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국회를 바꿀 때다
① 표심 왜곡하는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바꾸자
그런데 현재 쌓인 적폐만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근본적으로는 이런 상황을 허용한 한국의 정치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은 노동·여성·환경 등의 분야를 망라한 264개의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정치개혁 공동행동’과 함께 한국 사회에서 적폐를 청산할 수 있는 ‘비결’인 선거제도 개편 기획을 총 3회에 걸쳐 연재한다. 내가 던진 표가 ‘사표’로 돌아오는 현재의 소선거구제 대신 ‘민심 그대로’ 의석수가 반영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는 것이 골자다. 1회에선 지난 9년 동안 30~40% 지지율로 과반 의석수를 차지한 채 각종 악법을 처리해온 한나라당과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의 행태를 꼬집고 한국 정치에 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이 필요한지 분석했다. _편집자
2009년 7월22일은 ‘민주주의가 죽은 날’로 일컫는다.
이날 집권여당인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아침 일찍 국회 본회의장으로 몰려가 국회의장석을 점거했다. ‘날치기’를 위해서였다. 등 보수언론이 종합편성채널(종편)을 만들 수 있게 길을 터주는 ‘미디어법’을 강행 통과시키는 게 주목적이었다. 한나라당 출신인 김형오 당시 국회의장은 “더 이상 (여야) 협상은 무의미해졌다”며 여당 뜻에 따라 직권상정을 강행했다.
득표율 37.5%로 153석 얻은 한나라당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결사 항전에 나섰다. 민주당 의원들은 “(미디어법이 통과된다면) 18대 국회는 더 이상 의미가 없고 문을 닫는 편이 국가와 국민의 장래를 위해 더 낫다”고 호언장담했다. 민주당 의원들과 보좌진들은 본회의장 주변을 소파와 집기류로 막고, 출입문에는 쇠사슬을 걸어 나머지 한나라당 의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나 한나라당 보좌진과 격렬한 몸싸움 끝에 결국 저지선이 뚫렸다. 충돌 과정에서 일부 야당 의원들은 부상을 입고 실신해 119 구급차에 실려갔다. 본회의장 안에서도 몸싸움은 계속됐다. 날치기를 막기 위해 의장석으로 돌진하던 야당 의원들은 이미 단상을 점거한 여당 의원들에게 번번이 밀려났다. 여당 의원들에게 사지를 들려 질질 끌려나오는 야당 의원도 있었다.
미디어법은 결국 통과됐다. 첫 투표에서 의결정족수가 부족해 재투표를 하고,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찬성 버튼을 누르는 등 절차 위반 문제가 있었지만 한나라당은 결국 ‘몸으로’ 이 법을 밀어붙였다. 재석 의원 153명, 찬성 150명, 기권 3명이었다. 겨우 과반 의석으로 법안이 통과됐다. 당시 한나라당의 의석수는 153석. 집권여당의 의석수가 절반을 넘지 않았다면 미디어법 날치기는 불가능했다.
의석수 왜곡하는 소선거구제153석. 주목할 것은 바로 이 의석수다. 2008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전체 의석수(299석)의 과반수(153)를 차지한 것은 유권자들의 의사가 아니었다. 당시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37.5%에 불과했다. 이 지지율을 그대로 의석수로 환산하면 한나라당의 의석수는 112석이 되어야 한다. 112석으로는 어떤 법안도 날치기 처리할 수 없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37.5% 지지율로 국회 단독 과반수인 153석(51%)을 얻어 여러 법안을 강행 통과시켰다. 미디어법뿐 아니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4대강 사업이 반영된 예산안 등이 격렬한 몸싸움 끝에 한나라당 뜻대로 통과됐다.
법안 날치기가 이후 한국 사회에 어떤 폐해를 가져왔는지는 잘 알려졌다. 미디어법 통과 뒤 2011년 첫 방송을 한 「TV조선」과 「채널A」 등은 6년 동안 막말·편향 보도, ‘약탈적’ 광고영업 등의 비판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동안 공공성이 훼손된 KBS와 MBC 문제까지 더해져 방송의 균형추는 심각하게 기울었다. 특히 대선이나 총선 등 주요한 선거 국면에서 종편의 불공정 보도가 급증했다는 언론학계의 연구 결과도 공개됐다. 이명박 정부가 밀어붙인 4대강 사업도 결국 22조원이라는 막대한 예산만 낭비한 채 멀쩡하던 강을 ‘녹조라테’로 만들어버리는 비극으로 끝났다. 물고기가 죽어갔고, 강 주변 농민들은 쫓겨났다. 망가진 4대강을 원상태로 복구하는 데 또 얼마나 많은 예산과 노력이 들어갈지 쉽게 예상할 수 없다.
