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바다로 민간 잠수사들이 뛰어들었다. 바다는 거칠게 요동했다. 근육질 파도가 배를 쥐었다 놓길 반복했다. 파도를 견딜 바지선이 없어 잠수사들은 낚싯배를 딛고 몸을 뿌렸다. 그들은 새벽 바다에 몸을 꽂으며 수심 45m 아래 침몰한 배로 다가갔다.
침몰 원인 찾아 새벽 바다로
11월19일 새벽 4시5분, 3척의 배(잠수사들이 탄 해경 경비정·유가족을 실은 행정선·잠수 작업이 이뤄질 낚싯배)가 세월호 수중촬영을 위해 팽목항을 떠났다. 전날부터 전남 진도 바다엔 비가 내렸다. 583일 전 그날(2014년 4월16일)의 파도도 이날만큼 질겼을지 몰랐다. 파도에 얹힌 배가 좌우로 흔들리며 U자를 그렸다. “바다 사람들도 견디기 힘들 만큼 거센 파도”라고 선장이 말했다.
지난 4월 광주고법은 ‘세월호 침몰 원인을 알 수 없다’고 선고했다. 일주일 전(11월12일)엔 대법원이 고법 판결을 수용했다. 절망한 유족들은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 선체 조사를 요청했다. 특조위의 세월호 선체 조사(11월19~22일)는 법이 규명을 포기한 사고 원인을 찾고 인양 전 선체 상태를 촬영하는 작업이었다. 조타실 조타기와 각종 계기판, 선미 프로펠러와 러더(방향타) 등의 ‘현재’를 촬영해둬야 인양 과정에서 발생할지 모를 변형 혹은 왜곡을 확인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은 11월19일과 20일 유가족과 배에 올라 특조위의 수중촬영을 지켜봤다.
오전 5시18분. 깜깜한 참사 해역에서 불을 환하게 밝힌 상하이 셀비지(중국 인양업체)의 바지선이 눈에 들어왔다. 실종자 가족이 선체 조사를 책임진 권영빈 특조위 진상조사소위원장에게 물었다. “특조위가 바지선 위에 올라 인양 작업을 지켜봐야 하는 것 아닌가.” 권 소위원장이 곤혹스러워했다. “우리가 계속 그 요구를 했는데 해양수산부가 상하이 셀비지의 거부 입장만 전달한다.”
파도를 피해 서거차도로 피항한 유족들은 오전 10시30분 참사 해역으로 다시 나왔다. 상하이 셀비지로부터 바지선 지원을 받지 못한 특조위는 낚싯배를 구해 잠수 작업을 진행했다. 바지선 위에서 중국 직원들이 망원경으로 조사 작업을 관찰했다.
특조위는 실지조사를 준비하며 상하이 셀비지의 바지선과 잠수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수부에 요청했다. 인양 작업을 멈추지 않고, 안전을 담보하며, 비용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특조위는 설득했다. 해수부는 상하이 셀비지의 반대를 이유로 불가를 통보했다.
지난 8월 특조위에 첫 예산이 들어올 때 수중촬영 비용 1억5천만원은 전액 삭감됐다. 잠수사 하루 잠수비로만 98만원이 들었다. 참사 해역의 조류 일정상 11월24일 이후로는 조사가 불가능했다. 특조위는 예산 부족에 따른 ‘조사의 원시성’을 감내하고 진도 바다로 나갔다. 상하이 셀비지는 인양 작업을 멈추고 해역을 내줬다. 작업 일정 지연과 비용 증가, 안전사고 부담은 모두 특조위로 향했다. 해수부가 조타실로 연결했다던 잠수 유도선은 조타실로부터 35m 떨어진 곳에 묶여 있었다. 협조를 앞세운 해수부의 비협조에 실지조사는 단계마다 난관이었다.
예산 전액 삭감으로 낚싯배 타고 작업유족들을 태운 30t짜리 행정선 ‘전남 707호’가 100여m 거리를 두고 낚싯배를 맴돌았다. 단원고 2학년 고 박수현군의 아버지 박종대(51)씨가 행정선 위에서 흔들렸다. 아들딸을 잃은 5명의 부모가 그의 곁에 있었다.
