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비추어라.”(이사야 60장 1절)
교황청이 내놓은 교황의 방한 주제는 이랬다. 교회를 통해 한반도에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천주교 교황방한준비위원회(방준위·위원장 강우일 주교)가 최근 4박5일의 교황 방한 세부 일정(표 참조)을 확정해 내놓자, 사회 안팎에서는 이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교황의 일정이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각종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국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교황을 기다린 사람들에게 방준위의 일정은 실망감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이 땅에서 받고 있는 고통에 귀기울여주길”</font></font>그런 기다림은 지난 8월5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날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와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 희망연대노조, 케이블방송통신 공동대책위원회, 민주노총 등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시민사회·노동·장애인 단체 회원들은 ‘프란치스코 교황님,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문구를 적은 펼침막을 든 채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거리 집회를 이어오고 있는 이들은 8월16일 광화문광장에서 교황 집전으로 ‘한국 순교자 124위 시복식’이 열리기 전 교황이 직접 농성장을 방문해달라고 말했다. 거리 농성자들의 ‘고립감’은 경찰이 교황이 참석하는 광화문광장 행사 당일 주변에 길이 4.5km, 높이 0.9m의 방호벽을 설치하기로 하면서 더욱 자라났다. 이들은 편지에서 “교황께서 이곳 광화문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기 이전에 우리가 이 땅에서 받고 있는 고통에 먼저 귀기울여주시기를 간구한다”고 말했다.
교황 방한이 공식 발표된 지난 3월 이후, 국내에는 여러 비극이 끊이지 않았다. 어린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고, 경남 밀양에서는 송전탑 건설을 둘러싸고 정부와 주민이 충돌하는 일이 있었다. 또 해군기지 반대운동을 벌이는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주변에선 천주교 성직자들이 끝없는 반대 활동을 함께해왔다. 그런 까닭에 이전 교황과 달리 사회적 목소리를 꾸준히 내온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를 찾는다면 이들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증폭됐다. 그러나 방준위가 좀처럼 반응을 내놓지 않으면서, 교황 방한이 그저 정부나 천주교의 마케팅에 그칠 것이라는 비판도 등장했다.
교황 방한을 둘러싼 논란은 지난 8월7일 방준위가 서울 명동성당에서 교황 집전으로 열리는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 강정마을 주민,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주민, 용산 참사 유가족, 쌍용차 해고노동자 등을 각각 3명씩 초청한다고 밝히면서 일단 수그러들었다. 앞서 방준위는 명동성당 미사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북한 천주교 관계자들에게도 초청장을 발송했다.
또 교황은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과 생존 학생들을 직접 만나기로 했다. 미사를 마친 뒤 제의를 갈아입는 방인 제의실에서 유가족·학생들을 만나는 형식이다. 이 만남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의 요청으로 성사됐다. 지난 5월30일 세월호 참사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서울 명동 천주교 서울대교구청을 찾은 유가족들이 교구장인 염수정 추기경을 만나 교황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요청했다. 지난 7월8일 경기도 안산 단원고를 출발해 전남 진도 팽목항을 거쳐 대전 월드컵경기장으로 향하는 750km(1900리)를 십자가를 짊어진 채 걷고 있는 단원고 2학년8반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와 2학년4반 고 김웅기군의 아버지 김학일씨도 교황의 초청으로 미사에 참석하게 됐다. 그러나 아버지들이 어깨에 메고 걸었던 십자가가 어떤 방식으로 교황에게 전달될지는 아직 정해진 바 없다(제1021호 표지이야기 ‘길 위에서, 기로에서’ 참조).
