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 등을 돌릴 필요가 없다. 장기적으로 함께 가치를 창출하는 방안에 접근해야 한다. 이동통신사들이 과거와 달리 인터넷 서비스 업체와 윈윈 해야 하는 것이 시대적인 흐름이다.”(하성민 SKT 사장)
“모바일 서비스를 방해가 아닌 혁신으로 봐달라. 통신업계와 모바일 서비스 업체가 협력하면 더 큰 혁신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이석우 카카오 대표)
아름다운 화음이 울려퍼졌다. 무대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지난 2월24~27일(현지시각) 열린 세계 최대의 모바일 전시회인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였다. 이동통신 업계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업계 사이에는 상생·협력 같은 따듯한 말 몇 마디가 오갔다. MWC는 세계이동통신사연합회(GSMA)가 주최하는 ‘이동통신사들의 잔치’다. 올해도 어김없이 삼성 등 제조사들은 새로운 스마트폰을 내놨고, SKT 등 이통사들은 기존 LTE보다 빠른 네트워크 기술을 뽐냈다. 그런데 올해의 진정한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었다. SNS가 단독 공연 자리를 꿰찼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최근 페이스북이 인수한 모바일 메신저 ‘와츠앱’의 CEO 얀 쿰, 이석우 카카오 대표, 비즈니스 미팅용 SNS인 ‘쉬무즈’의 미셸 갤런 대표 등이 기조연설자로 연단에 섰다.
사실 그동안 이통사들은 SNS를 비롯한 모바일 서비스 업체들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이들이 자신의 네트워크망에 공짜로 올라타서 문자·음성통화 수익을 갉아먹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플랫폼에서 이익을 내고 있는 사업자들이 이제는 무임승차에서 내려와야 한다. 데이터 트래픽 과다에 따른 부담을 서비스 사업자들도 나눠져야 한다.” 하성민 SKT 사장이 2012년 MWC 행사장에서 했던 말이다. 당시 이동통신 업계에서는 “그들은 무단 침입자”(코버트 슈미트 도이체텔레콤 부사장)라고까지 공격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불과 2년 만에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귀한 손님’으로 대접해가면서 SNS 사업자들을 MWC에 초청했다.
적에서 동지로 돌아선 셈이다. “개발도상국에서 데이터 요금은 여전히 너무 비싸다. 요금을 내려야 한다. 페이스북과 결합 요금제를 출시하거나, 저렴한 데이터를 보급하는 게 이통사들에도 장기적으로 이득이 될 거다. 세계 77억 명의 모든 사람을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것이 내 목표다. 911 응급전화를 하듯이, 인터넷에서도 누구나 그런 기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만들고 싶다.” 마크 저커버그는 담대한 포부를 밝혔다. 사용자 10억 명을 거느린 페이스북 CEO가 던진 메시지는 강렬했다. 자신 있게 이통사한테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MWC에서 필리핀의 한 통신업체는 페이스북 전용 요금제를 내놨다. 2010년부터 페이스북은 데이터 요금 걱정 없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각국의 50여 개 통신사와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스마트폰 제조업체들도 그의 뒤를 좇는다. 저커버그는 지난해 6월 한국을 방문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 경영진들과 7시간 가까이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혁신 주도하는 서비스 플랫폼 업체들2013년 페이스북의 매출은 78억달러(약 8조원). 삼성전자(230조원) 매출의 겨우 3%, SKT(16조원)의 절반 수준이다. 그러나 지금 모바일 생태계를 쥐고 흔드는 ‘거인’은 페이스북이다. 몇 년 전부터 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톡·와츠앱·라인·위챗 등의 SNS가 정보기술(IT), 특히 모바일 트렌드를 주도해가는 모양새가 뚜렷해지고 있다. 왜일까?
우선 권력의 중심축이 웹에서 모바일로 옮겨가고 있다. “세계는 지금 모바일이라는 가상의 길 위에서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제 모든 비즈니스는 모바일을 통하지 않고는 생존조차 보장받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국내의 경우만 봐도, 2013년 상반기부터 모바일 트래픽이 PC를 앞섰다. 이번 소치 겨울올림픽 시청 행태도 이를 뒷받침한다. 네이트는 소치 올림픽 생중계와 하이라이트 동영상을 모바일로 이용한 비중이 82%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하드웨어의 강자도 IBM에서 삼성과 애플로 자리바꿈했다. 최근 몇 년 새에는 스마트폰 운영체제(OS)를 놓고서, 애플과 구글의 패권 다툼이 폭풍처럼 지나갔다.
“이제 하드웨어의 한계가 왔다. 스마트폰이 PC와 똑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6개월마다 한 번 바꾸던 PC를 지금은 3년쯤 써도 불편하지 않다. 지금 갤럭시S3를 써도 불편하지 않은데, 갤럭시S5가 나온다. 제조사들은 화면, 카메라 화소 수를 좋게 하고 새로운 기능을 많이 넣지만,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대신에 구글이 문자메시지 앱을 바꾼 것이 사용자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시대가 됐다.” IT 전문 매체인 최호섭 기자의 진단이다. 하드웨어 제조사들이 한계에 다다르고, 소프트웨어 제조사들이 점차 뒤로 물러나는 사이에, 서비스 플랫폼 업체들이 떠오르며 혁신을 주도하는 모양새다.