전남 707호는 진도군이 소유하고 조도면이 관리했다. 조도면에 속하는 36개 유인섬 중 식수가 부족한 16개 섬에 물을 공급했다. 수현군이 가라앉던 날 전남 707호는 해경 123정으로부터 이준석 선장 등 탈출 선원을 넘겨받아 진도로 실어날랐다. “팬티 바람으로 승선한 선장이 배에 널어둔 작업복을 입고 내렸다”고 급수선의 기관장은 기억했다. 육중한 파도가 높이 솟았다 급히 꺼졌다. 아들딸을 버린 선장이 생을 구한 배 위에 서서 부모들의 빈속은 뒤틀렸다.
지난 추석(9월27일) 박종대씨는 차례를 지내며 아들 수현군을 생각했다. 제사나 차례 때마다 아들에게 절차와 의미를 가르쳤던 기억이 그의 마음을 다시 갉았다. “가장 슬픈 감정 속에서 ‘그 글’을 쓰기 위해” 그는 기다려왔다. 차례 상을 물린 뒤 책상에 앉은 그가 첫 문장을 썼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대통령에 대하여 조사하고 책임을 논하는 것은 이 사건 진상 규명의 시작과 끝입니다.”
‘청와대와 대통령 업무 행위의 적절성 조사’를 요청하는 17장의 글을 그는 이틀 뒤 특조위에 접수했다. “청와대 조사 요청이 논란을 일으킬 줄 짐작했지만 조사의 시작과 끝을 버려두고 진실 규명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조사신청서에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을 언급했으나 사생활을 조사하라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업무 시간에 국민을 지킬 의무를 다했는지, 참사 대응이 적절했는지를 알아야겠다는 뜻이다.”
조사 이틀째 날 박종대씨는 캠코더를 들고 낚싯배에 올랐다. 그는 잠수사들의 작업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진도에 올 땐 잠수사들이 상하이 셀비지 바지선에서 작업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도 바지선에서 세월호 인양 장면을 화면에 담을 생각이었다.” 그가 동거차도 쪽을 바라봤다. “저기서는 아무리해도 잘 안 보이니까….” 섬의 산꼭대기에서 유가족들이 텐트를 치고 숙식하며 망원렌즈로 인양 작업을 감시하고 있었다.
잠수사들은 3번(조타실)과 4번(선수) 부표 아래로 내려갔다. 2인1조로 팀을 이뤄 하강했다. 지난해 4월20일부터 7월11일까지 구조 작업에 참여하며 주검 20여 구를 인양했던 황인호(가명)씨가 잠수사들을 자문했다.
16개월 만에 참사 해역으로 돌아온 그의 몸과 마음은 폐허였다. 잠수 후유증 탓에 무혈성 골괴사(혈액 공급이 안 돼 뼈가 괴사하는 병)를 앓고 있었다. 석회질로 변한 어깨 근육을 매주 한 번씩 부순다고 했다. 16개월 전 그가 물밑에서 만난 세계는 참혹했다. 테이블 사이에 끼어 빠지지 않던 학생의 주검과 서로 팔짱을 낀 채 숨져 있던 학생들의 모습이 그의 머리를 파먹었다. 그는 “항상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운다”고 했다.
물때(만조)는 하루에 4차례 왔으나 잠수는 하루 1~2차례만 가능했다. 비용의 한계는 잠수사 수와 잠수 횟수를 제한했다. 바다 속은 쉽게 시야를 허락하지 않았다. 첫째 날은 물에 펄이 섞여 촬영 자체가 불가능했고, 둘째 날엔 촬영은 했으나 조타실 진입에 실패했다. 잠수사들은 고전했다.
‘진실 규명 성역 만들기’ 협의 문건11월19일 두 번째 잠수팀이 바다로 입수하던 그 시각(오전 10시30분) 서울 국회 정론관에서 특조위 여당 위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헌 부위원장과 고영주·차기환·황전원 위원이 마이크 앞에 섰다. “특조위가 참사 당일 대통령의 행적 조사를 강행하면 전원 사퇴도 불사하겠다”고 했다.
