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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삶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김기수(47·가명)씨는 1994년 대학을 졸업하고 어렵잖게 취업했다. 3년 뒤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서울 강북의 4천만원짜리 전셋집에 신혼집을 차렸다. 아이를 낳고선 외환위기 직후 쏟아져나온 20평대 아파트로 내 집 장만에도 성공했다. 2004년엔 같은 평수의 강남 지역 아파트로 집을 옮겼다. 1억5천만원가량의 빚이 생겼다. 그래도 간호사인 아내와 맞벌이로 한 달 450만원의 순수입이 생기는 덕에 차근차근 갚아나갈 수 있었다. 적정하게 돈도 쓰며 살았다. 매주 마트를 가고 철마다 옷도 샀다. 특별히 풍족하지도, 특별히 부족하지도 않은 생활이었다.
소득 찔끔 올랐지만 소비는 줄어10년 뒤인 2014년, 김기수씨네 순수입은 한 달 800만원으로 두 배가량 늘었다. 빚도 거의 다 갚았다. 그러나 생활은 되레 쪼그라들었다. 마트는 끊었다. 꼭 필요한 물건만 동네 슈퍼에서 산다. 옷장 안은 몇 년째 그대로다. 중학생인 딸 교육비 100만원과 양쪽 부모님 용돈 80만원을 빼곤 부부를 위한 지출은 무조건 억제다. 그렇게 아낀 100만~200만원의 여윳돈은 저축한다. 딸의 뒷바라지로, 노후자금으로 쓸 돈이다. 이제 삶은 악착을 떨어야 지속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최근 1~2년 새 소비를 많이 줄였다. 앞으로 10년은 딸을 지원해야 하는데 일은 계속할 수 있을까, 굉장히 불안해서다. 아내가 체력적인 이유로 일을 그만두려 하는데, 앞으로는 친구와 맥주 한잔 하는 것도 끊어야 할 듯하다.”
그의 삶은 10년 만에 이렇게 바뀌었다. 소득은 늘었지만 소비는 줄었다. 대부분의 가계도 보수적인 소비성향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통계청이 지난 2월21일 발표한 ‘2013년 가계동향’ 자료를 보면, 지난해 가계의 흑자액(가처분소득-소비지출)은 한 달 평균 90만원이었다. 지난해 가계는 소득에서 세금·사회보험료·이자비용 등 비소비지출을 제하고 338만1천원을 쓸 수 있었는데, 이 중 90만원은 그냥 남겨뒀다는 뜻이다. 2012년보다 4.7% 증가했다. 소득이 크게 늘어 돈이 많이 남은 건 아니었다. 소득이 찔끔 오르긴 했지만 소비는 그만큼도 하지 않아 돈이 남은 것이다. 전형적인 ‘불황형 흑자’다. 실제 지난해 가처분소득은 1년 전보다 1.9%(2012년 증가율 6.4%) 오르는 데 그쳤다. 그런데 소비지출 증가율은 그나마 0.9%(2.7%)로 거의 제자리였다. 통계청은 “정부가 지난해 교육비·보육비를 지원하면서 가계의 소비지출이 다소 줄어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효과가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소비지출 증가율은 1.76%로 가처분소득 증가율에는 못 미친다.
가계는 역대 최고로 돈을 아끼고 있었다. 지난해 가계의 평균소비성향(가처분소득 대비 소비지출 비율)은 73.4%였다. 쓸 수 있는 돈이 100만원 있는데도 73만4천원만 썼다는 뜻이다. 이 비율이 작성된 2003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한복판에 있던 2008년에도 이 비율은 75.6%였다.
