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초였을 거예요. 2002년 유방암 절제 수술 받은 일로 군 신체검사에서 불합격되고 헬기 조종 자격을 박탈당했을 때, 제 이야기가 신문 기사로 처음 보도됐어요.”
육군항공학교 학생대장 시절 ‘피닉스’(불사조)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헬기조종사 피우진은 2005년 9월 공중근무 자격을 잃고, 이듬해 11월 강제 전역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뒤 행정소송에서 이겨 1년7개월 만에 복직에 성공했고 2009년 9월에 중령으로 두 번째 군 생활을 마감했다. 유명해진 피우진은 ‘젊은 여군포럼’ 대표를 맡다가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의 첫 국가보훈처장으로 임명됐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파격 인사였다. 그전까지 국가보훈처장은 군단장급 예비역 장성(중장) 출신이 맡았다.
7월24일 서울 용산 서울지방보훈청 사무실에서 피우진 처장(63)을 만났다. 군대에서 다져진 담백한 성품이 금세 느껴졌다. 원칙을 이야기할 때는 눈빛이 달라졌다. 단호했다.
왜 독립과 호국이 끊임없이 갈등하는지벌써 재임 2년이 더 지났다. 소회가 어떤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가보훈처장이 됐다. 2017년 5월17일 임명장을 받고, 다음날 새벽 3시 광주로 출발했다. 5·18 행사 리허설에 참석하는 것이 첫 임무였다. 행사장에서 을 부르는데, 많은 분이 눈물을 흘리더라. 이분들의 아픔이 뭘까, 그동안 왜 노래도 부르지 못하게 했나. 국가가 상처를 더 헤집었던 것 아닌가. 그 자리에서 국가보훈처장의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우리 보훈 가족들의 상처를 두루 보듬는 것, 그게 국가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마음 잊지 않고 2년을 바쁘게 뛰었다.
국가보훈처는 정부 안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부처다. 그만큼 어려움이 적잖을 것 같다.
보훈정책을 둘러싼 환경이 보수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치적인 것이 가장 힘들었다. 오랜 세월 보훈단체를 정치 도구로 삼지 않았나. 보훈단체들도 스스로 국가보훈처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권력화하려는 사고가 뿌리 깊어 잘 바뀌지 않더라. 취임 초부터 보훈단체 개혁에 나섰지만, 아직도 갈등 관계에 있다. 하지만 원칙대로 간다. 어렵지만 가야지. (웃던 표정이 순간 단호해진다.)
보훈정책은 보수와 진보의 정권 변화에 민감하다. 피 처장은 독립, 호국, 민주를 아우르는 통합을 강조하는데.
독립, 호국, 민주는 시기적으로 다를 뿐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고, 전쟁이 터지면서 호국을 했고, 이후 민주화운동을 하지 않았나. 민주화에 나섰던 분들이 일제강점기 때 태어났다면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겠나. 그런데 왜 독립·호국·민주를 이끌었던 분들이 끊임없이 갈등하나. 국가가 반목하게 하고 서로를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서로 인정하고 예우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 국가보훈처장인 내가 할 일이다.
서로 인정하자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행사장에서 군가를 부르다가, 어떨 때는 눈물이 난다. 보훈단체 분들과 대화하다가 저분들이 왜 저럴까, 누가 저렇게 만들었을까, 뭉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서로 인정하는 세상으로 가는 길이 아직 멀다. 앞으로 좀 나아가다 갈등의 골로 다시 빠져든다. 역시 정치적 문제가 풀기 어렵다. 정부가 보훈 대상자를 정책의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보훈 대상자가 국민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보훈처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3월에는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주도로 피 처장 해임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청와대에 제출하기도 했다. 탄원서는 첫 번째 해임 사유로 “피 처장은 보훈단체 주관 행사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부분에 대해 피 처장은 “취임 초기 상이군경회 행사가 다른 중요한 행사와 겹쳐 불가피하게 차장을 대신 보내려 했더니 오지 말라고 한 것”이라고 간단하게 언급했다. 상이군경회가 피 처장 공격에 나선 진짜 배경은 보훈단체 개혁을 둘러싼 갈등에 있었다. 탄원서에서도 “보훈단체들의 과거 잘못된 부분을 침소봉대해 적폐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피 처장이 출범시킨 보훈혁신위원회를 비난했다.
보훈정책의 패러다임 변화를 이끌고 있다. 쉽게 설명해달라.
이제는 보훈 대상자가 보훈정책의 중심이자 목적이 돼야 한다. 보훈단체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더 이상 군림하지 말고 교량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국가가 일일이 보훈 대상자를 돌볼 수 없으니, 단체가 중간 다리 구실을 해야 한다. 상이군경회나 고엽제전우회나 특수임무유공자회나, 그 이름 앞에 ‘대한민국’을 꼭 붙인다. 왜 그런가. 그 단체의 회원분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분들과 보훈단체는 존경받아야 한다. 그렇게 가야 하는데, 과정이 쉽지 않다.
이 반년 넘게 보훈단체들의 일탈을 집중적으로 파헤쳐왔다. 그 탐사기획 보도 문패를 ‘전우회를 전우의 품에’로 붙인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올해 초부터 보도되는 기사를 다 챙겨 보고 있다. 그게 바로 ‘보훈 대상자 중심의 보훈정책’, 내가 생각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다.
보훈단체들이 연 1천억원대 수익사업을 벌였다. 그런데 그 혜택이 회원들한테 돌아가지 않았다. 수익사업의 투명성 확보가 보훈단체 개혁의 핵심인 것 같다.
