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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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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엔 유리천장 발 밑엔 ‘시간제 덫’

20~60대 여성들이 말하는 ‘한국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산다는 것’
등록 2014-02-13 15:16 수정 2020-05-03 04:27
서울의 한 아파트 안내판에 붙어 있는 ‘경력 단절 여성’을 위한 각종 자격증 시험 준비 수강생 모집 광고. 정부는 경력 단절 여성이 195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한다.탁기형

서울의 한 아파트 안내판에 붙어 있는 ‘경력 단절 여성’을 위한 각종 자격증 시험 준비 수강생 모집 광고. 정부는 경력 단절 여성이 195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한다.탁기형

“여성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나라를 반드시 완성하겠다.” 대한민국 첫 여성 대통령은 지난 2월4일 여성계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여성들이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을 겪지 않는 나라를 만들겠다”(2014년 신년 구상)는 다짐을 거듭 반복했다. 이날 정부는 ‘일하는 여성을 위한 생애주기별 경력유지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제목은 거창했으나, 내용은 성글었다. 대선 공약이던 ‘아빠의 달’은 내용상 후퇴했고, 시간제 보육반 등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만 가득했다. 시간선택제 일자리 확대는 ‘만병통치약’인 양 또 등장했다.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성은 항상 불안하다. 임신부는 육아휴직은커녕 당장 사직서를 써야 할까봐, 워킹맘은 종종걸음 치며 하루하루 버티면서도 ‘육아와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할까봐, 주부는 다시 일터로 나갈 수 없을까봐 걱정이다. 우리나라의 여성 고용률(53.5%)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 수준이고, 남녀 간 임금 격차(39%)는 1위다. 여성 대통령은 여성들의 불안을 얼마나 덜어줬을까? 20~60대 여성들에게 직접 들어봤다.

20대: ‘강요된 시간제’ 출발선에 서다

유일하게 어금지금하다. 여성 고용률이 남성을 앞서거나, 엇비슷한 시기는 20대뿐이다. 신규 채용 때 ‘여풍’은 매섭다. 지난 3년간 신규 임용된 판검사 중에 여성이 60%가 넘는다. 각종 고시나 전문자격증 시험, 대기업 입사에서도 여성이 단연 돋보인다. 그런데 또각또각 하이힐을 신고 ‘취업 문턱’을 넘으려는 20대 여성들의 표정이 밝지 않다. 시간제 일자리를 강요받고 있는 탓이다.

교사를 꿈꾸는 조영은(25)씨는 요즘 고민이 많다. 최근 정부는 2017년까지 시간선택제 교사 3600명을 뽑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주 15~25시간 일하는 교사로, 임금은 정교사의 70% 수준이다. 가뜩이나 바늘구멍처럼 좁은 임용고시를 통과하기가 더 어려워질 게 분명하다. 동국대 국어교육과 4학년인 조씨는 “서울 지역 국어교사 임용고시의 경쟁률이 18 대 1이다. 학교 선배 중엔 06학번 이후로 임용고시에 붙은 사람이 없다. 정교사 정원은 묶어놓고 기간제 교사에 이어 시간제 교사까지 늘린다고 하니 우리더러 기간제 아니면 시간제로 가라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기간제 교사는 현재 4만여 명(전체 교사의 1%)이다. 1년마다 계약해야 하므로, 여자 기간제 교사는 임신·출산과 동시에 학교를 그만둬야 한다.

올해 공기업과 준정부기관, 공공기관 등은 채용 인원의 5%를 시간제로 뽑을 계획이다. 500대 기업의 신규 대졸자 채용 계획은 지난해보다 다소 축소됐다. 그럼에도 대기업들은 시간제 일자리는 늘리겠단다.

30대: ‘육아냐 일이냐’ 갈림길에 서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 육아로 인한 퇴직 역시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다. 여성들이 출산·육아 부담 때문에 가장 많이 퇴직하는 시기가 바로 30대다. 그리하여 35~39살 여성 고용률은 54.4%로 뚝 떨어진다.

