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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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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6월 6가지 질문

‘송환법’ 반대 시위 승리로 이끈 200만 홍콩 시민,

그들은 어떻게 모이고 미래에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킬까
등록 2019-06-24 01:37 수정 2020-05-02 19:29
6월16일 홍콩 시민들이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의 사퇴와 범죄인 인도 조례 철회를 요구하며 시위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6월16일 홍콩 시민들이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의 사퇴와 범죄인 인도 조례 철회를 요구하며 시위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홍콩인들이 새 역사를 썼다. 6월9일 100만 명, 16일엔 200만 명이 거리로 나서 자신들의 의지를 명백히 선언했다. 시민들을 “폭도”로 비난하며 ‘범죄인 인도 조례’(송환법) 입법을 강행하려던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법안 보류를 선언하고 두 차례 사과했다. 하지만 법안의 완전 철회와 사임은 거부했다. 홍콩인들의 ‘승리’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으며, 홍콩과 중국의 미래에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키게 될까? 세계를 뒤흔든 홍콩인들의 6월이 남긴 6개 질문을 다시 짚어봤다.

1. 홍콩인들은 왜 ‘송환법’에 분노했나?

홍콩은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20개국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었지만, 중국과는 맺고 있지 않다.

중국 후원을 받아온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중국 등에도 범죄인을 인도할 수 있는 조례를 만들려 했다. 대만으로 여행을 떠났던 20살 여성이 살해되고 용의자로 지목된 홍콩인 남자친구가 홍콩으로 돌아온 사건의 해결을 내세웠지만, ‘언제라도 중국으로 송환돼 처벌될 수 있다’는 의미는 홍콩인들에게 분명했다.

중국 정부가 ‘일국양제’ 약속을 지키지 않고 특별행정구인 홍콩의 특징을 지우고 강압적으로 통제하려 한다는 불안감은 점점 더 홍콩인들을 억눌러왔다. 중국 공산당에 비판적인 내용의 책을 팔았던 서점 주인 5명이 2015년 10~12월 영장 없이 ‘납치’당해 중국으로 끌려가 구금된 사건은 트라우마로 자리잡았다.

조지 오웰의 소설 에 나오는 감시·공포 사회를 닮아가는 중국 현실은 홍콩인들의 공포를 더욱 키웠다. 시진핑 국가주석 집권 뒤 중국 당국은 사회 안정을 내세워 감시카메라와 안면 인식 기술, 빅데이터를 이용해 놀랄 만큼 정교한 감시사회를 구축했다. 100만 명 넘는 위구르인들이 ‘재교육 캠프’에 갇혀 있고 인권운동가, 변호사, 독립적 노조를 세우려던 노동자와 이들을 도우려던 대학생들이 구금되거나 실종됐다.

법이 통과되면 천안문(톈안먼) 추모 시위를 조직해온 사람들, 반체제 인사를 지원해온 이들, 중국 노동·인권 운동을 지원해온 홍콩 활동가들도 ‘국가안보 위협 세력’으로 지목돼 언제든 중국 본토로 끌려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결국 홍콩인들은 이번이 홍콩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으로 거리로 나섰다.

2. ‘우산혁명’은 이번 시위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돌아보면, ‘우산혁명’이라는 분수령이 있었다. 2014년 홍콩인들은 오랫동안 요구해온 행정장관 직선제가 ‘중국 정부가 승인한 후보들만의 선거’로 변질된 데 항의해 79일간 홍콩 중심부를 점거하고 직선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홍콩 청년들, 학생들이 중심이었다. 당시 정무사장(정무장관)이던 캐리 람은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고 시위 참여자 1천여 명을 체포했다. 이 강경 진압의 ‘공로’로 그는 중국 정부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행정장관이 되었다.

람 행정장관은 취임 뒤 국가보안법 재추진, 중국 국가 모독자를 처벌하는 ‘국가법’ 제정 추진 등을 밀어붙였다. 페이스북에서 ‘홍콩 독립’을 주장한 글을 근거로 정당 활동을 금지했다. 우산혁명 지도부들은 체포됐고 일부는 망명했으며, 패배감과 절망감만 짙어졌다.

하지만 올해 6월 우산혁명은 새롭게 진화했다. 우산혁명 시위가 젊은 학생들이 중심이었다면, 이번 시위는 학생과 운동가에 국한되지 않았다. 교수, 작가, 전직 정부 관리, 종교계, 재계, 주부, 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모까지 홍콩 사회의 전 계층이 현실을 바꾸러 나섰다. 우산혁명의 한계를 교훈 삼아, 한층 더 각성하고 성장한 공동체 의식이 등장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3. 200만 시위는 어떻게 ‘조직’됐나?

‘민간인권전선’이라는 조직이 이번 시위를 제안했지만 200만 명의 참가는 주최 쪽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규모였다. 시위는 공식 지도자나 단일한 조직 없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자발적으로 나선 시민들로 예상치 못한 규모를 실현했다. “누구도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이번 시위를 상징하는 구호였다. 사람들은 페이스북과 텔레그램 등을 통해 소식을 주고받고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캐리 람 행정장관이 시위를 “조직화된 폭동”으로 규정하고, 경찰이 비무장한 시위대를 향해 곤봉을 휘두르고 고무탄을 발사하자, 시민들은 분노했고 시위대에게 공감은 커졌다. 시민들은 “우리는 폭도”가 아니라는 손팻말을 들었고, 부모들은 ‘더는 아이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며 나섰다. 식당 등 가게 주인들은 무더위 속에 거리를 행진하는 시민들에게 물과 얼음을 건넸다. 평소 거리감을 느끼던 본토 출신 이주민들에게도 함께 싸우자며 손을 내밀었다.

