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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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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말레이시아 여객기 추락사고 후폭풍…
미-러 격돌하는 지정학적 대결지로 다시 부상해
등록 2014-07-23 14:34 수정 2020-05-03 04:27
지난 7월17일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추락한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의 잔해들. AP 연합뉴스

지난 7월17일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추락한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의 잔해들. AP 연합뉴스

“우리는 구체적인 조처들을 봐야 한다. 단순히 말이 아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월16일(현지시각)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 내전과 관련해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강화하는 조처를 발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가 기대하는 건 러시아 지도부가 우크라이나에서 그들의 행동이 경제 약화와 외교적 고립 등의 결과를 치를 것임을 보는 것이다”라며 러시아가 치러야 할 대가를 구체적으로 거론했다.

이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즉각 반박했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은 전반적으로 부메랑 효과를 받을 것이고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나는 이 조처가 미국 행정부와 미국 국민의 장기적인 전략적 국익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맞받아쳤다.

여객기 추락한 곳은 반군이 장악한 지역

오바마 대통령이 러시아에 대한 제재 조처 강화를 발표한 지 하루 만에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말레이시아 여객기가 미사일을 맞고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모든 정황상 현재로선 여객기를 추락시킨 미사일 발사는 반군 쪽 소행임이 유력하다. 미국 정보 당국은 여객기를 추락시킨 미사일은 러시아의 부크 미사일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오바마 행정부는 우크라이나가 그 지역에서 여객기를 추락시킨 미사일을 발사할 능력이 없다고 믿고 있다고 미국 관리가 전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앞서의 공방을 답습하고 있다. 그는 사건 직후 반군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군사작전에 책임을 물었다. 그는 “이 비극은 그 땅에 평화가 있었다면, 남동부 우크라이나에서 군사작전이 강화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로, 근본적 책임이 그 지역에서 반군 소탕에 나선 우크라이나 정부의 군사작전에 있음을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의 말은, 설령 여객기가 반군의 미사일에 격추됐다고 해도, 그 땅에 책임이 있는 우크라이나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러시아 쪽은 일단 현장조사를 위한 미국 전문가들의 입국을 수용했다. 하지만 현장조사가 제대로 진행될지는 의문이다. 여객기가 추락한 곳은 반군이 장악한 지역이다. 또 이미 반군 쪽이 비행기의 블랙박스를 수거했다는 보도가 나온 상태다.

이제 미국은 피할 수 없는 시험대에 올랐다. 여객기 추락의 책임이 어디에 있든 간에 우크라이나 사태와 근본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처지에 몰린 셈이다. 크림반도가 포함된 우크라이나는 이제 미국과 러시아가 격돌하는 전통적인 지정학적 대결지로 다시 부상했다. 원래부터 우크라이나 지역은 제국주의와 냉전시대의 지정학에 바탕해 열강들의 대결과 전쟁이 벌어진 전형적인 ‘핫스폿’(열전 지대)이었다.

러시아의 등장은 근현대 지정학의 등장과 일치한다. 프랑스·영국·미국이 차례로 주축이 된 해양세력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러시아의 확장 및 남하를 막기 위해 벌인 대결과 전쟁은 사실상 제국주의와 냉전시대를 관통하는 분쟁과 동의어다. 러시아가 올해 초 강제 합병한 크림반도는 러시아의 탄생과 확장의 고향이다. 크림반도 남서단 체르소네스 해안의 작은 언덕에는 세인트블라디미르성당이 있다. 블라디미르 대제는 슬라브 문명의 창시자로, 이는 키예프공국을 거쳐 러시아로 발전했다. 블라디미르가 1988년 기독교 세례를 받고 국교로 받아들인 곳이 이 성당이다. 이런 점에서 크림반도는 러시아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북으로 올라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건설된 러시아가 17세기부터 세력을 확장하며 흑해 연안으로 다시 진출하자, 프랑스를 시작으로 한 서구 열강들은 오스만제국을 부추겨 러시아와 6차례 전쟁을 벌였다. 그 절정은 영국과 프랑스가 터키와 연합해 러시아와 벌인 19세기 중반의 크림전쟁이다. 크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흑해에서 군함의 항해권을 상실하면서, 근대화에 절치부심한다.