국가의 재무제표 같은 국민계정을 들여다봐도 가계가 소비를 축소하는 경향은 확연히 드러난다. 지난해 가계 지출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민간소비 증가율은 1년 전보다 1.9% 늘어나는 데 그쳤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2.8%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민간소비 증가는 GDP 성장과 비슷한 흐름을 보여왔으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인 2009년부터는 GDP 성장률을 밑돌고 있다. 경제 규모가 커지는 속도만큼 가계가 돈을 쓰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소비 파업에 가장 적극적인 중간계층가계는 외환위기 이후부터 추세적으로 씀씀이를 줄여오긴 했다. 소비에 직결된 가처분소득 증가세가 빠르게 둔화된 결과였다. 저임금의 비정규직 일을 하고 영세한 가게를 운영하는 가계가 늘면서 빚까지 갚아야 하니 쓸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소득분배 구조 악화도 소비 부진을 부채질했다. 고소득층은 소비성향이 낮아 돈을 덜 쓰는데도 사회의 부는 고소득층에게만 집중되니, 전체적으로는 소비가 줄어들었다. 2000년대 후반에는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자산 가치까지 떨어져 가계의 소비심리는 더 위축됐다. 그러나 부정적인 소득효과와 자산효과로 가계의 소비 부진을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2011년부터는 가처분소득 증가율이 소비 증가율을 앞서면서 다소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주머니 사정이 조금 나아졌는데도 가계가 지출을 계속 거부하는 건 ‘소비 파업’에 가깝다. 그 배경엔 만성화된 ‘불안’이 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힘들 것이란 확신에 무조건적인 저축으로 대비에 나선 것이다. 불안이라는 주관적이며 심리적인 요인이 가계의 소비 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실증적인 연구 결과가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 2월 내놓은 ‘최근 소비부진과 가계의 시간선호 변화’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시기별로 가계의 현재와 미래 소비 간 ‘시간선호’를 계산했다. 그 결과 2000년대 들어 가계가 돈을 당장 소비하는 것보다 미래에 소비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시간선호의 구성 요소인 시간할인인자(가계가 현재 소비를 줄이는 대신 미래 소비를 늘리려는 정도)는 1990~99년 0.982에서 2000~2013년 0.999로 상승했고, 상대적 위험기피도(미래 소비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될 경우 현재 소비를 더 많이 줄이려는 정도)도 같은 기간 0.611에서 0.941로 뛰었다는 것이다. 특히 상대적 위험기피도는 2008년을 기점으로 크게 상승한 뒤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풀이하면 이렇다. “2008년 이후 저금리로 인해 현재 소비에 대한 기회비용이 낮아졌더라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확대로 현재 소비의 주관적 비용이 커지면서 소비를 미래로 지연시키려는 성향이 강화됐다.” 당장의 괴로움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압도적으로 커지면서 가계가 소비 연기를 합리적인 행위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최근 2~3년 사이 나타난 소비 파업은 2008년 이후 소비 행위에 대한 가계의 심리적 저항이 거세져 나타난 결과인 것이다. 이 보고서는 가계의 불안 심리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인구노령화에 따른 노후 부담 증대, 고용안정성 감소, 소득 불균형 심화 등을 지목했다.
소비 파업에 가장 적극적인 계층은 중간계층이었다. 소득 3분위(소득 상위 40~60%)는 지난해 5개 소득분위 가운데 유일하게 전년보다 소비를 줄였다. 감소폭도 2.1%나 된다. 식료품, 의류·신발, 교통비 등에서 지출이 줄줄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교육비는 10% 넘게 쪼그라들었다. 계층 이동 욕구가 높은 계층인데도, 그 전통적 수단인 자녀에 대한 투자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고소득층마저 허리띠 졸라매는 상황학원강사인 고유경(32·가명)씨의 사례를 보자. 그는 올 들어 6살 아들의 미술학원과 공부방을 끊었다. 평소 교육에 열성적인 그는 아이가 관심 있어하는 학습지·창의교육·독서·한글·블록방 등에 사교육비를 아낌없이 지출했다. 그러나 가계의 한 달 순수입 400만원 가운데 사교육비가 50만원을 넘어서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는 “지금까지 안 먹고 안 입어서 교육비를 댔다. 그런데 이젠 빚 갚기가 우선”이라고 했다. “1억원의 대출이 있다. 10년에 걸쳐 천천히 상환하려 했다. 그런데 빚이 있으니 교육이나 노후가 더 불안하게 느껴진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에 빚을 갚아 막막함을 덜고 싶다.”
소득이 높고 빚이 적다고 여유로운 건 아니다. 고소득층인 소득 1분위(소득 상위 20%)도 생활 규모를 줄이고 있었다.
박희택(44·가명)씨에겐 ‘집’이 불안의 근원이다. 그는 1년 전부터 중학생인 딸과 초등학생인 아들의 공부를 직접 가르친다. 그 덕에 사교육비는 각각의 영어학원비로 50만원이 들어간다. 원래는 월수입 700만원 가운데 절반을 사교육비로 썼다. 그러나 ‘최후의 보루’라 생각하던 교육비도 전세금에 대한 공포 앞에선 뒤로 밀렸다. “많이 버는 편인데도 아직 2004년식 승용차를 수리하며 탄다. 푼돈을 아끼려고 담배까지 끊었다. 이렇게 모은 돈은 전세금을 올리는 데 쓸 생각이다. 지금도 전세금이 4억원인데 재계약 때 분명 5천만원은 더 올려달라고 할 것이다. 차라리 집을 살까 생각도 하고 있다.” 소비가 급속히 위축된 2008년 직후에도 완충작용을 해주던 고소득층마저 허리띠를 졸라매는 상황인 것이다.
