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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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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아파하고 함께 길을 찾고

세월호 유가족의 ‘일본 5박6일 방문기’, JAL 추락사고 등 참사 이후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실천 방법 들어… 일본 유가족들 “철저한 진상 규명은
유가족의 권리이자 사회적 책무”
등록 2014-12-19 14:31 수정 2020-05-03 04:27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2학년 고 이창현군의 아버지 이남석(오른쪽 첫번째)씨와 어머니 최순화(오른쪽 세번째)씨가 12월6일 일본 오사카에서 1991년 5월 시가라키역 철도 정면충돌 사고와 2005년 4월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의 유가족들이 만나 손을 맞잡고 연대를 약속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2학년 고 이창현군의 아버지 이남석(오른쪽 첫번째)씨와 어머니 최순화(오른쪽 세번째)씨가 12월6일 일본 오사카에서 1991년 5월 시가라키역 철도 정면충돌 사고와 2005년 4월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의 유가족들이 만나 손을 맞잡고 연대를 약속했다.

<font color="#A48B00">“먼저 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4·16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2학년5반 고 이창현군의 어머니 최순화(49)씨는 남편 이남석(49)씨와 일본 대형 사고 유가족들을 만난 소감을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그들을 만난 것이 행운이다. 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세월호 가족대책위),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국민대책회의) 소속 5명과 함께 지난 12월3일부터 8일까지 5박6일간 일본 도쿄와 오사카를 다녀왔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고 재발 방지를 실현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창현 아버지와 어머니는 짧게는 3년, 길게는 29년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켜온 일본 유가족들, 전문가들과 손을 맞잡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생명보다 이익을 앞세워 대형 사고가 발생한다”고 진단하고 “진상 규명은 유가족의 권리이자 사회적 책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세월호 가족대책위는 국제 전문가들도 잇따라 초청했다. 12월2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민주노총과 함께 ‘안전한 일터 안전한 사회 만들기 국제심포지엄’을, 12월9일 서울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해외 사례에서 본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개최했다.
내년 1월1일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 특별법)에 따라 발족할 특별조사위원회도 위원 구성 등 한창 준비 중이다. 세월호 가족대책위(3명)와 새누리당(5명), 대한변호사협회(2명)가 위원을 각각 추천했고 민주당(5명)과 대법원(2명)도 위원을 뽑을 계획이다.
우리나라는 4·16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철저히 밝혀내고 안전한 나라로 거듭날 수 있을까? 먼저 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조언을 이 모았다. 창현 어머니가 쓴 일기장도 함께 엮었다. 일본 방문에 동행한 박상은 국민대책회의 존엄과 안전위원회 위원은 안전한 사회로 거듭날 제언을 보내왔다. _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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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8월12일 저녁 6시4분 일본 도쿄 하네다공항을 출발해 오사카로 향하던 일본항공(JAL) 123편이 일본 군마현 산악지대(다카마가하라산)에 추락했다. 탑승자 524명 중 520명이 사망했다. 승무원은 15명, 승객은 509명(한국인 6명)이었다. 사고 원인은 항공기 제작사인 보잉 기술자가 7년 전에 항공기 꼬리 부분을 잘못 수리한 탓이었다.

사고가 발생한 지 29년이 지났지만 JAL 추락사고 현장을 찾는 발길은 오늘도 끊이지 않는다. 사고 1년 뒤인 1986년 사고 현장 부근인 군마현 우에노 마을에 추모공원이 세워졌다. 인구 1330명의 산골이지만 매년 1만 명이 넘는 추모객이 찾아와 참배한다. 8월에 위령제가 열리면 JAL 임직원은 물론 일본 총리 등 정부 관계자도 참석한다. 2001년 11월에는 나루히토 왕세자가 방문했다.

<font size="3"><font color="#A48B00">참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font></font>

12월3일 오전 10시께 찾은 JAL 추락사고 추모공원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비가 우뚝 서 있었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모습이다. 위령비 뒤쪽으로는 신원 미상자를 모아놓은 납골당이 있다. 위령비 앞쪽으로는 JAL 추락사고를 설명하는 글과 사고 현장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지도 등이 놓여 있다. 추모공원은 지역 주민과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고, 그 비용은 JAL이 낸다. 지난 29년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다. 추모공원 운영자인 공무원 다카우에 마모루(33)는 “사고 현장은 안전에 실패한 공간이지만 한편으로는 안전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상징적 공간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마을 출신인 다카우에는 소방관이던 아버지에게 사고 당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때는 위령제 꽃을 손수 만들어 참배하고 사고 현장도 여러 차례 가봤다.