육아는 꼭 여자만의 몫일까? 박근혜 대통령은 아니라고 했다. 대선 공약으로 ‘아빠의 달’을 내세우며, 출산휴가 90일 중 한 달을 남편도 쓸 수 있게 하고 정부가 월급을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내놓은 정책은 슬쩍 후퇴했다. 맞벌이 가정에서 두 번째로 육아휴직을 쓰는 사람(대부분 남편일 가능성이 높다)에게 첫 달치 월급을 통상임금의 100%(기존엔 40%)로 주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남성 육아휴직자는 고작 2293명(전체 육아휴직자의 3.3%)이었다. 남성들은 과연 돈이 적어서 육아휴직을 안 쓰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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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외국계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남매를 키우고 있는 배정아(38)씨는 제약회사에 다니는 남편에게 물었다. “이제 당신도 육아휴직 할 수 있는 거야?” 남편의 답. “여직원들도 출산휴가 3개월만 쓰는데, 당연히 남자들은 꿈도 못 꾸지.” 배씨는 “내가 회사 다닐 때도 출산휴가를 다녀오니 승진에서 한 번 누락되더라. 심지어 진급이 늦은 남자 직원에게 양보하라고까지 했다. 부장 이상 직급엔 아예 여자가 없었다”고 말했다. 직장에 ‘유리천장’이 없었다면, 배씨의 선택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배씨와 동갑내기인 강지민(가명)씨는 지난 1월 회사에 사표를 냈다. 육아휴직 1년을 마치고 2월10일 복직할 예정이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15년간의 직장생활을 접기로 했다. 강씨는 건강검진센터 영업관리직으로 일했다. 2011년 딸아이를 낳았을 때만 해도 회사에선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딱 3개월의 출산휴가만 쉬고 나갔다. 그런데 아이를 돌봐주던 양가 부모님이 편찮으셨다. 결국 육아휴직을 쓸 수밖에 없었다. 팀장인데 자리를 비우는 게 회사 눈치가 보였다. “막상 복직하려니 아침 7~8시 출근 시간에 아이를 받아줄 어린이집이 없더라고요. 24시간 운영하는 국공립 어린이집은 대기 순번이 100번을 훌쩍 넘고.”

반면 이주은(38·가명)씨는 회사에서 10년 넘게 꿋꿋이 버티는 중이다. 공공기관인 회사에서 육아휴직- 그것도 3개월뿐이었지만- 을 사용한 건 이씨가 최초였다. 복직 이후 2010년생인 아이는 조선족 입주도우미가 키웠다. 그런데 설날을 사흘 앞두고 입주도우미가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통보했다. 눈앞이 캄캄하다. 월급의 절반 이상을 도우미에게 주고, 서울 노원구에서 살다가 회사와 자동차로 5분 거리인 중구로 이사오며 안간힘을 쓰는 중에 맞이한 최대 위기다.

“답답하고 한숨이 나왔다.” 강지민씨는 정부가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정책이 “육아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다. 육아휴직 대신에 주 15~30시간 단축근무할 수 있도록 하는 ‘육아기 근로단축’ 제도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현행 1년인 근로단축 기간을 2년으로 늘리고, 급여를 통상임금의 40%에서 60%(상한 93만7500원)로 올려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제도를 지난해 사용한 사람은 736명뿐이다. “남자 육아휴직이니, 육아기 근로단축이니 다 주는 돈이 적어서 못 썼던 게 아니잖아요. 차라리 육아휴직 기간을 2~3년으로 늘려주거나, 장애인 의무고용 비율을 지키지 않은 기업한테 과징금을 물리듯이 경력 단절 여성 의무고용 비율을 정해주는 게 훨씬 효과적일 거예요.”

40대: 엄마들, 다시 재취업 전선에 서다

어느 정도 아이를 키워놓고 나면, 엄마는 자기 인생을 되찾고 싶다. 학원비라도 보태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40대 여성을 재취업 시장으로 내몬다. 실제 30~39살에 50%대로 주저앉았던 여성 고용률은 40살 이후 60%대로 높아진다. 그러나 40대엔 생계형 하향 취업이 많다보니, 비정규직 비중이 남성보다 20%포인트나 높다.


학원비라도 보태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40대 여성을 재취업 시장으로 내몬다. 30대에 50%대로 주저앉았던 여성 고용률은 40대에 60%로 높아진다. 그러나 생계형 하향 취업이 많다보니, 비정규직 비중이 남성보다 20%포인트나 높다.


