다. 이들의 차이는 정부와 검찰에 대한 태도에 있다. 서초동의 군중은 ‘윤석열 검찰’을, 광화문의 군중은 문재인 정부의 상징인 조국 법무부 장관을 믿지 않는다.
10월5일 저녁 7시 서초역 사거리에 모인 시민들은 ‘검찰개혁’ ‘조국 수호’가 적힌 손팻말을 들었다. 친구나 가족, 소모임 등 다양한 형태로 모인 이들에게 ‘홍위병’이나 ‘관제데모’(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20대 젊은층도 많았다. 교대역 앞 도로에 앉아 있는 29살 동갑내기 친구 ㄱ, ㄴ(회사원)씨에게 ‘검찰개혁’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검찰 자체에 믿음이 아예 없어요. (조국 장관) 수사 자체가 문제 있잖아요. 과거에 의혹이 있던 사람들과 똑같이 수사 안 했잖아요. 꼬투리 정도밖에 안 나왔지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어요.”
‘조국 사태’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 어떤 매체를 가장 신뢰하는지 질문을 던지자 ㄴ씨가 답했다. “신뢰하는 매체가 아예 없어요. (언론이든 정치권이든) 나오는 정보는 다 읽긴 읽어보죠. 하지만 좀더 찾아보고 제가 확실히 믿을 수 있는지 판단해요.” 촛불 집회 중 마련된 일반 시민 발언 시간에는 검찰에 대한 성토와 함께 보수 야당, 언론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계속 터져나왔다.
10월9일 오후 1시께 광화문 세종대로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이들로 가득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와 이재오 전 의원의 주도로 결성된 ‘문재인 하야 범국민투쟁본부’(투쟁본부)가 주최한 보수단체 집회였다. 10월3일 집회는 자유한국당이 주도했지만 이번에는 투쟁본부가 판을 깔았다. 황교안 당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개별 자격’으로 참여했다.
집회 무대에 올라온 인사들 입에서는 ‘주사파 정부’ ‘빨갱이 타도’같이 색깔론에 기반한 극단적인 발언이 터져나왔다. 민주당 의원들과 문재인 정부 핵심 지지자들은 10월3일과 10월9일 집회를 ‘동원’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태극기 세력’으로만 정의하기에는 색깔이 다른 이들도 눈에 띄었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에 다섯 차례 참여했고 자신을 중도층이라고 한 오아무개(35·자영업자)씨는 “초반에는 문재인 정부에 힘 실어주려고 지지했다. 하지만 조국 장관과 관련된 논문, 사모펀드 의혹 등 모든 게 문제 있어 보인다. 검찰개혁이 대의라고 하는데 ‘녹슨 메스’가 어떻게 수술을 할 수 있냐”고 말했다. 그는 어떤 매체를 신뢰하냐는 질문에 “공중파 방송과 보수·진보 신문 기사를 찾아본다. 하지만 기존 언론은 권력에 따라가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걸러서 본다. 나머지는 직접 찾아본다”고 답했다.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참여한 이아무개(40·회사원)씨는 ‘모두’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정부나 정치인들에게 불만이 많아요. 언론도 공정성이 무너졌어요. 이렇게 나오는 게 시민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상황에서는 우리 의견을 내놓는 게 맞다고 봐요.”
서로 ‘국민’ 위치를 독점하려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만난 이들 모두 ‘언론 보도’는 “일단 믿을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이들은 팟캐스트, 유튜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찾은 정보를 바탕으로 ‘조국 사태’를 판단했다. 양쪽 모두 여야와 언론이 서초동과 광화문 집회 참여인원을 언급하며 집회 의미를 축소하는 데 불편한 감정을 내비쳤다.