크림전쟁은 해양세력의 영국과 대륙세력의 러시아가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놓고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격돌한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선이었다. 이 그레이트 게임은 서쪽으로는 크림전쟁, 동쪽으로는 러일전쟁까지 확산됐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로 그레이트 게임은 막을 내리고, 소련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쟁들의 신호탄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을 침공한 나치 독일은 승부수를 모스크바가 아니라 흑해 연안에 던졌다. 크림반도를 핵심으로 한 흑해 연안을 거쳐 캅카스 지역으로 나아가, 러시아의 곡창 및 유전 지대를 장악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대패는 나치 독일 패망의 원인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영·소 3국 정상은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전후 세계를 분할하는 냉전 질서를 기초했다. 이 회의에서 소련은 독일을 분할하며 그 동쪽으로부터 동유럽과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의 내륙 지역에서 세력권을 인정받았다.

1991년 소련의 몰락으로 흑해 연안에서 서쪽 중국 접경 지역까지 중앙아시아에 큰 세력 공백이 생겼다. 이는 소련 몰락 뒤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쟁들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젖힌 신호탄이다. 이 지역에 모자이크처럼 뒤섞인 민족과 종교 분쟁이 각론이지만, 크게 보면 이 지역의 패권 질서가 아직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련 몰락 이후 러시아는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회복하려 했고, 미국 등 서방은 역사상 이 지역에서 한 번도 누리지 못한 석유를 비롯한 자원 등에 대한 전략적 통제권을 수립하려 했다. 그 결과는 러시아나 서방에 기댄 부패한 권위주의 정권의 난립이었고, 이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소요는 이 지역의 분쟁을 더욱 경화시켰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소련 몰락 이후 이 지역에서 벌어진 전형적인 분쟁의 연장선이자 종합판이다. 이 지역을 오고 간 수많은 민족과 세력들이 남긴 민족분쟁에다 다시 불붙은 러시아와 서방의 지정학적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근현대 지정학의 아버지 해퍼드 매킨더의 ‘중심축 지역’ 이론으로 이 지역의 분쟁을 설명할 수 있다. 매킨더는 유라시아 대륙의 인구와 부가 몰려 있는 심장부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면, 그 출입구가 되는 ‘중심축 지역’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중심축은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제국 단위의 정치조직이 계속 등장하면서 이 중심축 지역의 통제권을 놓고 각축을 벌인 역사적 사실을 그 근거로 들었다.

아프간 전쟁에 미국의 개입을 기초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도 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다. 그는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려면, 흑해에서부터 신장위구르 지역까지 중앙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하는 대륙국가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의 아프간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주도한 그는 이런 철학에 기초했고, 실제로 소련의 패망을 유도했다.

러시아가 올해 초 크림반도를 합병하자, 미국 내에서 브레진스키 같은 매파들은 이를 제2차 세계대전의 문을 연 나치의 체코 수데텐란트 합병에 비유하며 군사적 대응도 불사하라고 촉구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 지역의 다수 민족인 독일계 민족의 보호를 명목으로 이 지역을 합병하는 것을 영국 등이 묵인하면서, 나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아갔다. 미국이 그동안 군사적 행동에 나서지 못한 것은 기본적으로 힘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중동에서도 미군 전력을 빼기에 급급한 상황에서 러시아의 한가운데에 군사력을 전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미국의 조처, 향후 국제질서의 중대한 분수령

그럼에도 이제 오바마 행정부는 브레진스키의 주장을 실행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러시아가 순순히 여객기 참사의 책임을 질 리 없고, 또 이를 이유로 우크라이나 내전에서 발을 빼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과연 러시아를 상대로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조처를 취할지는 향후 국제질서에서 중대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놓고 종전처럼 말로만 공방을 벌인다면, 미국의 주도권 상실을 입증하는 ‘포스트 냉전의 종말’은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만약 미국이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조처를 강구할 때 벌어질 상황 역시 미국을 포함한 모든 세계를 더욱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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