잊지 않으려는 노력은 JAL 내 안전계발센터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아베 세이지 간사이대학 교수(사회안전학)는 “유가족들의 끈질긴 요청으로 JAL이 사고 발생 21년 만인 2006년에 전시실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2014년 11월까지 15만여 명이 다녀갔다. 이곳에는 추락한 JAL 항공기 잔해, 블랙박스, 희생자 유서 등이 전시돼 있었다. 조종사와 관제탑이 나눈 음성 기록, 항로 등도 입체적으로 분석해 사고 당시 상황을 재연했다. 추락 전 30분간 항공기가 불안하게 비행할 때 일부 희생자는 가족에게 마지막 글을 남겼다. “서로 잘 챙기고 엄마를 많이 도와줘. 어제 저녁 식사가 우리의 마지막이었다니 정말 슬프다.” “나 죽을 것 같아. 산소가 부족해. 모두 행복하게 살아. 안녕.” 유서는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유품들과 함께 놓여 있다. 창현 어머니는 유품과 유서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세월호에서 떠내려온 창현이 물건을 받았을 때 느꼈던 막막함이 다시 밀려왔다.”


<font color="#A48B00">“원전에 찬성하는 쪽도, 반대하는 쪽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 사실을 철저히 파헤쳐서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공개하는 것, 그것이 진상 조사의 핵심이다.” -구로키와 기요시 전 일본학술회의 회장</font>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좀더 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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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L 조종사로 은퇴한 가토 에쓰오 항공안전추진연락회 부간사는 JAL 추락사고 진상 조사의 한계를 지적하며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갑작스러운 기내 감압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밝혔지만 당시 기내 분위기가 평온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는 이유에서다. 가토 부간사는 “현장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재발 방지 대책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font color="#C21A1A">#12월3일:</font> 일본에 오기 나흘 전부터 몸이 아파 계속 병원 신세를 져야 했는데 무사히 첫날 일정을 마쳐 감사하다. JAL 안전계발센터를 만들어놓고 사고를 교훈 삼으려는 회사 쪽 노력도 훌륭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재조사를 해야만 한다고 지금까지 요구하는 노조 쪽의 노력도 훌륭해 보인다. 숙박을 제공해준 (재일동포) 김성희씨의 세심한 배려도 고맙기 그지없다. 온돌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벽걸이용 온풍기가 난방의 전부라는 건 좀 낯설다.

<font size="3"><font color="#A48B00">공개에 비협조적인 정부를 압박할 무기</font></font>

2011년 3월11일 일본 동북부 연안에서 규모 9.0의 대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의 모든 전원이 꺼지고 방사성물질이 방출됐다. 이 사고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정부, 국회, 도쿄전력, 민간 등에서 조사위원회를 만들었다. 일본 방문단은 일본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에 설치된 조사기관(도쿄전력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한 세 사람을 만났다. 구로키와 기요시 위원장과 다나카 미쓰히코 위원, 이시바시 소토시 사무국장이다.

의학박사이자 전일본학술회의 회장을 지낸 구로키와 위원장은 “진상 조사는 의견을 배제하고 사실관계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원전에 찬성하는 쪽도, 반대하는 쪽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 사실을 철저히 파헤쳐서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공개하는 것, 그것이 진상 조사의 핵심이다.”

일본 정책연구대학원대학 연구원인 이시바시 사무국장도 공개가 비협조적인 정부를 압박할 무기라고 강조했다. “정부에 자료를 요청하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자료를 내놓지 않으려고 달리는 말처럼 시야를 가린 채 소극적으로 자료를 찾는다. 그 한심한 모습을 그대로 공개하라. 동시통역을 달아 전세계에 방송하라.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자료를 제출할 수밖에 없다.”

참고인 조사도 비슷했다. 국회 조사위원회는 19차례 위원회를 모두 공개로 진행했다. 총리 등 고위 관료 38명을 참고인으로 불렀다. 조사위원회에 나오지 않겠다고 버티면, 그 모습을 그대로 생중계하겠다고 천명했다. 결국 누구도 저항하지 못하고 출석했다.