박근혜 정부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2년 국회선진화법이 도입되면서 일상적인 ‘날치기’는 거의 사라졌지만, 과반 의석(152석)을 차지하던 집권여당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의 힘은 여전히 강했다. 국회선진화법에는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요건을 강화해 ‘날치기’를 막는 장치가 있다. 법안을 본회의에 부치기 위해 여야 합의를 필수 사항으로 넣었고, 그 밖의 천재지변이나 전시에 준하는 국가적 비상사태에만 직권상정이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그 장치다. 그러나 2016년 3월 통과된 ‘테러방지법’만큼은 예외였다. 새누리당 출신 정의화 당시 국회의장은 이슬람국가(IS)와 북한의 테러 위협을 빌미로 현재 상황은 “국가 비상사태”라며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 의원 38명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총 192시간27분 동안 필리버스터(의사 진행 방해)를 진행해 이를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국가정보원의 권한을 키우는 내용의 ‘테러방지법’은 통과됐다.
우린 다시 한번 당시 의석수를 주목해야 한다. 152석. 새누리당이 가진 이 과반 의석도 민심이 반영된 결과물이 아니었다.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42.8% 지지율을 얻었다. 지지율대로라면 새누리당의 의석수는 128석이어야 했다. 그러나 승자독식 체제인 현행 소선거구제로 인해 새누리당은 40% 초반의 득표율로 과반 의석수를 차지했다. 이를 최대한 활용해 ‘힘으로’ 테러방지법을 통과시켰다. 수에서 밀리는 야당은 박근혜 정부 내내 정부와 여당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 이 상황은 2016년 4월 총선에서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될 때까지 지속됐고, 결국 2016년 말 희대의 ‘박근혜 게이트’가 터져나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동안 정부와 집권여당(현 자유한국당)이 벌여놓은 여러 적폐는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켜켜이 쌓여 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부터 이들이 쌓아놓은 적폐를 청산하는 데만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어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 문재인 정부는 공공성을 상실한 미디어 환경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정치화된 국정원을 탈바꿈하려는 개혁 등을 전방위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이 작업이 끝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아직 알 수 없다.
적폐 못 쌓는 정치 환경 만들자지금 한국 정치는 중요한 기로에 놓였다. 문재인 정부 집권 초기인 현재, 지난 9년간 쌓인 적폐를 청산하느냐 못하느냐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러나 정치권 안팎에선 적폐 청산만큼 중요한 것은 ‘애초 적폐를 쌓을 수 있게 만든 정치 환경을 바꾸는 것’이라는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정권 교체’를 이뤘으니 이제 ‘정치 교체’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정치 교체의 첫 개혁이 바로 선거제도 개편이다. 만약 2008년과 2012년 총선에서 정당 지지율을 100% 반영해 의석수가 배분되는 선거제도가 작동했다면 30~40% 지지율을 얻은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은 지금 같은 적폐를 만들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이제라도 민심 그대로 의석 배분을 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자칫 어려운 개념 같지만 사실 간단하다. 예를 들어 A당이 총선에서 10%를 득표하면 전체 의석수 300석 가운데 10%의 의석수, 즉 30석을 가져가도록 하자는 것이다.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병행하는 한국의 상황에 빗대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한국 유권자는 총선에서 자신의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에게 1표를 주고, 지지하는 정당에 1표를 준다. 전체 의석 300석 가운데 절대다수인 253석이 지역구에서 확정된다. 그러다보니 정당 지지율과 관계없이 무조건 지역구에서 인기 있는 후보를 많이 배출하는 정당이 선거에서 이긴다. 힘있는 거대 정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조다. 소수 정당은 아무리 정당 득표율이 높아도 의석수를 상대적으로 적게 가져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지역구가 아닌 정당 투표를 기준으로 의석수가 배분된다. 예를 들어 A정당이 지역구에서 의원 30명을 당선시켰고 정당 지지율 20%를 얻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정당 지지율(20%)에 따라 A정당의 의석수는 60석(전체 의석 300석 기준)으로 정해진다. 지역구에서 뽑힌 30명이 있으니, 나머지 30명을 비례대표의원으로 채우는 것이다. 이번엔 B정당이 지역구에서 의원 60명을 당선시키고 정당 지지율은 A정당과 똑같이 20%를 얻었다고 가정해보자. B정당도 A정당과 똑같이 60석만 가져간다. 대신 B정당은 이미 지역구 의원으로 60석을 다 채웠기 때문에 비례대표의원은 1명도 가져갈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지역구에서 얼마나 많은 의원을 당선시켰는지에 관계없이 정당별 득표율에 따라 의석수가 배분될 수 있다. 현재 독일이 이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다수당의 횡포는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한 정당이 과반수의 정당 득표율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한 정당이 총득표수 기준으로 과반표를 확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와 동시에 소수자를 대변하는 신생 정당이 국회에 입성하는 게 상대적으로 쉬워지기 때문에 정당 구도는 자연스럽게 다당 체제로 변해간다. 다당제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은 진보·중도·보수 세력이 각각 비슷한 비율의 의석을 차지해 누구도 혼자 집권할 수 없도록 균형을 이루는 형태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협의가 강제되고 정권을 차지하려면 반드시 여러 이념 세력의 연대를 통해 연합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당이 횡포를 부릴 수 없는 정치체제가 형성되는 것이다.