플랫폼은 그릇과 같다. 그 안에 무엇을 담을지는 무궁무진하다. 구글의 안드로이드, 애플의 iOS 같은 플랫폼에는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이 차려졌다. 서비스 플랫폼의 그릇은 더 다양한 형태로 빚어진다. 카카오만 하더라도 메신저로 시작해, 게임을 그릇 위에 얹었고, 각종 콘텐츠와 쇼핑 아이템까지 담았다. 이제는 돈까지 담겠단다. 이석우 대표는 MWC에서 “국내 은행들과 협업해서 소액의 현금을 친구들과 주고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IMAGE2%%]요즘 IT 업계에서는 페이스북·트위터·구글 등을 ‘플랫폼 거인’이라고 일컫는다. 거인들은 모바일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성큼성큼 발을 떼고 있다. 페이스북은 최근 190억달러(약 20조원)를 들여 모바일 메신저 와츠앱을 인수했다. 와츠앱은 하루 메시지 전송이 200억 건이 넘고 사용자가 4억5천만 명에 이르지만, 지난해 매출이 2천만달러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페이스북은 자사 시가총액(1730억달러)의 10%가 넘는 거액을 투자했다.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저커버그는 “카카오나 위챗 등은 성장 초기 단계인데도 이미 이용자 한 사람당 2~3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와츠앱은 인수 가격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모바일 메신저 시장은 와츠앱(북미), 라인(일본), 카카오(한국), 위챗(중국) 등이 영역을 확고히 하는 지도가 대충 그려졌다.
음성통화 시장까지 넘보는 거인들이들은 음성통화 시장까지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와츠앱은 올해 2분기에 무료 음성통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카카오의 보이스톡, 구글의 행아웃 등은 무선에 기반한 인터넷전화 서비스(mVoIP)를 이미 제공해왔다. 라인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3월부터 라인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국내외에 저렴하게 전화를 걸 수 있는 ‘라인콜’ 서비스를 일본·미국 등 6개국에서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라인 이용자끼리만 가능하던 무료통화를 넘어, 인터넷전화 영역까지 발을 넓힌 셈이다.
이를 바라보는 이통사의 속은 쓰리다. 자신의 네트워크망을 이용해 음성통화(mVoIP)와 문자메시지(메신저) 영역에 야금야금 침범해 들어오고 있어서다. 더구나 트래픽이 급증해 네트워크 투자비 부담이 늘어나더라도, 이는 온전히 이통사의 몫이다. 동영상 재생으로 트래픽을 유발하는 스마트TV도 마찬가지다. 이런 탓에 국내 이통사들은 삼성전자의 스마트TV 인터넷 접속을 차단하고, 낮은 데이터 요금제를 쓰는 사용자들에겐 카카오 보이스톡을 이용할 수 없도록 제한을 두는 어깃장을 놓았다. 이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등 시민사회단체는 카카오 보이스톡을 차단한 KT와 SKT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어,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런 이통사의 ‘반격’은 망중립성을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망중립성이란, 인터넷 통신망을 공공재로 보고 누구나 차별 없이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통신업체가 트래픽·콘텐츠·애플리케이션 등을 차단하거나 차별적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논리다. 미국에선 연방통신위원회(FCC)가 망중립성 원칙을 못박은 규칙으로 통신업체를 규제하는 것과 관련해, 통신업체인 버라이즌이 소송을 내어 지난 1월 통신업체 손을 들어주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국내에선 지난해 말 미래창조과학부가 ‘통신망의 합리적 트래픽 관리·이용과 트래픽 관리의 투명성에 관한 기준’을 발표하면서 “2014년까지 모든 스마트폰 요금제에서 mVoIP를 허용하도록 하겠다”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사실 이통사들은 서비스 플랫폼 사업자들과의 주도권 다툼에서 이미 한 차례 쓴잔을 마셨다. GSMA가 문자메시지 이외에 화상통화와 파일 전송 기능까지 갖춘 ‘조인’이라는 자체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를 내놓았지만, 와츠앱이나 카카오톡에 뺏긴 시장의 주도권을 되찾아오는 데 실패했다. 앞서 삼성 등 휴대전화 제조사들도 자체 OS를 내놨다가 처참하게 깨진 경험이 있다. 이들이 안드로이드 동맹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통사들도 서비스 플랫폼 사업자들과 ‘상생과 협력’이라는 생존 전략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작은 플랫폼들의 연대가 필요하다”그렇다면 플랫폼 거인 중에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까? “구글이 OS와 서비스 기반을 둘 다 갖고 있기 때문에 유리해 보인다. 하지만 페이스북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엄청난 돈을 주고도 와츠앱을 인수한 건 구글에 넘겨주지 않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을 거다. 앞으로는 구글과 페이스북이 이용자들의 하루 24시간 중에서 몇 시간을 자신의 서비스로 가져가느냐를 놓고 치열한 서비스 경쟁을 펼치게 될 것이다.” 류한석 기술문화연구소 소장은 서비스 플랫폼 사업자들의 독주가 당분간 계속되리라고 내다봤다.
그들이 다다른 곳은 ‘거인들만의 왕국’일지 모른다. “웹이라는 수평적 은하계가 이제 플랫폼 타이탄들을 중심으로 쪼개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일고 있다. 페이스북의 소셜 플랫폼, 구글의 검색 플랫폼 등 강력한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가진 업체들에 의해, 기존 웹의 수평적인 구조가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지현 SK플래닛 상무가 에서 제시하는 대안은 이렇다. “어느 한 기업이 플랫폼을 독점하면 생태계는 유지될 수 없다. 번성하는 플랫폼은 외부의 여러 서비스와 상생하는 장을 만들어야 한다. 또 특정 플랫폼이나 기업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작지만 다양한 고유 플랫폼을 만들어 틈새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구축된 작은 플랫폼은 서로 연대함으로써 거대한 플랫폼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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