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할 것인가, 감시당할 것인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국가정보기관의 권한과 개혁을 놓고 벌어진 오랜 논쟁의 주제다. 30여 년 호시절을 누린 군부정권이 막을 내리자,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대공 업무를 명분으로 점해온 국내 정보 수집 및 사찰 권한을 유지·확대하려 했다.
국가정보원(국정원·옛 안기부)은 그 입지가 구석으로 몰릴 때마다 간첩 조작·정치 공작을 통해 복권을 시도했고 그 결과 또다시 개혁의 도마 위에 오르는 일을 자처해왔다. 은 1994년 3월 창간부터 그 한복판에서 국정원과 힘겨운 줄다리기를 벌였다. 역대 기사들을 통해 그간 ‘줄다리기’의 역사를 살펴본다.
1994~96년 위기의 국정원, 간첩 조작문민정부 출범 이후 안기부는 코너에 몰렸다. 전신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정치 공작·불법 사찰·인권 탄압의 요새로 역할했던 안기부를 향해 정치권은 권한 축소를 요구했다. 결국 그간 간첩 조작 등에 악용되어온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와 불고지죄에 대한 안기부의 수사권을 박탈하는 내용의 안기부법 개정안이 1993년 국회에 발의됐다.
그러나 안기부는 반격을 노렸다. 같은 해 9월 안기부는 반핵평화운동 활동가 김삼석씨와 백화점 직원 김은주씨 남매를 간첩 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은 그 배후를 추적했다.
다음달 제34호(1994년 11월17일치)는 ‘‘남매 간첩’ 배후는 안기부였다’는 제목으로 김씨 남매의 간첩 혐의를 조작하는 데 핵심적으로 관여한 안기부 프락치 백흥용씨의 독일 베를린 양심선언을 보도했다. 안기부법 개정을 앞두고 안기부가 간첩 사건을 조작한 정황이었다. 당시 기사의 첫 대목은 이렇다.
증언대로라면 3류 스파이영화의 모든 것을 갖추었다. 그러나 증언이 사실이라면 현실은 ‘드라마’보다도 훨씬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남매가 구속돼 간첩으로 대법원에서까지 확정실형 판결을 선고받았고, ‘지시’에 따라 그 일을 수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생명의 공포를 느껴가며 조국을 떠나 망명의 길을 선택했다. 아직도 많은 부분은 장막 속에 감춰져 있지만 독일까지 날아가 이 사건을 조사한 변호사는 “이것은 안기부가 프락치를 만들어내 조작한 간첩 사건이다”라고 확언했다.안기부의 ‘복권’ 시도는 그칠 줄 몰랐다. 제93호(1996년 1월25일치)는 ‘간첩 조작 실패했다?’란 제목으로 당시 전국연합 사무차장 박충렬씨 등 재야 인사들의 간첩 혐의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앞서 안기부는 박씨에게 새 무전기를 전달하기 위해 남파됐다는 간첩 김동식씨를 생방송 기자회견에 내세워 이들의 간첩 혐의를 발표하도록 했다. 4월 총선을 앞둔 시점이었다. 하지만 검찰조차 이들을 기소하면서 증거 부족으로 간첩 혐의를 적용하지 못했다. 1심 법원은 국가보안법상 다른 혐의들에 대해서도 모두 무죄로 판결했다.
권한 축소의 위기 때마다 국정원이 ‘간첩 사건’을 발표하고, 은 이를 추적하여 ‘간첩 조작 사건’임을 폭로하는 줄다리기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1997년 ‘북풍’ 공작과 정치 개입안기부에도 기회가 찾아왔다. 김영삼 정부는 1996년 8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연세대 사태를 기점으로 공안 정국을 더욱 강하게 몰고 갔다. 여당인 당시 신한국당(현 새누리당)은 안기부 수사권 확대를 위한 안기부법 개정안 마련에 발벗고 나섰다.
이에 은 제126호(1996년 9월19일치) ‘공안세력, “우리의 목표는 섬멸!”’ 기사와 제140호(1997년 1월9일치) ‘누가 공룡 안기부를 원하는가’ 기사 등을 통해 안기부 수사권 확대 시도를 비판했다. 1996년 12월 노동법과 함께 안기부법 개정안은 날치기 통과됐다. 1993년 박탈당한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와 불고지죄에 대한 안기부의 수사권이 회복됐다.