‘뼛속까지 다당 체제’가 정치 안정성 높인다선학태 전남대 교수(정치학)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지금 같은 다당 체제가 아니라 이념적 스펙트럼이 비교적 선명하게 분화된 다당 구도가 설정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연합정치가 이뤄진다. 뉴질랜드도 한국처럼 소선거구제였다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꾼 뒤 이런 정치 시나리오가 현실화됐다”고 말했다.
물론 한국에서도 국회 안에 3~4개 당이 늘 존재해왔다. 그러나 거대 두 당이 의석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소수에 불과했다. 두 거대 정당은 그동안 지역구 당선자 수를 늘리는 데 골몰해 정책보다는 인물, 협의보다는 갈등 중심의 정치를 이끌어왔다. 정책을 중심에 내세우는 정의당 같은 정당은 여전히 원내 교섭단체도 꾸리지 못하는 소수 정당으로 남아 있다. 물론 2016년 총선에선 어느 정당도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않은 명실상부한 다당 구도가 형성됐다. 구도만 놓고 보면, 자연스럽게 협치를 해야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갈등 중이다. 갈등을 벌여야 상대를 죽이고 다음 선거에서 국회 내 과반 의석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정당 처지에선 지역구에서 의석수를 늘리는 것보다 정당 지지율을 높이는 게 유리해진다. 자연스럽게 갈등을 키우기보다 정책 중심 정당으로 혁신을 꾀하게 된다. 유권자도 자기 표가 사표가 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대세’에 따르기보다 ‘소신’에 따라 투표한다. 여성·청년·노동자 등 수는 많지만 정치적으로 과소 대표돼온 이들도 자신들만의 정치세력을 만들기 쉬워지고, 지금보다 훨씬 쉽게 국회 문턱을 넘을 수 있다. 지금처럼 ‘무늬만 다당 체제’가 아닌 ‘뼛속까지 다당 체제’가 형성되는 것이다.
한국식 정치 갈등 구도에 익숙해진 이들은 다당 체제가 지속 가능한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세계은행에서 발표하는 정치안정지수를 보면, 다당제 국가들이 정치 안정성이 높고, 양당제 국가들이 오히려 불안하게 나타났다. 2014년 순위를 보면 양당제 국가인 대한민국의 정치안정지수는 191개국 중 84위, 미국은 60위에 그쳤다”고 말했다. 한국 정치가 불안정하게 유지돼온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두 거대 정당이 지배해온 양당제라는 결론이다.
정치권 안팎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기 위한 논의가 조금씩 시작되고 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내용으로 하는 선거제도 개혁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100대 과제에도 포함돼 있다. 국회에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논의할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구성돼 지난 8월21일 첫 회의를 열었다. 정개특위 위원장인 원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8월24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 필요성을 설명했다.
264개 시민단체 목소리 모았다시민들의 참여도 이어진다. 지난 6월8일 국회 정론관에서는 선거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단체 모임 ‘정치개혁 공동행동’(공동행동)이 발족 기자회견을 열었다. 공동행동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 양대 노총과 참여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한국여성단체연합, 각 지역 환경단체 등 노동·환경·여성을 포괄한 264개 시민단체가 연대해 만든 모임이다. 공동행동은 연동형 비례제표제 도입을 뼈대로 하는 ‘민심 그대로 선거제도 개혁’과 ‘여성정치 확대’ ‘참정권 확대’ 등 3대 의제를 내걸고 대국회·대국민 활동에 들어갔다.
정부, 정치권, 시민사회 모두가 움직이고 있다. 한국식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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