현대사에서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광장 정치’의 동력도 불신이었다. 정부와 권력, 의회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임계치에 이르렀을 때 국민은 거리로, 광장으로 나왔다. 그동안 전문가들은 이를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나 한계라는 관점에서 해석했다. “1987년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를 쟁취한 이후에도 정부와 국회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은 촛불이 되어 뒤덮인 광장에서 지속되었다. 왜 국가에 대한 저항이 민주화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가? 저항과 촛불이 반복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인들이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국정에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먼저 추구하는 ‘주인-대리인의 딜레마’ 때문이다. 이 딜레마는 주권자 국민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의 대리인들이 국민보다 자신들을 위해 통치하는 상황을 지칭한다. 이 딜레마는 모든 대의정치 체제에 공통된 것인데, 특히 한국에서 심각하다.”(‘촛불의 제도화가 대의민주주의 대안’, 오현철 전북대 교수, <관훈저널> 2017년 겨울호)
조국 장관으로 촉발된 ‘거리 정치’는 현대사의 변곡점이 됐던 기존 대규모 집회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1987년 민주화 항쟁,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2016~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집회는 독재권력이나 정부의 불통, 민주주의를 불능에 빠트린 권력에 대한 국민의 광범위한 저항이었다. 비정상적인 권력 행사에 제동을 걸려는 국민이 분노를 공유하고 공감대를 넓히며 광장을 메웠다. 그런데 2019년의 광장은 ‘검찰개혁’을 구호로 내세운 국민과 ‘조국 반대’를 앞세운 국민의 대치 구도로 진행되고 있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서초동, 광화문 집회 참여자들이 각각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1960년대 이후 대규모 집회는 압도적인 다수의 여론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번에는 서로 대치되는 의견을 가진 이들이 주권자로서 국민의 위치를 독점하려는 의지로 정치 행동에 나선 것이 차이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과거 대규모 집회가 정당과 언론, 시민단체, 권력기관 내부 고발자 등과 느슨한 연대를 보였다면 이번에는 연대 대신 불신만 존재하는 것도 차이점이다. 과거에는 언론과 내부 고발자는 권력의 이면을 고발하고, 정당·시민단체·사회운동단체가 국민이 거리로 나올 구호를 만들고 판을 깔며 ‘광장 정치’의 동력이 됐다. 그러나 이번엔 조국 장관과 그의 가족에 대한 검찰 수사가 과도하다고 보고, 언론의 인사검증 보도, 조국 장관 관련 의혹 보도를 검찰-언론 유착으로 보는 이들이 서초동을 찾았다. 시민사회운동단체와 연대하지 않았고 이를 배제하려는 목소리도 많았다. 10월5일 서초동의 주요 구호는 검찰개혁과 함께 ‘언론 개혁’이었다. 자유한국당과 보수단체의 ‘기획’으로 시작됐지만 광화문 집회는 ‘기회의 공정, 과정의 평등, 결과의 정의’라는 문재인 정부의 기조가 조국 장관과 어긋나는 것에 실망한 이들의 참여가 늘어나며 세를 불렸다.
“정치권 무능력 보완하는 국민주권 발현” 61.8%
10월9일 광화문에선 서울대 집회 추진위원회 학생들의 주도로 조국 장관의 과거 트위터 글과 실제 삶의 괴리를 꼬집는 퀴즈 행사가 열렸다. 조국 장관 아들의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 인턴 논란을 비꼬는 ‘인턴 활동 예정 증명서’도 배포됐다. 두 집회 모두 “국회가 갈등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의식해 정당은 당 차원의 참여를 자제했다.
서초동과 광화문의 대치를 ‘대의민주주의 위기’나 ‘구조적 분열’로 분석하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이 현상을 2016년 탄핵 촛불을 경험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환경과 조건이 바뀌었다는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연구소) 연구원은 “정치에 대한 능동적 의사 표현에 관해서 보면 한국 사회는 확실히 2016년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 현상이 바람직하다고 보든 아니든 간에, 이젠 되돌아갈 수 없다. 누구든 SNS로 의견을 표명하고 교환하며 집단행동을 조직할 수 있는 사회, 앞으로 한국 민주주의는 여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한국 민주주의가 감당해야 할 조건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국민 인식 변화에서 드러난다. <내일신문>과 연구소가 10월7일 공개한 ‘촛불 3년,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 조사(9월26일~10월2일 1200명 유무선 혼합 임의전화걸기 전화면접조사,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2.8%포인트)를 보면 ‘정부가 당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무능할 때’(71.7%), ‘정부가 비민주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때’(76.9%), ‘정권의 비리가 밝혀졌을 때’(70.7%) 촛불을 들겠다고 답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러한 응답은 진보·보수층 가릴 것 없이 70% 이상으로 나타났다. 연구소는 지난 10년 동안 시민들의 정치효능감(개인의 정치 참여로 정부와 정치체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신념)을 조사해왔는데, 연구소의 2016년 6월 조사에서 29.0%던 정치효능감은 촛불을 거치며 2016년 12월 53.3%로 올라갔고 2018년 11월 40.0%, 이번 조사에서 46.0%로 집계됐다.
10월10일 공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10월8일 750명 조사,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6%포인트)에서도 서초동·광화문 대규모 시민집회에 대해 61.8%가 “정치권 무능력을 보완하는 국민주권의 발현”이라고 답했다. “국론을 분열시켜 국민통합을 저해한다”는 의견(31.7%)의 약 두 배다.
신진욱 교수는 “지금 대립이 구조적 균열로 고착될 것이라고 속단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앞으로도 이슈에 따라 지금과 다른 갈등 전선이 형성될 수 있고 이는 계속 유동적으로 변할 것이다”라며 거리의 정치가 시민들의 정치 행위 가운데 하나로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금 대규모 집회는 대의민주주의의 보완일 뿐 그 자체를 대체할 수 없다. 시민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서초동과 광화문에 나온 시민들이 각자 의견을 충분히 내보인 만큼, 이를 제도 안에서 수용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것은 다시 청와대와 국회의 몫이다. 검찰과 언론도 대규모 집회에서 터져나온 분노를 흘려보낼 수 없게 됐다. 시민들은 피의사실 공표 논란에 오를 수 있는 ‘검찰발 보도’에 여전히 분노를 터트리고 있다.