전날 특조위는 상임위원회를 열어 ‘청와대 등의 참사대응 관련 업무적정성 등에 관한 조사 개시 건’을 11월23일 전원위원회에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여당 위원들은 “세월호 진상 규명을 빌미로 대통령의 행적을 조사하겠다는 해괴한 주장은 국가의 기본 질서와 근간을 뒤흔드는 것으로 더 이상 인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진실 규명에도 성역은 있다’는 선언이었다. 특조위 조사를 겨냥한 청와대-새누리당-해수부-특조위 여당 위원-보수단체가 결합한 파상공세의 시작이었다. 물살은 맹골의 바다에서보다 청와의 집 앞에서 더욱 사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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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조위의 ‘청와대 참사대응’ 조사 논의는 박종대씨의 신청에 따른 것이었다. 조사신청서 접수 한 달여 뒤 해수부는 대응 문건(‘세월호 특조위 관련 현안대응 방안’)을 만들며 ‘특조위 무력화’에 나섰다.
공세는 치밀한 조율을 거쳐 배치됐다. 특조위 여당 위원들의 “사퇴 불사” 발표 직후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도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들은 “특별조사를 받아야 할 대상은 세월호 특조위”라고 공격했다.
두 차례의 기자회견 직전인 이날 오전 9시59분 문건 하나가 공개됐다. 은 특조위 조사에 대응하는 해수부의 내부 지침을 인터넷으로 보도했다. 특조위를 향한 잇단 공세가 정부-특조위 여당 위원 간 협력의 산물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지침과 실행은 정확히 일치했다. “BH(청와대) 조사 건 관련 특조위 여당 추천 위원들이 소위 의결 과정상 문제를 지속 제기하고, 필요시 여당 추천 위원 전원 사퇴 의사 표명(부위원장 주재 기자회견 등)”이란 문장은 주문대로 이행됐다. “국회 (농해수위) 여당 위원들이 필요시 비정상적·편향적 위원회 운영을 비판하는 성명서 발표”도 1시간이 안 돼 현실화됐다.
문건은 “(청와대 조사를 막기 위해) 해수부-특조위 여당 추천 위원 간 협조·소통채널 강화”도 주문했다. 해수부 장·차관-특조위 부위원장, 해수부 해양정책실장-특조위 여당 추천위원 간의 2차례 면담 때 이미 협조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도 시사했다. “특조위 부위원장이 상임위원회 회의시 특조위 전원위원회에 상정되지 않도록 역할을 할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특조위 해체” “예산 삭감” 특조위원 고발“실지조사 최대한 협조하겠다”던 해수부의 태도도 전략이었다. 해수부는 “인양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수중 조사를) 최대한 협조”하고 “인양 후 선내 정리 및 미수습자 수색시 특조위의 참여를 최대한 보장”한다고 문건에 썼다. 이유도 적었다. “특조위의 선체 조사에 최대한 협조함으로써 활동 기간 연장의 최소화 도모.”
속내는 그랬다. 활동 기간(기본 1년에 6개월 연장 가능)은 특조위 진상 규명의 최대 쟁점 중 하나다. 문건은 “현행 특별법상 특조위 활동 기산일인 ‘위원회 구성일’로 해석 가능한 ‘임명장 수여일(3.9)’을 고수”하라고 명시했다.
정부·여당은 위원회 출범일(2015년 1월1일)을 기준으로 내년 6월이 활동 종료일이라고 밝혀왔다. 야당 쪽은 별정직 공무원이 임용된 7월이나 예산이 처음 지급된 8월을 기준으로 계산(내년 말까지 활동)해야 한다며 충돌했다.
해수부가 밝히는 세월호 선체 인양 예정일은 내년 7월이다. 내년 6월 특조위가 문을 닫으면 침몰 원인을 밝힐 최대 증거인 선체 인양을 앞두고 활동을 접어야 한다. ‘3월9일’은 야당의 동의하에 활동 기간을 단축하려는 ‘떡밥’이었다. 해수부 문건은 ‘실지조사 협조하며 야당 설득→특조위 활동 시작일을 1월1일에서 3월9일로 변경 합의→선체 인양 후 조사 기간 2개월 부여→활동 기간 연장 최소화’를 의도했다.