우산혁명 시위자들이 탄압받았던 사례를 학습한 이번 시위 참가자들은 중국 정부의 최첨단 감시 시스템에 맞서 신분 노출을 피하는 방법도 개발했다. 마스크와 고글은 최루탄을 막고 얼굴을 가리는 이중 용도로 쓰였다. 시위 참가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교통카드를 쓰지 않고 일회용 승차권을 사서 썼다.

4. 홍콩의 법치와 민주는 영국 식민지 유산인가?

1840년 아편전쟁의 결과 1842년에 맺은 난징조약을 근거로 155년 동안 계속된 영국의 홍콩 ‘식민통치’는 결코 민주적이지 않았다. 영국 식민정부는 홍콩인을 2등 시민으로 차별했다. 의회 격인 입법의회는 영국인들이 독점하다가 1960년대 이후 부유한 소수의 중국계 사업가들을 의원으로 임명했다. 홍콩인들은 식민정부에 오랜 저항운동을 벌였는데, 크게 중국 공산당의 지지를 받는 마오주의자와 홍콩 독자 노선을 주장하는 그룹으로 나뉘었다. 친중국 마오주의자들은 1967년 5월에서 10월까지 홍위병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홍콩인들의 외면을 받은 이들은 이후 중국으로 돌아가 친중국계 정치세력으로 재등장했다. 홍콩 독자 노선의 운동가들은 민주파 정치세력의 중심이다.

식민정부와 유착했던 재계는 이제 중국 정부나 친중국 홍콩 정부와 밀착했고, 거대한 중국 시장과 자본으로 더욱 큰 부를 소유하게 되었다.

캐리 람 행정장관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캐리 람 행정장관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5. 중국과 어떤 관계를 맺을까?

홍콩은 이민자의 도시다. 영국 식민통치 시기부터 중국 각지에서 홍콩을 향해 여러 세대의 이민자와 난민이 이주해 새로운 삶을 일궜다. 홍콩인들은 오랫동안 더 나은 홍콩뿐 아니라 더 나은 중국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1989년 베이징 천안문을 비롯한 중국 여러 도시에서 시위가 벌어졌을 때도 홍콩인들은 대륙의 시위대를 지원하는 활동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당시 홍콩에서는 150만 명이 참가한 천안문 지지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1989년 6월4일 중국 당국의 천안문 유혈 진압은 홍콩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고, 홍콩인들은 매년 6월4일이 되면 천안문 추모 시위를 열어왔다.

오랫동안 홍콩 시민단체들은 중국 대륙에서 노동자를 지원하고 중국 시민사회에 힘을 보태왔다. 홍콩은 중국과 세계를 잇는 다리였고, 개혁·개방 초기 대륙의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홍콩 화교자본은 세계 자본주의체제와 중국을 연결해주는 고리였다. 비록 지금 중국 대륙에서 자유와 민주가 완전하게 실현될 수는 없더라도 홍콩은 중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대안적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다. 특히 1997년 홍콩의 중국 복귀 이후 10년 동안 중국 당국은 홍콩 민심에 귀 기울이는 태도를 보였고, 홍콩인들 사이에 중국에 대한 공감과 중국인이란 정체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우산혁명이 좌절한 이후 ‘우산세대’가 등장했다. 이들은 중국에 분노했고 부모 세대보다 훨씬 비판적이었다. 중국인이 아니고, ‘홍콩인’이라는 정체성도 높아졌다. 격앙된 일부 청년은 중국 대륙인들을 비하하고, 광둥어나 영어를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시민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중국 대륙인 혐오를 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중국인을 비롯해 홍콩 내 소수자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홍콩인들의 ‘자주’를 고민하는 성숙한 목소리도 나왔다.

홍콩 전문가인 장정아 인천대 교수는 “이번 시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타도 중국 공산당’이나 ‘반중’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니다. 시민들을 묶어준 공통된 정서는 중국을 향해 ‘이게 우리의 마지노선이니, 우리 목소리를 듣고 우리 의견을 존중하라’는 요구였고, ‘우리 자녀 세대가 이 정도 자유도 없이 사는 것은 견딜 수 없다’는 목소리였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홍콩인들은 처음으로 시민들의 목소리로 변화를 만들어냈다는 데 감격하며, 갈 길이 멀지만 이번 승리의 경험이 전환점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6. 6월 혁명의 미래는?

예인충 링난대학 문화연구과 조교수는 홍콩의 진보 언론 (theinitium.com)에 기고한 글에서 “지난 10년 동안 죽음 또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정서는 홍콩인의 정체성 논쟁의 주제였다”면서 이번 시위의 작은 승리를 계기로 더 이상 절망하지 말고 홍콩이라는 공동체를 키워내자고 호소한다. 그는 “이번 시위에서 ‘홍콩인’이라는 정체성은 모두를 단결하게 하는 우산이 되었다”며 “SNS 등을 통해 모인 이들이 곁에서 시위하고 행진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차이를 내려놓고 서로를 지지한 것은 모두가 홍콩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고 했다.

그는 “큰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더 잘 성장해야 한다”며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 정치개혁의 가망이 없는 가운데, 우리는 어떤 개혁의 힘을 길러야 하나? 적은 사악하고 우리는 정의롭다는 논리 외에 어떤 도덕적 기초를 추구해야 하나? 권력자와 거리에서 충돌하는 것 외에 권력자와 어떻게 상호작용할 것인가?

그는 6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이번 시위에 나섰던 사회운동가 친구가 “아들이 이렇게 어린데 이런 사회를 마주하게 되다니, 이 아이 세대는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회상하면서 이렇게 답한다. “자신감을 가지고 아이와 홍콩의 시간을 키우면서 서로 용기를 북돋으며 힘을 내자고.”

박민희 통일외교팀장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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