자신감을 얻은 안기부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북풍’ 공작에 나섰다. 당시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 고문이었던 오익제씨 월북 사건을 뒤늦게 터뜨리고 이를 ‘기획입북’이라고 주장한 야당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제173호(1997년 9월4일치)는 안기부의 정치 공작을 다뤘다. ‘안기부 앞세워 대선 돌파한다’는 제목의 특집 기사에선 안기부의 국내 정보 수집 오·남용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안기부는 대선을 2주 앞두고 다시 한번 북풍 공작에 나섰다. 오익제씨가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 내용의 편지와 연설을 공개하고, 김 후보가 북한 김정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내용으로 재미동포 윤홍준씨의 기자회견을 기획했다.
집권여당이 권한을 강화해주면, 그 권한으로 야당을 탄압하는 정치 공작을 벌이는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1~2007년 테러방지법 시도, 정치 개입 지속안기부가 북풍 공작으로 공격한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 안기부는 또다시 개혁의 도마 위에 올랐다. 김대중 정부는 취임 직후 안기부의 개명을 추진했다. 1999년 1월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불법 사찰과 정보 정치의 오명을 벗고 국가정보기관으로서 소임을 다하겠다는 다짐과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러나 국정원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2001년 미국 뉴욕에서 9·11 테러가 벌어진 직후, 국정원은 전세계적 반테러 정세의 여세를 몰아 ‘테러방지법’을 입법예고했다. 2002년 3월 임시국회를 앞두고 은 제400호(2002년 3월13일치)에서 ‘국정원의 장난, 테러방지법’이란 제목의 기사를 썼다.
당시 테러방지법 역시 ‘테러’ 개념을 ‘정치적·종교적·이념적 또는 민족적 목적을 지닌 개인이나 집단이… 국가안보 또는 외교관계에 영향을 미치거나 중대한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는 행위’로 포괄적이고 모호하게 규정해 비판을 샀다. 이런 개념 규정이 국정원의 정보 수집·수사권 남용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는 점, 기존 형법, 항공법, 유해화학물질관리법 등으로 테러 행위 처벌이 가능하다는 점도 지적됐다. 마치 14년 뒤인 오늘을 예고하는 듯하다. 기사 말미의 한 구절이다.
필요성이 의심되는 테러방지법 글귀 한자 한자에는 국정원의 식지 않은 권력 욕망이 녹아 있다. 단지 낡아빠진 국가안보의 명분 대신 테러 방지가 새로운 알리바이로 떠올랐을 뿐.참여정부의 국정원은 ‘개혁 대상 1호’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작업을 추진했다. 2004년부터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를 설치해 국정원의 과거 불법 사찰·조작 의혹 사건의 진실을 3년간 규명했다. 그러던 중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이 터졌다. 1997년 삼성그룹이 정치인·검찰 고위 인사들에게 ‘검은돈’을 전달한 정황을 담은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 내용이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이후 안기부의 불법 도청 관행이 밝혀지면서, 다시 한번 국정원 폐지·개혁론이 정치권 안팎에서 제기됐다.
하지만 참여정부 들어서도 국내 정치 정보 수집, 정치 개입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국정원의 역할을 해외 정보 수집·분석으로 축소해 ‘해외정보처’로 바꾸겠다고 했지만 공약을 지키지 않았다.
제670호(2007년 7월27일치)는 ‘국정원이 공중전화를 찾는 이유는’이라는 기사에서 여전히 정치권과 유착해 대선을 앞두고 각 대선캠프에 국내 정치 정보를 알아서 전달하는 국정원 직원들의 행태를 지적했다. 이 기사는 이렇게 끝맺는다.
참여정부 들어 국정원이 자체 평가에서 “대통령의 정치 정보 보고 금지 지시에 따라 정치 사찰성 정보 생산은 완전히 중단됐으며, 이를 통해 확고한 정치적 중립 기반을 구축했다”고 자평했지만, 자평에 그쳤다. 국내 정치 정보의 생산과 정치권과의 끈적끈적한 관계를 털지 않는 이상, 정치 중립성에 대한 시비는 어느 때고 다시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2000년대 전산·디지털 감시 강화2000년대 들어 은 전산·디지털화된 수사기법과 일상화된 감시체제에 대해서도 감시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제331호(2000년 11월2일치)는 표지이야기로 ‘감시사회’를 다뤘다. ‘‘훔쳐보는 자들’에게 저항하라’는 제목의 첫 기사에선 버스, 공장, 기업, 수사기관 등에서 폐회로텔레비전(CCTV), 데이터 수집·분석 시스템(DAS), 지문 전산화 작업 등을 통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전 사회적 감시 시스템을 주제로 다뤘다. 특히 국가권력 감시에 대한 견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걸 잊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일터 등에서 깊숙이 들어온 일상적 감시도 중요하지만, 감시 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국가와 국민의 관계라고 진단한다. 국가가 국민을 대상으로 포괄적인 감시를 일상적으로 행하는 사회.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해, 복지정책을 펴기 위해”라는 명분으로 이뤄지는 일상적이고 보편화된 국가감시…. 실제 검경 등 수사기관의 각종 도·감청과 이메일 검열, 지문날인의 디지털화 등 국민을 대상화한 국가감시는 갈수록 첨단화, 공고화하고 있다.이명박 정부 들어 은 수사 전산·디지털화에 따른 감시 시스템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보도를 연달아 내놓았다. 제766호(2009년 6월26일치) ‘나는 지난 여름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표지이야기에선 경찰 범죄정보관리시스템 ‘심스’에 축적된 수천만 명의 개인정보가 오·남용될 위험성을 지적했다. 제776호(2009년 9월4일치) ‘국정원의 신무기 패킷 감청’ 표지이야기에선 국정원이 국가보안법 혐의자 등의 인터넷과 전자우편 등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패킷 감청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공개해 과도한 사생활 침해 우려를 제기했다.
