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세계적인 협동조합 권위자였던 이언 맥퍼슨 캐나다 빅토리아대 명예교수(사진)가 2년 전 이맘때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뜨기 10개월 전 와 만나 “협동조합이 경제민주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당연하다”는 말을 남겼다. 40년 넘게 다양한 협동조합 운동을 벌였던 맥퍼슨 교수가 “승자독식이 아닌, 서로 협력하고 나누는 방식의 협동조합이 경제민주화를 이끌고 경제위기의 안전판 구실을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존재 이유로 하는 자본주의 기업과 달리 협동조합은 한 사람이 한 표를 가진다는 민주주의에 뿌리를 두고 운영된다. 협동조합에서는 소비자와 생산자 및 노동자가 바로 주인이고 이들에게 ‘최선의 가격’을 제공하는 것이 기업의 존재 이유다.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인 기업인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협동조합의 정신은 더욱 빛을 발했다. 굴지의 대기업들이 쓰러져가는 반면 협동조합 기업들은 대부분 건실하게 사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고용을 유지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09년 협동조합 기업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유엔에 제출하면서 위기에 강한 협동조합 사업모델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촉구했다. 유엔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협동조합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2012년을 ‘세계 협동조합의 해’로 정했다. 한국에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협동조합기본법 제정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탔고 마침내 2012년 12월부터 시행됐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에 따르면 전세계 94개국에서 140만 개가 넘는 협동조합이 활동하고 있다. 조합원 수로 따지면 10억 명이 훌쩍 넘고 협동조합 기업과 관련해 직·간접적으로 일하는 사람도 2억5천만 명이나 된다. 협동조합의 뿌리가 깊은 나라에서는 협동조합이 실핏줄처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있다.
특히 캐나다와 뉴질랜드에서는 전체 인구의 40% 이상이 협동조합원이다. 프랑스는 35%, 이탈리아와 미국은 25%가량의 국민이 협동조합원으로 활동한다. 이들 나라에서 협동조합 기업들은 농업뿐만 아니라 유통과 금융 분야에서도 활약이 두드러진다. 협동조합이 국민의 생활경제를 좌우하는 밑바탕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되면서 3년 만에 무려 8천여 개의 협동조합이 생겨났다. 조합원 수와 출자금 규모에 대한 제한이 없어지면서 봇물 터지듯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은 아니지 싶다. 이에 대해 협동조합의 대가로 불리는 스테파노 자마니 이탈리아 볼로냐대 교수는 “세계적으로 이렇게 빨리 협동조합이 성장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고 놀라워했다.
국내 협동조합 기업의 유형은 사업자 중심, 소비자 중심, 직원 중심, 다중이해관계자 등 4가지로 나뉜다. 현행법상 협동조합 기업이 택할 수 있는 업종은 금융과 보험업을 빼고 모두 가능하다. 실제로 의식주 등 일상생활의 필요에 따른 서비스와 제품을 만들어 제공하는 다양한 형태의 협동조합 기업이 속속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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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일까. 협동조합에 대한 부정적 목소리가 벌써 나오고 있다. 지난 9월 한 경제신문이 ‘협동조합 90%는 좀비’라는 자극적 제목을 붙여 특집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협동조합을 지원한다고 난리를 치더니 결국 헛돈만 쓴 꼴이 되고 말았다”고 비난하면서 이만우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기획재정부에서 받은 자료를 근거로 들었다. 협동조합기본법 시행 이후 전국에 들어선 협동조합 중 그나마 운영되는 건 10%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 개점휴업 상태거나 활동이 미미해 수천억원의 정부 지원금만 축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자료를 만들었다는 기재부는 이런 보도가 객관적 근거나 자료가 없는 추정일 뿐,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협동조합의 주무 부서인 기재부가 밝힌 내용에 따르면, 2013년 1차 협동조합 실태조사에서는 조사 대상 조합 1209개 중 54.4%가 사업을 운영 중이었고, 올해 2차 실태조사를 하고 현재 집계를 하고 있는데 그 결과는 11월에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지원자금 규모가 수천억원에 이른다는 것과 관련해서는,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을 위한 각종 정책자금을 모두 협동조합 지원으로 오해한 것이라는 게 기재부의 설명이다. 실제 기재부는 협동조합들의 자생력 제고를 위해 직접적인 재정 지원은 하지 않고 교육·컨설팅·설립 지원 등 간접 지원만 하고 있다.
170년이 넘는 오랜 전통을 가진 외국의 협동조합 운동에 견줘보면 우리의 협동조합은 아직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시장만능주의, 승자독식의 무한경쟁 정글에서 살고 있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성장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협동조합에 필요한 협력과 연대의 경험을 쌓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게다가 협동조합 기업을 잘 꾸려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업의 목적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돈을 잘 벌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운영이 민주적이어야 하고, 지역사회에도 기여하고 다른 협동조합과도 협력하는 등 협동조합의 7가지 원칙도 지켜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협동조합 기업이 가는 길은 그 첫걸음이 더디고 서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협동조합의 협력과 연대의 가치는 꼭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전국 곳곳에서 일고 있는 협동조합 기업들의 실험은 성패를 떠나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협동조합을 하면서 빠르게 성과 내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끼리 협동하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협동조합을 비즈니스로 운영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 이런 것이 준비되지 않은 채 너무 빨리 성장하는 것은 좋지 않다. 협동조합이 왜 필요한지, 어떻게 효과적으로 운영할지를 생각하며 천천히 만들어가야 한다. 한국 정부가 협동조합 설립을 지원할 때 이런 점을 꼭 고려해야 한다.” 노구의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한국을 찾았던 맥퍼슨 교수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당부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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