<font size="3"><font color="#C21A1A">세월호 도보순례 아버지들도 미사 초청</font></font>여론에 떠밀려 교황과 비극의 당사자들이 만나는 것처럼 비쳤지만, 그동안의 과정을 살펴보면 교회 안에서 ‘교황을 기다린 사람들’을 이어주기 위한 숨은 노력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사무총장 마리오 토소 주교의 방한이다. 정의평화평의회는 복음과 사회 교리에 따른 정의·평화 증진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교황청의 공식 기구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의 초청으로 지난 6월22일 한국을 찾은 토소 주교는 ‘교황 방한 심포지엄’ 기조연설을 시작으로 광주·대구 대교구를 방문했다. 그러나 그의 방한 ‘마지막 날’인 6월27일 일정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교황 방한을 앞두고 박근혜 정부가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는 강정마을 주민과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주민, 용산 참사 유가족, 쌍용차 해고노동자들과의 비공식 면담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서울 신길동 돈보스코센터에서 진행된 만남은 참석자 2~3명이 30분 동안 토소 주교와 면담하는 형식이었다. 면담에 참석했던 강정마을 주민인 고권일 해군기지 반대 대책위원장은 과의 통화에서 “토소 주교께서 워낙 자세히 알고 있어서 사실 우리가 설명할 게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고 위원장은 “토소 주교가 ‘해군기지 문제는 주민 입장에서 정부가 제대로 풀었으면 한다고 밝혔으며, 천주교예수회·제주교구 등이 강정마을을 위해 길거리 미사를 매일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날 고 위원장은 토소 주교에게 “한국 천주교가 강정마을처럼 어렵고 힘들고 탄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주시고, 꼭 한 번 강정마을을 방문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공식 일정이 확정돼 있어 약속은 할 수 없지만 교황이 직접 가보시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교황 마케팅’ 활용하는 정부에 대한 우려</font></font>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토소 주교를 만난 자리에서 쌍용차 사태 당시 경찰의 진압 동영상 등을 보여줬다. 김정욱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국장은 “‘한국 사회의 아픔이 곳곳에 있다. 쌍용차 문제와 관련해 정부가 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교황이 오셔서 대한민국 사회의 아픔을 보듬어주시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달했다”고 말했다. 앞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교황이 방한 기간에 타고 다닐 전용 차량을 만들어 기증하자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김정욱 사무국장은 “교황이 소박한 차량을 이용하겠다고 밝힌 뉴스를 보고, 노동자들의 노하우를 활용해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진행해보려 했다”고 말했다. 방준위가 밝힌 방한 기간 중 ‘포프모빌’(교황 전용 차량)은 기아차의 ‘쏘울’로 결정됐다.
천주교계 안에서는 토소 주교의 면담 내용이 교황에게 직접 보고됐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앞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우일 제주교구 주교와 만난 자리에서 강정마을 문제를 걱정하며 직접 언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토소 주교가 면담한 이들을 미사에 초청한 교황이 이들과 관련한 사회적 메시지를 내놓을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다. 토소 주교를 초청한 정의평화위원회 총무인 장동훈 신부는 “교황 방한이 발표된 뒤 교황 방한 자체를 마케팅으로 활용하려는 정부와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우려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믿을 교리와 행할 교리(사회·경제·정치 등)를 모두 강조해오셨는데, 그런 차원에서 우리 사회가 짚고 넘어갈 문제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그를 초청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앞서 토소 주교는 6월23일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교황의 방한 일정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를 위한 지금까지의 행보와 잘 맞지 않아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초대하는 모든 사람을 교황이 찾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교황에게는 많은 협력자가 필요하다. 주교와 사제, 수도자, 신자들이 가난한 자와 약자들 곁에 머물러주는 것이 교황에게 협력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처럼 교황 방한을 계기로 그동안 답보 상태였던 국내 현안들이 돌파구를 마련할 수도 있지만, 일부에서는 ‘방한 이후’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교황이 세월호 참사와 강정마을 사태, 밀양 송전탑 건설 갈등, 용산 참사, 쌍용차 문제 등에 관심을 내비친 것이,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사회적으로 보이거나 정부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안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이 1984년 교황 방한을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사례를 보면 그렇다. 장 신부는 “지금 한국의 현실이 교황 한 분에게 집중하고 있는데, 교황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보는 것은 과열된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국정원 댓글 사건 등으로 민주주의가 훼손된 상태에서 박근혜 정부가 국민과의 소통도 못하고 있는데, 교황 방한으로 대내외적으로 정부가 도덕적으로 인정받았다고 스스로 해석할까봐 걱정된다. 지속적으로 사회문제를 제기해온 교회나 진보단체 등도 교황 방한 이후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 고민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교황 ‘방한 이후’ 시간도 고민해야</font></font>교황의 행보가 아닌 그가 던지는 메시지를 우리 사회에 맞게 제대로 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을 거치는 등 오랫동안 교회를 지켜본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교황은 방한을 통해 국내의 민감한 사안들과 접촉한다. 그 어떤 외국 정상들의 방한과 다르다. 일정을 두고 교황청이나 한국 천주교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교황이 이들을 만나 한국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지 주목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교황을 어떻게 읽느냐가 과제로 남은 셈이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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