2008~2012년 정권 차원 전방위 불법사찰이명박 정부는 불법사찰을 안기부·국정원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환기했다. 국정원으로선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난 셈이다. 2010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민간인을 2년간 사찰한 사건이 공개됐다. 개인 블로그에 이명박 대통령 비판 동영상을 갈무리해 올린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가 불법사찰을 받은 것이다. 정권 실세가 몸통이라는 합리적 의혹들이 제기됐지만 검찰은 꼬리 격인 공직윤리지원관실 소속 직원들만 불법사찰 혐의(직권남용) 또는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했다.
은 제901호(2012년 3월12일치) 표지이야기에서 1만여 쪽에 이르는 수사·재판 기록을 입수해 최종석 당시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행정관의 증거인멸 직접 지시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이 사건은 정치인, 관료, 시민사회단체, 언론사 등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불법사찰 사건으로 드러났다. 여기엔 전 편집장도 포함됐다. 제905호(2012년 4월3일치) 표지이야기에선 ‘‘한겨레21’ 편집장의 무엇을 캐려 했나’라는 기사를 통해 공직윤리지원관실 1팀이 박용현 전 편집장을 사찰한 파일 문서를 보도했다. 기사는 이렇게 끝맺는다.
과거 보안사나 국군기무사, 국가안전기획부 등의 민간인 사찰 사실이 드러난 적은 있지만 청와대 인사가 직접 개입한 민간인 사찰은 문민정부 이후 처음이다. 대통령이 책임져라.2013~2016년 모든 감시·사찰 기술 재가동박근혜 정부 이후 상황은 아는 바 그대로다. 불법사찰은 반복됐고, 국정원 개혁 논의는 국정원의 반격으로 쉽사리 무위로 돌아갔으며 간첩 조작 사건은 재현됐다. 국정원이 인터넷 공간에서 전방위적으로 대선 여론 조작에 나선 것도 모자라 실시간 감청 해킹 소프트웨어를 국내에 도입한 정황이 드러났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국정원의 인터넷상 대규모 대선 여론 조작 사건( 제967호), 2013년 6월 국정원 국정조사를 앞두고 벌어진 국정원의 ‘노무현 전 대통령 2007년 남북 정상회담 NLL(서해북방한계선) 포기 발언 회의록’ 공개 사건( 제968호), 2013년 9월 국정원 대선·정치 개입 사건에 선거법 위반죄를 적용한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자’에 대한 청와대의 불법사찰 사건( 제990호), 2013년 ‘서울시 공무원 간첩’으로 지목된 유우성씨에 대한 국정원의 간첩 조작 사건( 제1003호), 2015년 국정원이 이탈리아 해킹업체 ‘해킹팀’으로부터 PC와 스마트폰을 무한정 실시간 감청할 수 있는 원격제어시스템(RCS)을 사들인 사건( 제1070~1072호)까지.
문민정부 출범 이후 안기부·국정원 등이 보여준 불법 감시·사찰 기술이 박근혜 정부 3년 동안 거의 모두 재가동됐고 새롭게 진화했다. 그리고 국정원은 최근의 연속적인 과오에도 불구하고 15년간 꿈꿔온 테러방지법을 통해 ‘무소불위’의 권한을 얻었다.
개념이 모호한 ‘테러위험인물’에 대해 국정원이 위치정보를 포함한 온갖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추적할 수 있도록 법률로 못박아, 20여 년간 지속된 국정원의 국내 정보 수집·수사 권한 축소와 개혁 논의를 정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그렇다. 이건 비극이 아니라 차라리 희극이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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