반대로 하위직 직원을 조사할 때는 철저히 비밀을 보장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이후에도 위원장과 위원들은 정보를 외부로 유출하면 형사처벌을 받는다. 이시바시 국장이 설명한다. “하위직 한 사람을 지목해 처벌해버리면 윗사람은 면책이 된다. 문제의 근원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게 해서는 재발을 막을 수 없다.”

공개 청문회는 9·11 진상 조사에서도 빛을 발했다. 2001년 9월11일 아프가니스탄에서 훈련받은 알카에다 소속의 아랍 청년 19명이 항공기 4대를 납치해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국방부 건물을 공격했다. 이 사고로 약 3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 발생 14개월 만인 2002년 11월 조지 부시 대통령과 의회가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 진상조사위를 설치했다. 2004년 1월에 시작된 청문회에서 공중 납치된 4대의 항공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졌다. 청중은 승무원들이 납치 당시 항공기 내에서 대화한 녹음 테이프를 들었고 그 내용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으로 중계됐다.

를 쓴 필립 셰넌 전 기자는 “햇빛은 가장 훌륭한 살균제”라고 말했다. “9·11과 같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모든 정보도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 특히 유가족들은 위원회 활동을 일일 혹은 주간 단위로 평가해 언론에 발표하라. 그래야 조사가 대충 이뤄지지 않고 가만두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12월9일 ‘해외 사례에서 본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이 나아가야 할 길’ 워크숍에서)

<font size="3"><font color="#A48B00">“진상 조사에 유가족의 참여가 중요하다”</font></font>

<font color="#C21A1A">#12월4일:</font> 김성희씨가 손수 지어준 아침을 먹고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했다. 하지만 장소를 잘못 찾아 결국 30분이나 늦어 시작부터 꼬이는 듯했다. 기다려준 민의련(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 관계자들은 다행히 친절히 대해주셨고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하며 더 많은 얘기를 듣게 되어 다행이었다.


<font color="#A48B00">유엔은 1985년에 이미 ‘범죄 및 권력남용 피해자를 위한 정의의 기본원칙’을 선언한 바 있다. “형사 절차의 여러 단계에서 피해자의 시각과 관심사가 표명되고 감안돼야 한다”(제6조)고 천명했다. ‘분쟁 후 정의에 관한 시카고 원칙’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더 적극적으로 피해자 중심의 접근을 강조한다. </font>


2005년 4월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가 발생한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현장을 찾은 세월호 유가족 이남석·최순화씨가 헌화한 뒤 묵념하고 있다(오른쪽). 창현 어머니 최순화씨가 일본 방문 때 쓴 일기.

2005년 4월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가 발생한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현장을 찾은 세월호 유가족 이남석·최순화씨가 헌화한 뒤 묵념하고 있다(오른쪽). 창현 어머니 최순화씨가 일본 방문 때 쓴 일기.

오후에 만난 (국회 조사위원회 조사위원) 다나카 미쓰히코의 활동도 존경스럽다. 원전을 반대하는 한 사람으로서 1호기 정전 원인은 쓰나미가 아닌 지진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현장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피력했다고 한다. 결국 (도쿄전력에서) 현장에 들어가는 허락을 받아냈다고 한다. 엄청난 양의 방사능 피폭은 나이가 많은 자신에게는 문제될 게 없다며 현장 방문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는 것 같았다.

김성희씨가 주선한 (도쿄) 간담회도 감동적이었다. 장소는 일본어학원. 김성희씨는 간담회에 필요한 앰프 등 10kg이 넘는 물건들을 혼자서 들고 전철을 갈아타가며 간담회를 풍성하게 준비해줬다. 20~30명 참석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50명이 넘었다. 일본인 치과의사 간바야시 히데오가 노랫말을 쓴 세월호 추모 노래 을 들으며 펑펑 울었다. 음악의 힘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1987년 일본 철도 민영화 이후 서일본 여객철도(JR서일본)에서는 두 차례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1991년 5월14일 시가라키역 승강장에서 JR서일본의 임시열차와 시가라키 열차가 정면 충돌했다. 이 사고로 승객 42명이 숨지고 614명이 다쳤다. 2005년 4월25일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에서 JR서일본의 후쿠치야마선 급행 전철이 곡선 구간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아 탈선·전복했다. JR서일본은 1991년 시가라키역 사고 당시 책임이 없다고 발뺌을 했다. 사과도 없었다. 2005년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 때도 사고 열차의 기관사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일본 방문단은 두 사고의 유가족 5명을 만났다. 시가라키역 사고로 아내를 잃은 요시자키 순조(81)는 “JR서일본에서 사과를 받는 데만 12년이 걸렸다”고 했다. “두 딸과 여행을 떠났던 아내가 주검으로 돌아왔는데 JR서일본은 설명도 하지 않았다. 유가족이 설명회를 요구해 5차례 열었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항공사고와 달리 철도사고는 독립 조사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시자키는 다른 사고 유가족들, 법률가 등 650명과 함께 ‘철도안전추진회의’를 구성했다. 미국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처럼 일본에도 철도사고 조사위원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어떻게 철도사고의 진상을 규명하는지 배웠다. 국제 전문가를 초청해 심포지엄을 열고 정부와 의회 관계자도 만나도록 했다. 그 결과 2001년 항공·철도사고 조사위원회가 설립됐다. 이 위원회는 2008년 교통안전위원회로 확대 개편됐다. 1974년 항공사고 조사위원회가 생긴 지 34년 만이었다.

