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물대포? 67가지 결함부터 해결할 것

시위 진압용 살수차 사용 문제 없다는 한국 경찰… 최근 물대포 사용 승인 불허한 영국 내무부의 의학·과학 보고서 분석
등록 2015-12-01 20:46 수정 2020-05-03 04:28
2015년 9월12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물대포를 쏘고 있다. DPA 연합뉴스

2015년 9월12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물대포를 쏘고 있다. DPA 연합뉴스

영국은 넉 달여 전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물대포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테레사 메이 영국 내무부 장관은 7월15일 의회에서 “경찰과 관련 독립기구들이 제출한 보고서를 검토한 결과, 경찰이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물대포를 사용하는 것을 불허한다”고 발표했다. 이미 영국 경찰이 21만8205파운드(약 3억7천여만원)를 들여 독일로부터 25년 된 중고 살수차(Ziegler Wasserwerfer 9000) 3대를 구입해 영국에서 쓸 수 있도록 개조한 뒤였다.

영국 경찰은 2014년 3월 내무부 장관에게 물대포 사용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영국 내무부 규정에 따르면 경찰이 ‘위해성 무기’(less lethal weapon)를 처음 도입하려면 내무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승인이 없으면 살수차 등 처음 도입되는 위해성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1년4개월 장고 끝에 불허</font></font>

영국 경찰은 이 과정에서 여러 정치적 압박을 벌였다. 절차에 맞지 않는 ‘우선 구매’가 그 한 수다. 내무부의 물대포 승인이 떨어지기 전에 물대포를 사버린 것이다. 자금은 보리스 존슨 런던 시장이 내줬다. 런던 시장은 자치경찰제를 시행 중인 런던의 치안 책임자다. 보수당 소속 존슨 시장은 “이미 예산 3억여원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승인 허가’ 사유로 거론했다. 보수당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역시 존슨 시장을 지지했다. 테레사 메이 장관 역시 보수당이다. 메이 장관은 캐머런 총리가 2010년 당선 뒤 내각을 구성할 때 지명해 지금까지 장관직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정치 지형 속에서도 보수당 정부의 메이 장관은 1년4개월이라는 장고 끝에 물대포 사용을 불허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영국 경찰이 물대포를 사용할 경우 대상이 되는 시민이 척추 골절, 뇌진탕, 안구 손상, 흉부 압박상 등을 포함한 직간접적 부상을 입을 수 있다. 또한 경찰이 도입하려는 물대포에 대한 기술적·의료적 영향 검토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67가지의 기술적 결함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점도 드러났다. 메이 장관은 의회에서 ‘물대포 사용 불허’ 입장을 밝히면서 이 부분도 담담히 읽어나갔다. 영국 일간지 은 “메이 장관이 런던 시장에게 한 번 더 굴욕감을 줬다”고 썼다.

둘째, 물대포가 빠르게 흩어지며 움직이는 시위대를 애초 목적대로 제대로 흐트러뜨리는 효과가 적을 것이라고 봤다.

셋째, ‘시민의 동의에 의한 경찰력’이라는 경찰 전통이 훼손될 수 있고 시민들 사이에 경찰력의 합법성에 대한 의심이 생길 수 있다. ‘시민의 동의에 의한 경찰력’은 1829년 영국의 로버트 필 경이 근대 경찰을 최초로 창설하면서 만든 9개 항의 ‘경찰 원칙’에서 바탕한 것으로, 경찰이 시민의 협력과 신뢰를 얻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영국의 물대포 사용 불허 결정은 테레사 메이 내무부 장관 혼자만의 생각으로 이뤄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독립 자문 기구인 ‘위해성 무기의 의학적 영향 검토 과학자문위원회’(SACMILL·Scientific Advisory Committee on the Medical Implications of Less-Lethal Weapons, 이하 자문위)의 중간 및 최종 검토 보고서, 내무부 과학기술센터(CAST·Center for Applied Science and Technology)의 기술적 검토, 영국 잉글랜드·웨일스 지방 경찰서장협의회에서 구성한 ‘물대포 도입 위원회’가 제출한 보고서 등을 모두 검토한 결과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쓰러진 농민 백남기 사건을 예견한 듯 </font></font>
테레사 메이 영국 내무부 장관이 7월15일 영국 의회에서 경찰의 물대포 사용을 불허한다고 발표했다. PA 연합뉴스

테레사 메이 영국 내무부 장관이 7월15일 영국 의회에서 경찰의 물대포 사용을 불허한다고 발표했다. PA 연합뉴스

영국 내무부는 이들 문서는 물론 메이 장관과 경찰서장협의회, 존슨 시장 등이 주고받은 서한까지 모두 내무부 홈페이지(<font color="#C21A1A">www.gov.uk</font>)에 올려놓고 누구나 내려받고 검토할 수 있게끔 했다.

물대포 도입 보류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공식 문건은 자문위의 의학적 영향 및 기술 검토 최종 보고서(<font color="#C21A1A">▶보고서 원문 보기</font>)다. 은 국내 언론 가운데 처음으로 이를 분석했다.

자문위는 2013년 경찰 요청에 의해 중간 검토 보고서를 한 차례 작성했다. 경찰은 이 중간 보고서에서 권고한 사항들을 바탕으로 살수차 한 대당 7천여만원을 들여 개조했다. 자문위는 개조한 차량을 다시 검토해 최종 보고서를 메이 장관에게 제출했다.

이에 대한 영국 자문위의 최종 보고서는 살수차가 시민에게 미치는 위험을 기술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때로부터 9개월 뒤 한국에서 예순여덟 농민 백남기에게 일어날 일을 예견한 것 같은 내용이다.