경력 단절 여성의 48.7%(2012년 보건복지부 조사)는 “아이를 믿고 맡길 곳이 없어서” 회사를 그만둔다. 정부는 우선 보육·돌봄 시설을 늘리기로 했다. 국공립 어린이집은 매년 150곳 늘리고, 방과후 초등돌봄교실은 올해 1~2학년을 시작으로 2016년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재취업 지원도 강화한다. 고학력 경력 단절 여성만을 위한 맞춤형 취업을 제공하는 ‘리턴십 프로그램’도 도입할 방침이다. 전일제 노동자가 시간제로 전환을 요구할 수 있는 사유도 육아 외에 임신, 가족 간병, 학업 등으로 확대한다. 그러나 여전히 시간제에서 전일제로의 전환 청구권은 보장되지 않는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를 둔 안은숙(40)씨는 지금도 밤마다 “언제쯤 내 인생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한다고 했다. 10년 동안 일했던 공연기획사에서 2004년 퇴직한 이후 안씨는 직장생활과 멀어졌다. 퇴직 뒤 한동안은 “공연 프로젝트가 있으니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을 자주 받았다. 하지만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선뜻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없었다. 안씨는 “초등돌봄교실도 아직 믿음이 안 간다. 정부가 제시하는 유인책이 큰 효과가 없어 보인다. 시간제 일자리를 늘린다고 하지만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하려는 게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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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제 일자리가 못마땅하긴 김인자(45·가명)씨도 마찬가지다. 김씨는 지난해 초까지 구청 등에서 시간제로 일했다. 백화점 관리직, 중소기업 경리, 구청·시청 아르바이트 등 거쳐온 직업만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지 못할 정도다. 제법 경력도 있고 컴퓨터활용·전산회계 등을 배우면서 몇 군데 취업 원서를 넣었지만 연락은 오지 않는다. “기업에서도 40대 아줌마보다는 젊은 사람을 원한다. 그런데 사실 40대는 집 대출금, 아이들 학원비 등 인생의 어느 시기보다 돈이 많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시간제 일자리로 버는 수입은 푼돈이라 큰 도움이 안 된다.”

정부의 시간제 일자리 확대 정책 덕에 재취업 길이 좁게나마 다시 열리긴 했다. 김명선(44)씨는 지난해 9월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다. 2000년 첫아이 임신과 함께 한미은행을 떠난 뒤 13년 만의 복직이다. IBK기업은행이 은행권 최초로 경력 단절 여성을 시간제로 뽑았는데, 2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것이다. 본점 외환사업부에서 하루 4시간씩 근무하는 김씨는 정년(59살) 보장에다 정규직과 똑같은 복지 혜택을 받는다. 오후 2시에 퇴근하면, 아이들의 하교 시간 전에 귀가할 수 있다. 김씨는 “아이들이 어릴 때는 병치레가 많아 직장에 다닐 엄두를 못 냈고, 경력 단절 기간이 길어서 재취업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일과 가정을 함께할 수 있어서 만족한다”고 말했다.

50~60대: ‘밑바닥’ 저임금 일자리에 서다

남편들이 퇴직하면, 50~60대 어머니들이 생계를 책임진다. 그러나 막상 일하려 해도 청소부나 베이비시터, 요양보호사 이외엔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 그래서 이인숙(62)씨도 2012년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9년 동안 동네 화장품 가게도 운영해보고 대형마트 분식 코너도 맡아봤지만 평생 직업이 되진 못했다. 이씨는 지금 서울의 한 요양원에서 24시간 교대근무하며 월 130만원을 번다. 이씨는 “70살짜리 요양보호사도 같이 일한다. 몸이 견딜 때까지는 계속 일하고 싶다”고 했다. 60~64살 여성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은 무려 63.8%에 이른다. 정부가 구태여 시간제 일자리를 늘리지 않아도, 사회 밑바닥을 지탱하는 저임금 시간제 일자리엔 이미 수많은 ‘어머니’들이 서 있다.

여성 대통령의 여성정책은 몇 점이나 될까? 여성들의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주기엔, 이번 대책은 역부족으로 보인다. 되레 애먼 곳을 긁기도 했다. 하루 최대 6시간짜리 ‘시간제 보육반’ 시범사업이 그렇다. 국공립 어린이집에 전담반과 전담교사를 배치해, ‘시간제 일자리 부모’를 위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취지다. 그런데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지금도 보통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는 시간은 부모 마음이다. 하루 2시간이든, 6시간이든 상관없다. 한 달에 11일만 넘게 가면 정부가 보육비를 지원해준다. 그러다보니 시간제와 전일제 역차별 논란도 나온다. 서울의 국공립 어린이집 대기자만 10만 명에 이르는 탓이다. 시간제 일자리만 강조하다보니 나온, 어이없는 헛발질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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