진도 실지조사 현장에서 서울 소식을 들은 권영빈 소위원장은 “여당 쪽의 기자회견은 사전에 각본대로 준비된 것”이라며 “특별법에 따라 당당하게 활동하겠다”고 했다. 그는 남은 일정을 실무팀에 맡기고 급히 귀경했다. 박종대씨도 이튿날 서울로 향했다.
11월23일 오전 특조위 전원위원회에서 여야 위원들은 격론했다. 방청 중이던 박종대씨는 답답했다. “‘대통령의 7시간’으로 논쟁이 매몰되는 상황을 참을 수 없어” 방을 나와 찬 바람을 맞았다. 여당 위원 4명은 문건대로 “사퇴하겠다”며 퇴장했다. 지난 9월7일 ‘개인적인 사유’(부산 지역 총선 출마)로 사퇴 의사를 밝힌 뒤 위원회에 나오지 않던 석동현 위원은 이날 ‘청와대 수호’를 연출한 뒤 두 번째 사퇴했다.
남은 위원들이 ‘청와대의 참사대응 적정성’의 조사 개시를 결정했다. ‘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필요한 경우 배제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붙였다.
이날 이후 대통령을 지키기 위한 당·정·청과 보수단체의 협업이 불을 뿜었다. 국회 농해수위 새누리당 의원들은 “특조위 해체 고려”(11월23일)를 언급했고, 청와대는 “위헌적 발상”(11월24일)이라며 강경한 반응을 보였다. 원유철 원대대표는 “불순한 의도를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11월24일)고 했고, 이장우 대변인은 특조위원 전원 사퇴를 촉구(11월25일)했다. 자유청년연합 등은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며 특조위원들을 검찰에 고발(11월26일)했다.
‘말폭탄’에 이은 실행 전략은 예산 삭감과 활동 기간 축소로 특조위를 무력화하는 데 맞춰지고 있다. 농해수위 여당 의원들은 특조위 예산 반영 금지와 활동 기간 연장 논의 중단 방침(11월23일)을 밝혔다. 이미 2016년 예산은 활동 시한을 내년 6월까지로 계산해 편성돼 있다. 159억원을 신청한 2015년 예비비도 89억원(사업비는 45억원에서 14억원으로 감액)만 배정됐다. 진상 규명의 핵심 사업인 ‘인양 선체 정밀조사’ 예산 49억원도 전액 깎였다. 향후 여당 위원들이 빠진 상태에서 진행되는 특조위의 중요 결정마다 “의사결정상의 공정성에 문제”가 “집중 부각”(해수부 문건)될 것으로 보인다.
“내 아들이 왜 죽었는지 알아야겠다”잠수사들은 11월22일 나흘간의 선체 수중 촬영 작업을 마쳤다. 러더와 프로펠러, 선체 외벽 일부를 촬영했다. 조사 마지막 날 조타실에 진입했으나 시야 확보가 어려워 촬영엔 실패했다. 참사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계기판 상태는 끝내 영상에 담지 못했다.
“인양 전 선체 수중 촬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며 “내년 예산이 편성된다면 해수부와 협조해 인양 전 정밀 선체 조사를 다시 추진하겠다”고 특조위는 설명했다. 촬영 영상은 전문가에게 맡겨 분석에 들어갔다. 공개해야 할 분석 내용이 있을 땐 전원위원회를 통해 공개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박종대씨에게 수현군은 “삶의 기둥이자 동지”였다. “대신 죽어서라도 살아나주길 바라는 나의 전부”였다. 작곡가를 꿈꿨던 아들은 곡을 써서 컴퓨터 어딘가에 남겼다. 아들을 찾아 바다를 헤맬 때처럼 아버지는 아들이 남긴 곡을 찾지 못해 아득하다. 아들이 불렀던 노래가 머릿속에서 안개처럼 뿌예졌는데 아버지는 수면제 양을 늘려도 잠을 자지 못한다. 참사 직후 복귀한 직장을 두 달만(지난해 7월)에 그만둔 그는 오직 하나만을 좇고 있다.
“내 아들이 왜 죽었는지 알아야겠다. 그것 때문에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진도·서울=이문영 기자 moon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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