시가라키역 사고 유가족이 탄생시킨 항공·철도사고 조사위원회의 첫 진상 조사 대상이 2005년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였다. 조사위원회가 발표한 사고 원인은 A4용지 반쪽짜리로 요약됐다. 유가족이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지만 “보고서를 읽고 알아서 해석하라” “유가족은 비전문가니까 빠져라”라고 무시했다.

후쿠치야마선 사고로 아내와 여동생을 잃고 큰딸이 크게 다친 아사노 야사카즈(72)는 분노했다. 도시 설계·건축사로 환경소송에도 지원한 경험이 있는 그는 정부와 함께 유가족이 사고 원인을 규명하는 데 참여할 기준을 세우기로 했다. 1년6개월 만에 내놓은 보고서에서 “진상 조사에 유가족의 직접 참여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아사노는 JR서일본과도 마주 앉아 사고 원인 조사를 이어갔다. 최종 보고서는 사고 발생 9년 만인 2014년 4월에 나왔다. 아사노는 말한다. “사고 원인을 규명할 권리가 유가족에게 있다. 제3자에게만 맡겨두면 납득할 만한 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슬픈 마음은 일단 옆에 접어두고 진상조사위원회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해야 한다.”

유엔은 1985년에 이미 ‘범죄 및 권력남용 피해자를 위한 정의의 기본원칙’을 선언한 바 있다. “형사 절차의 여러 단계에서 피해자의 시각과 관심사가 표명되고 감안돼야 한다”(제6조)고 천명했다. ‘분쟁 후 정의에 관한 시카고 원칙’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더 적극적으로 피해자 중심의 접근을 강조한다. 진실위원회 구성에서 피해자·유가족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도록 하고 있다(원칙2). 또한 정의에 대한 접근권, 특히 민형사상 법적 절차에 직접적인 원고나 당사자로서 참여 기회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원칙3).

<font size="3"><font color="#A48B00">모두의 바람인 진실을 밝혀내는 일</font></font>

<font color="#C21A1A">#12월6일</font>: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 유족들을 만나고 사고 현장에도 가보았다. 평균속도 100km/h에 가까운 철도 옆에 아파트가 우뚝 서 있는 모습은 이해 못할 풍경이었다. 철로 옆 노는 땅이 아까워 아파트 한 동을 세워놓았단다. 열악한 환경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란다. 그런 곳은 주거 비용이 싸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10년이 다 되어가도록 여전히 재발 방지를 위해 싸우고 있는 유가족들이 존경스럽다. 그들은 사명이라고 했다. 나도 간담회 때 종종 사명이라는 말을 쓰곤 했는데 나의 앞날을 보는 듯했다. 나도 과연 저분들처럼 끝까지 잘할 수 있을까?

<font color="#C21A1A">12월7일:</font> 고베에 있는 인간과 방재미래센터는 우리 세월호 사고를 잊지 않고 어떻게 교훈 삼을 건지를 잘 보여주는 건물 같다. 관광 코스로 이어지기까지 고베현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텐데 안산시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행동들이 필요한 듯싶다. 안내해주는 자원봉사자만도 120명가량이란다. 우리 가족들도 나중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font color="#C21A1A">12월8일:</font> 일본 방문은 어디를 가든 기대 이상이었던 것 같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는데 앞으로 어떻게 갚아나가야 할지…. 우리의 소원이고 모두의 바람인 진실을 밝혀내는 일일 것이다.

도쿄·오사카(일본)=글·사진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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