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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의 장난, 테러방지법

등록 2002-03-14 00:00 수정 2020-05-03 04:22

곳곳에서 국정원의 권한 강화하려는 의도 드러나… 시민사회 “폐기하자” 한목소리

9·11 테러 이후의 세계는 두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첫 번째는 테러와의 전쟁이다. 두 번째 보이지 않는 전쟁은 국가권력과 시민사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반테러’ 혹은 ‘테러방지’를 목적으로 통제체제를 강화하려는 국가권력과 시민의 자율적 권리를 지키려는 인권·사회운동이 맞서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내전’은 국가정보원의 도발로 시작되었다. 2001년 11월12일 국정원은 홈페이지를 통해 테러방지법을 입법 예고했다. 인권·사회단체는 한목소리로 입법 반대운동에 나섰다. 국가인권위원회와 대한변호사협회도 반대의 목소리를 보탰다. 인권침해 소지가 큰 탓이다. 그러나 여전히 강력한 국가권력과 아직 허약한 시민사회의 힘의 균형추를 반영하듯 겨울철 내전은 국정원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테러방지법이 3월 임시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수사권까지 노리는 무리수

인권운동사랑방 류은숙 상임활동가는 테러방지법을 “테러방지를 내세운 국정원의 간판장사”라고 꼬집는다. 누구도 “노”라고 답하기 힘든 테러방지를 명목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정원의 권한 강화로 내용이 채워져 있다는 얘기다. ‘국정원 권한강화법’, ‘제2의 국가보안법’, ‘상설 비상계엄법’. 테러방지법에 붙여진 불명예스런 별명들은 이 법의 성격을 반영한다.

국정원의 권한 강화는 테러방지법 제2조의 테러에 대한 정의에서 시작된다. 제2조 1항은 테러를 “정치적·종교적·이념적 또는 민족적 목적을 지닌 개인이나 집단이… 국가안보 또는 외교관계에 영향을 미치거나 중대한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는 행위를 말한다”고 정의한다. 대한변협,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 법률단체들은 이 조항을 “포괄적이고 모호한 개념정의”라고 비판한다. ‘국가안보’, ‘영향’, ‘사회적 불안’ 등 불확정적인 개념을 남용해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울산대 법학과 이계수 교수는 “법률 개념이 모호할수록 수사권이 남용되고, 정보수집 범위가 넓어진다”며 “국가보안법처럼 집행기관의 마음먹기에 따라 마구잡이식 연행이 자행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대테러기구의 조직 구성을 살펴보면, 국정원의 권한 강화 의도는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우선 일상적으로 대테러 활동을 수행하는 기구인 대테러센터가 국정원에 설치된다. 대테러센터의 조직 구성은 국정원장이 정하게 되어 있고, 그 조직과 구성원은 공개되지 않는다. 결국 대테러기구의 핵심을 장악하는 조직은 국정원이다. 배제대 법학과 김종서 교수는 “조직을 장악하는 자가 권력을 장악하는 생리에 따라 국정원은 확실히 대테러 업무의 주도권을 장악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국정원은 수사권까지 노리는 무리수를 뒀다. 애초 국정원이 작성한 법안에는 대테러센터가 수사권을 가지는 것으로 명시돼 있었다. 인권단체의 반발에 부딪혀 수사권 조항은 삭제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법경찰권은 남아 있다. 테러방지법 제16조에 대테러센터의 공무원에게 사법경찰권을 부여하는 조항이 명시된 것.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의견서는 “사법경찰권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범죄에 대한 수사권이므로 사실상 테러 수사권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한다. 이계수 교수는 “정보기관이 수사권을 가지면 나치하의 비밀경찰 같은 국가기구가 등장하게 된다”며 “그래서 서구 각국은 수사권과 정보수집권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조직과 수사권을 확보한 국정원은 각 지방자치단체와 공항, 항만 등에 두게 되는 대테러대책협의회 망을 타고 손발까지 확보하게 된다. 인권운동사랑방 류은숙 상임활동가는 “국정원이 테러방지 업무뿐 아니라 국정 전반에 걸쳐 개입할 여지가 커진다”고 우려한다.