보훈처의 개혁도 거기에 힘을 쏟고 있다. 수익사업 이익금을 투명하게 배분하지 않는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 태스크포스(전담팀)를 구성해 위법 또는 불법 사례를 조사하고 감사했다. 눈에 띄는 효과도 나온다. 구체적으로, 상이군경회 인천폐기물사업소의 사업은 취소시켰다. 제도적으로 보완할 것은 보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반발이 적지 않다.
투명성과 함께 보훈단체의 민주성 확보가 큰 과제다.
보훈단체가 지금처럼 1인 단체로 가서는 안 된다. 세 가지 구체적인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첫째는 회장 1인 중심의 임원 선출 방식 개선을 포함한 단체 운영의 민주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둘째는 회원들에게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는 것, 셋째는 단체 임직원과 회원의 책임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표준 정관을 마련해 보훈단체에서 채택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보훈단체 일탈을 취재하면서, 단체 간부들의 잘못도 크지만 정권 차원의 비호와 동원이 더 근본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다. 보훈단체에는 아직도 정권과 유착하는 것이 몸에 밴 분들이 있다. 더는 정부가 보훈단체들을 비호해 정치적 이익을 도모해서는 안 되고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없다. 문재인 정부는 그분들을 동원하는 대상이 아니라 섬기는 대상이라고 여긴다.
회원(보훈 대상자)들의, 회원들에 의한, 회원들을 위한 보훈단체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보훈단체의 투명성과 민주성을 확보하자는 것. 이러한 ‘피우진 개혁’의 방향성은 분명해 보인다. 부분적인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보훈단체의 변화를 기대하는 이들 사이에 “속도가 더디다”거나 “이러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다. 이들은 보훈단체 수익사업을 전면 폐지할 것, 검찰에 보훈단체 비리 수사 전담반을 설치할 것, 회장 직선제 등 민주적 선출제도를 도입할 것 같은 더욱 과감한 개혁을 요구한다.
개혁의 방향은 제대로 가고 있나.
보훈정책을 혁명적으로 확 바꿀 수는 없다. 잘못의 뿌리가 깊어 단숨에 뽑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뚜렷한 기조를 세워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큰 목소리로) 내가 있는 동안은, 불안해하지 말라고 해라.
왜 그리 어려운가.
어쩌면, 가다 서다 가다 서다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보훈단체들은 오랫동안 자기들이 있기에 보훈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했다. 보훈처 위의 보훈단체로 군림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보훈 대상자를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다 피우진이란 사람이 와서 이건 아니라고 외치니까 반발하는 것이다. 이제는 보훈 대상자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돼야 한다. 다만, 보훈 대상자가 중심이 되는 변화 역시 보훈단체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한계다. 보훈단체들이 보훈 대상자를 제대로 섬겨본 경험이 없지 않나. 보훈 대상자가 변화를 체감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보훈처는 보훈단체 수익사업의 불법성을 찾아내고, 제도적으로 투명성을 확보하도록 하고, 회장 선출의 민주성을 확보하도록 하는 것, 이런 일에 집중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업에서 피해 입은 사람들에 대한 대책까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길이 있는지 의논해봐야겠지만 뾰족한 해결책을 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생각이 복잡하지 않다, 잘 웃는다”작고 깡마른 체구다. 건강은 어떤가. 나름의 기백이랄까 파이팅은 어디에서 나오나.
다들 건강 걱정을 하는데, 문제없다. 행사 참석이 워낙 많아 수면 부족으로 살이 좀 빠졌을 뿐이다. 내가 이래 봬도 태권도 고단자다. 중·고등학교 다니면서 태권도를 배울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태권도 사범님이 여학생들한테 청소를 시키고 여성을 비하하는 욕을 마구 했다. 그때 참다못해 나섰다. “태권도의 ‘도’자가 무슨 뜻이냐. 우리는 운동 배우러 왔다. 왜 욕을 하나”라고 대들었다. 고집 센 그대로, 원칙대로 살아왔다. 보훈정책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보훈 대상자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 안 되고,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그것 말고, 나 개인이 하고 싶거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없다. 나는 생각이 복잡하지 않다.
길이면 가고,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바보처럼, 늘 웃는다. 하지만 원칙에서 벗어나면 용납 못한다. 타협이 없다. 그런 것이 좀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개적으로 웃는 모습을 잘 못 봤는데.
보훈처라는 게 추모 행사가 많다보니 그랬을 거다. 원래 잘 웃는다. 지금처럼. (웃음)
피 처장은 최근 손혜원 의원 부친의 국가유공자 지정과 관련해 부정 청탁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기도 했다. 7월18일 최종적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에 대해 피 처장은 “보훈 업무라는 게 힘있는 사람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안 되고, 그런 업무가 아니다”라고 원칙적인 답변을 했다. 예민한 정치 이슈인 약산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을 피했다. 대신 “보훈은 안보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미래”라는 자신의 메시지를 강조했다. 취임 첫 기자회견에서 내놓았던, 피 처장의 일성이었다.
“보훈 대상자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잖아요. 국민이 진정으로 그분들을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도록 보훈단체가 중심 역할을 해야지요. 보훈처에서는 보훈 대상자가 존경받을 수 있도록, 국민의 사랑을 받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보훈처가 그 길을 열 수 있도록, 잘 이끌겠습니다.”
김현대 기자 koala5@hani.co.kr·하어영 기자 haha@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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