비난에 몰입해 출구 못 찾는 정치인
청와대와 국회는 그동안 ‘출구’를 찾기에 ‘소중한 시간’을 날려버렸다. 한 여당 의원은 “출구를 찾아야 하는데 사태가 너무 멀리 와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안 보인다”며 답답해했다. 그동안 여야는 거리로 나온 시민들 목소리를 어떻게 받아안아야 할지 정치적 해법을 모색하기보다는 지지층 결집을 꾀하며 서초동과 광화문 사이 편을 가르는 데 힘을 쏟았다. 10월7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10월5일 촛불집회는) 친문 세력들의 관제 시위다. 문재인 대통령과 친문 세력들이 대한민국을 거대한 인민재판의 소용돌이에 빠뜨리고 있다”고 했고, 같은 날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주말(10월5일) 서초동 촛불집회는 완벽한 촛불시민혁명의 부활이었다. (…) 며칠 전 자유한국당의 광화문 집회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집회였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광화문 집회를 주도한 전광훈 목사가 폭력집회를 유도했다며 내란 선동 및 공동 폭행 교사 혐의로 10월4일 검찰에 고발했고, 자유한국당은 10월8일 조국 장관의 권한 행사가 헌법에 위반된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국회가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고 정치적 해법 대신 고소·고발에 기대고 있다. 내년 총선까지 고려하며 “밀리면 진다”는 인식이 흐르고 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현재는 대의민주주의가 국민으로부터 사실상 신임을 잃은 상태다. 그런데도 여야가 서로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고소·고발에 기대면 지금의 문제가 풀릴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2000년대 이후 촛불의 전통이 있었고, 2016년 이후 태극기가 등장하며 거리의 정치가 확대재생산됐다. 이는 대의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도록 보완하는 순기능 관계를 이루는 것인데, 이번에는 대의민주주의가 기능을 못하면서 직접민주주의도 점점 양극화로 가는 모습이 보인다”고 말했다.
강대강 대치가 계속되면서 서초동과 광화문 양쪽 다 지지하지 않는 이들의 피로감이 높아지고, 두 공간에 서지 못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묻히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조국 수호’와 ‘검찰개혁’을 분리하자는 목소리는 촛불집회가 계속될수록 묻히고 있고, 노동 문제나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푸는 데 써야 할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다는 우려는 SNS 등에서 ‘낡은 시각’이나 ‘현실감각 없는 엘리트주의적 시각’이라는 비판에 시달린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월7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서초동과 광화문 집회에 대해 “대의정치가 충분히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이 들 때 국민이 직접 의사 표시를 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직접민주주의 행위로서 긍정적 측면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홍익표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한국 사회에서는 각각 지금까지 국민의 의견을 대표해야 할 대의기구를 포함한 여러 가지 언론이나 사법기구들이 이제는 스스로 되돌아봐야 할 시점이 된 거라고 생각한다. 국민적 신뢰를 어떻게 회복하고 이런 광장에서의 갈등을 제도권적으로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실제로 한국 대의기구, 대의제도 그다음에 민주주의 제도 전체가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 현재를 진단하는 발언이지만 문제는 문 대통령도 민주당도 현재 사태를 평가하는 것을 넘어 해법을 제시해야 하는 당사자들이라는 것이다. 서초동과 광화문을 가득 메운 이들은 이제 정부와 국회에 ‘다음’을 요구한다.
정부와 국회의 ‘다음’은
청와대와 국회도 시민들 요구에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됐다. 더는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 없는 상황이다. 국회는 ‘여야 정치협상회의’를 꾸려 사법개혁 법안과 선거제 개혁 법안 논의를 다시 진행하기로 했다. 청와대는 10월10일 각각 20만 명이 넘은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촉구(76만여 명)와 반대(31만여 명)에 대한 국민 청원에 “앞으로 국정 운영에 반영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강정수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은 “문 대통령은 ‘남은 과제는 권력기관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고, 국민의 기관으로 위상을 확고히 하는 것을 정권의 선의에만 맡기지 않고 법 제도적으로 완성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 과정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은 ‘공평과 공정의 가치에 대한 국민의 요구, 평범한 국민이 느끼는 상대적 상실감을 다시 한번 절감하였으며, 무거운 마음으로 국민의 요구를 깊이 받들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기득권과 불합리의 원천인 제도까지 개혁해나갈 것이고, 고교 서열화와 대학입시 공정성 등 특히 교육 분야의 개혁을 강력히 추진해나가겠다’고 말했다”고 문 대통령의 말을 대신 전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조윤영 기자 jy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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