국가보안법의 짙은 그림자가…

대테러센터의 책임자인 국정원장이 군부대의 출동을 요청할 수 있도록 규정한 조항은 위헌시비마저 불러일으킨다. 대테러센터의 요청에 따라 국가 주요 시설 보호를 명목으로 출동한 군 병력은 민간인에 대해 사법경찰관 직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헌법은 군대가 경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경우를 계엄시로만 엄격히 한정하고 있다. 김종서 교수는 “테러방지 명목으로 군과 경찰의 경계를 허물게 된다면 결국 ‘계엄 없는 계엄 상황’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래서 인권단체가 테러방지법을 상설 비상계엄법으로 부르는 것도 결코 과장만은 아니다.

대테러방지법에는 국가보안법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애초 국정원 법안에는 불고지죄, 구속기간 연장, 참고인 구인·유치 등 국가보안법에서 본뜬 조항들이 들어 있었다. 이 조항들은 2001년 11월20일, 인권단체들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집중 비판을 받았다. 다음날 국정원은 문제가 된 조항들을 삭제했다. 하지만 불고지죄는 테러범죄 미신고죄로 이름이 바뀐 채 법안에 남아 있다. 김종서 교수는 테러방지법의 밑그림부터 국가보안법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는 행위’라는 테러의 정의는 ‘찬양고무’를, 포괄적이고 모호하게 규정된 테러단체 구성 가입죄는 ‘반국가단체 구성 가입죄’를 떠올리게 합니다. 테러방지법은 9·11 사태를 계기로 기사회생한 제2의 국가보안법입니다.”

테러방지법은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의 인권도 위협한다. 오히려 이주 노동자들이 첫 번째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테러방지법 제11조에 따르면, 테러와 관련되었다고 의심할 만한 이유만으로 소재지·국내체류 동향 등을 추적할 수 있고, 테러를 할 ‘우려’만으로 출국조치를 요청할 수 있다. 이 조치에 대해 구제를 요청할 법적 절차는 전혀 없다.

국정원 관계자는 “반테러법안의 도입은 세계사적 추세”라며 “인권침해 소지를 없애기 위해 법률 초안을 만들면서 영국, 미국, 독일 등의 반테러법안을 참고했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시민단체쪽은 “서구의 반테러법안이 염두에 두고 있는 인권에 대한 배려가 테러방지법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서구의 반테러법안은 권력 분산을 위해 수사권과 정보수집권을 엄격히 구분하고, 처벌 대상자를 구제할 법적 조치도 마련하고 있다. 이계수 교수는 “독일의 반테러법의 경우, 불심검문 요건 약화와 신분증에 지문 표식 등을 넣는 조항조차 논란거리가 된다”고 전한다. 그는 “이미 시민적 권리가 확고한 상태에서 도입되는 반테러법과 인권침해가 빈번한 현실에서 도입되는 테러방지법은 분명 다르다”고 덧붙인다.

기존법으로 충분히 처벌 가능

테러방지법의 인권침해 소지를 조목조목 지적한 국가인권위원회, 대한변호사협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협회의 의견서는 한결같이 “테러방지법은 폐기되어야 하고, 현행법으로 테러 예방과 처벌은 충분하다”는 결론으로 매듭된다. 기존의 형법, 항공법, 유해화학물질 관리법 등으로 충분히 테러행위 처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테러와 유사한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1997년 1월 이미 통합방위법이 제정된 바 있다. 필요성이 의심되는 테러방지법 글귀 한자 한자에는 국정원의 식지 않은 권력 욕망이 녹아 있다. 단지 낡아빠진 국가안보의 명분이 대신 테러방지가 새로운 알리바이로 떠올랐을 뿐. 인권운동사랑방 류은숙 상임 활동가는 “테러방지법에 관한 한 타협은 없다”며 “완전 백지화될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강조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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