우선 물대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직접적 손상인 근골격계 손상(염좌, 탈구, 척추 골절 등)과 뇌진탕, 안구 손상, 흉부 압박상 등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네 단계에 걸쳐 설명했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신체에 직접 물대포를 맞아서 부상이 생기는 경우다. 고압으로 분사된 물줄기가 콧구멍, 귀, 입 등으로 들어갔을 때 앞서 언급한 여러 근골격계 손상 및 뇌진탕, 안구 손상 등이 생길 수 있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특히 깨진 안경의 유리나 플라스틱 부분이 눈에 들어가면 안구 손상 정도가 심각해질 수 있다고 자문위 보고서는 쓰고 있다. 11월14일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씨의 상태에 대해 민중총궐기 본부는 “물대포를 직접 맞은 영향으로 코 부분이 함몰되고 안구에도 이상이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물대포가 간판, 벤치 등 거리의 구조물을 파손시켜 그 파손된 조각에 맞아서 생기는 부상을 물대포로 인한 2차적 피해로 규정했다. 세 번째 부상의 메커니즘은 물대포에 맞아 몸이 밀려나가 땅의 솟아오른 부분, 자동차 지붕, 벽 등 단단한 것에 부딪혀 뇌진탕 등 부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이 세 번째와 첫 번째 메커니즘이 결합한 부상을 입은 백남기씨는 현재 의식불명 상태로 2주째 병상에 누워 있다.

특히 보고서는 어린아이, 임산부, 장애인, 노인 등 약자가 물대포로 인한 피해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고 예측했다. 이외에 주변 기온이 낮거나 찬 바람이 불거나 알코올을 섭취했을 때 물대포를 맞을 경우 저체온증으로 인한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자문위는 신체적 상해뿐 아니라 정신적 후유증도 빠뜨리지 않는다. 물대포라는 강한 충격으로 인한 직접적 트라우마는 물론 물대포 충격 이후, 그동안 잠재돼 있었거나 이미 치료된 정신질환이 재발하거나 활성화될 위험도 있다고 지적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일어날 수 있는 위험’까지 경계</font></font>

이 보고서는 물대포가 직접 사람에게 분사됐을 때 생기는 위험성만 따지지 않는다. 살수차의 배기가스양이 영국 도시 배기가스 기준에 맞지 않는 점, 살수차가 운행 중일 때 물대포에서 물을 쏴 습한 상태에서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거나 운전석의 시야가 제한돼 일어나는 사고로 인해 시민이 피해를 입을 위험성도 지적했다. 또한 물대포를 사용한 뒤 길이 미끄러워 넘어질 위험까지 그 부적절성의 근거를 광범위하게 포함시켰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size="4"><i><font color="#991900">영국의 자문위와 내무부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 매우 까다롭게 살핀다. ‘다치지 않아서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역시 물대포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위험으로 인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font></i></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이런 ‘예측’을 실증하는 사례도 있다. 보고서는 2010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시위하다 완전히 실명한 노인의 사례는 물론, 2011년 살수차가 직사한 물대포를 맞아 고막이 파열되고 뇌진탕을 입은 한국의 피해 사례까지 언급했다.

영국 경찰은 이미 북아일랜드 지방에서 살수차 6대가 10년째 사용되고 있고 그로 인한 심각한 부상이나 인명 피해가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방에도 살수차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국 경찰이 독일 등 유럽 여러 국가에서 살수차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며 살수차 사용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에 대해 영국 자문위는 북아일랜드가 사용하는 기종과 이번에 잉글랜드·웨일스 지방에서 사용하려는 살수차의 기종이 다르기 때문에 두 기종을 비교해서 안전성을 다시 한번 검토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이에 따라 영국 내무부 과학기술센터는 북아일랜드의 살수차를 ‘대조군’으로 다시 한번 테스트한 뒤 북아일랜드의 살수차와 잉글랜드·웨일스 지방의 경찰이 사용하려는 독일제 살수차를 비교해 테스트한다. 그 결과 최대 압력을 규정에 맞게 15바(1cm²당 15kg의 압력이 가해짐) 이하로 유지하는 것의 불안정성, 목표물(타깃)과의 최소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모니터 앵글이 고정되지 못하는 점 등 67개의 결함이 발견됐다.

영국의 자문위와 내무부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 매우 까다롭게 살핀다. 물대포를 사용하고 있는 북아일랜드에서는 2008년 4월부터 2014년 9월까지 모두 71차례 물대포를 사용했고, 북아일랜드 경찰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물대포 사용으로 인한 상해는 한 건도 없었다.

그러나 2013년 7월12일 물대포로 인해 한 남자가 경찰 지프차 지붕에서 넘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자문위는 ‘다치지 않아서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역시 물대포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위험으로 인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 남자는 운이 좋아서 다치지 않았지만, 운이 나쁘다면 얼마든지 다칠 수 있다는 ‘상식적 판단’에 따라 위험성을 판단하는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물대포가 경찰 합법성 해칠 것”</font></font>

이런 까다로운 ‘검토’가 가능한 바탕은 바로 ‘경찰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다. 경찰은 시민의 지지와 협력을 바탕으로 범죄와 무질서를 예방하고 바로잡는 기관이지 스스로 강제력을 행사함으로써 존재를 과시하는 기관이 아니다. 테레사 메이 장관은 7월15일 의회 연설에서 말했다.

“나는 물대포가 경찰의 합법성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 미칠 잠재적 영향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생각한다. …의학적·과학적 증거에 따르면, 물대포는 심각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운영 사례도 명확하지 않고, ‘시민의 동의에 의한 경찰력’이라는 영국의 역사적인 경찰 원칙이 위태롭게 된다. 나는 물대포 사용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경찰이 들여온 물대포는 이 높은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