교육비·전세금 같은 눈앞의 위험 요소가 없어도 불안은 떨쳐지지 않는다. 삶이 곧 불안이기 때문이다. 문미숙(40·가명)씨는 영어 전문 과외를 하며 한 달 500만원을 번다. 방학 때는 수입이 1천만원까지 늘어난다. 싱글인 그에겐 풍족한 규모다. 그런데도 스스로에게 한 달 200만원의 ‘월급’을 주며 지출을 엄격히 관리한다. 신용카드는 자른 지 오래고, 통장도 지출 목적별로 쪼개 사용한다. “외환위기가 터진 즈음에 졸업한 세대여서 그런지 트라우마 같은 게 있다. 작은 (경제적 충격의) 신호에도 예민해진다. 내가 싱글이어서가 아니라, 각자 생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샴페인이 가득해도 터트릴 수가 없다. 심리적으로 그게 안 된다.”
세대별로는 노인 세대에서 소비지출 감소폭이 가팔랐다. 지난해 60살 이상(가구주 기준)에선 소비를 3.4%나 조였다. 은퇴 이후 고정적 수입이 끊긴데다 모아놓은 자산도 없으니 지출을 줄여서라도 ‘장수리스크’에 대비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고령층 가구가 소비보다 저축에 매달리는 건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현상이다(LG경제연구원, ‘가계 흑자 계속되지만 소비 늘릴 여유는 없다’ 보고서).
“아프지 않기만 기도할 뿐이다”2년 전 금융회사에서 은퇴한 홍민철(61·가명)씨의 한 달 용돈은 경조사비를 제외하면 30만원 정도다. 은퇴 전 용돈의 ‘반의 반’도 안 된다. 친구 만나는 횟수를 뚝 줄였고 걷기 운동과 독서 외엔 별다른 취미도 만들지 않았다. 내 집에 살며 3억원이 넘는 현금성 자산도 있지만 최대한 헐지 않을 생각이다. “아들이 결혼하면 집값을 보태줘야 하니까 남는 건 내 집과 1억원 정도다. 곧 국민연금을 받더라도 앞으로 아내와 20년 넘게 살기엔 불안한 돈이다. 아프지 않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20~30대(가구주가 39살 이하 기준)는 상대적으로 돈을 많이 썼다. 지난해 소비증가율이 3.2%로 모든 연령대 중 가장 높았다. 가정용품도 꽤 샀고 오락·문화도 즐겼다. 그러나 가파른 소득증가율(7.4%)에 비하면 충분한 소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가계가 지출을 엄격히 통제한 덕에 재무 건전성은 나아졌다. 가처분소득보다 소비지출을 더 많이 하는 ‘적자가구’ 비율은 2008년 26.7%에서 지난해 22.5%로 감소했다. 역대 최저 수준이다. 환영 할 일만은 아니다.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소장의 지적은 이렇다. “경제발전 초기 단계에선 가계의 저축이 중요해도, 지금처럼 경제규모가 커지면 소비가 잘돼야 한다. 여전히 경제의 절반 이상은 민간소비로 이뤄진다. 당장 내가 우리 동네 가게의 물건을 사줘야 동네 상권이 굴러가지 않겠나.”
가계가 소비를 계속 거부하면 경제에는 치명적이다. 가계가 돈을 풀지 않으면 ‘국내 제조업·서비스업의 생산 감소 기업의 고용 축소 가계 소득 감소 가계 소비 감소’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민간소비가 10억원 늘어날 때마다 19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8억2천만원의 부가가치가 생겨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경제 선순환 고리의 중심에 있는 가계 소비를 되살려야 하는 이유다.
게다가 가계가 과도하게 소비를 통제하면 개인은 불행해지고 사회의 활력도 떨어진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는 소비 파업을 “가계가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하는 수동적인 생존 전략의 하나”로 봤다. 그리고 “나와 내 주위 몇몇만을 지키기 위한 이런 전략은 주변을 돌아보지 않게 하고 공론의 장 형성을 막아 사회가 변화하지 못하게 하는 부정적인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나 홀로 낙관적인 정부정부는 나 홀로 낙관적이다. 올해 민간소비가 전년보다 3.3%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물가 안정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일자리가 늘면서 실질구매력이 크게 개선될 것이란 설명을 달았다. 국내 민간 경제연구소의 전망치인 2.7~2.8%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그러나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깝다. 박근혜 정부가 집권 2년차의 핵심 과제로 2월25~27일 줄줄이 내놓은 경제혁신 3개년 계획, 전·월세 대책, 가계부채 대책은 하나같이 가계 불안의 씨앗이 된 구조적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58~60쪽 참조). 이는 가계에 ‘소비를 더 조이고 예비적 저축을 더 강화하라’는 신호로 작용할 수 있다. 김건우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출 원리금 상환 부담 증가, 전·월세 보증금 증가, 노후 불안 증가 등과 같은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가계의 소비심리는 완전히 회복되기 어렵다”고 전망했다.
지금이라도 가계가 고통스러운 소비 파업을 끝내도록 도와주지 않는다면, 성장이 멈추고 욕망이 거세된 일본이 우리의 돌이킬 수 없는 미래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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