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7월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뒤 한국과 미국에 ‘북한 붕괴론’이 급속히 퍼졌다. 3년 안에 북한이 망할 것이라는 얘기가 떠돌고, 김영삼 대통령까지 북한 붕괴를 언급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해 말 ‘장성택 처형’ 이후 보수언론은 물론, 정부 안에서까지 북한의 ‘급변 사태’와 관련한 직간접적인 언급이 쏟아지면서 급변 사태 가능성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는 듯하다. 급변 사태는 현 체제가 불안정하며 그것이 체제 붕괴로 이어질 거라는 설명틀이다.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지금의 북한 붕괴론은 1994년의 ‘빗나간 예측’과 다를까? 전문가 설문조사에서는 ‘김정은 체제는 안정성이 높다’는 의견이 다수(13명 가운데 10명)였다. 수치로 계량화(불안 0~안정 9)했을 때 평균 6으로, 중간값(4.5)보다 높았다. 김정은 체제의 붕괴 가능성(작다 0~크다 9)은 이보다 더 낮은 평균 2.92로 나타났다(78쪽 표 참조).
체제의 공고함, 저항세력 부재김정은 체제가 안정적이며, 따라서 붕괴 가능성도 낮다고 보는 쪽은 크게 세 가지 이유를 꼽았다. 우선 지배 권력 집단의 공고함이다. 장성택 처형을 김정은 체제 안정의 신호로 보는 시각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김정은 체제를 불안정하게 보는 건 외부 세계의 편견이다. 내부에 반대 세력이 없다. 장성택 처형으로 오히려 충성 계층이 더 늘어났다. 어느 누가 권력이 있다 해도 세도를 부리기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과거에도 반대파가 숙청된 뒤 체제는 더 공고해졌다는 것이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도 “후견인, 2인자를 날리는 건 그만큼 권력이 공고화됐다는 것”이라며 “북한은 서로 이해관계가 엇갈리지 않는 지배연합을 유지하고 있고, 그들의 이해관계는 수령제 유지”라고 말했다. “지난 2년 동안 당 외곽 조직과 군부까지 세대 교체를 했다. 불안 요인으로 해석할 게 별로 없다”(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체제의 공고함은 ‘저항 세력’의 부재를 뜻한다. 박순성 동국대 교수는 “김정은 체제는 독재국가의 속성을 모두 갖고 있다. 권력 집단은 절대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로 뭉쳐 있고, 중상 엘리트의 결집도와 대안 체제에 대한 구상은 부족하다. 주민들도 70년에 걸친 독재 체제에서 어떤 비전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석희 연세대 교수도 “북한의 권력층은 충성심도 있지만 자기 이익도 걸려 있다. 김정은이 없을 때보다 있을 때가 낫다고 여긴다. 반면 전방 지역에서 굶어 죽는 형편없는 사정에서 주민들이 조직화할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정성장 수석연구위원은 “엘리트나 주민들이 저항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지 못하다. 북한의 이데올로기와 문화 자체가 봉건적인 권력 세습을 정당화한다”고 지적했다. 인명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는 “사람이 아니라 체제의 문제다. 북한은 일종의 왕조 체제라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포 분위기 조성, 불상사 날 것김정은 체제는 ‘준비된 정권’이라는 점을 안정성의 근거로 제시한 이들도 있다. “세습 과정에서 별다른 돌출 변수가 없었다”(김종대 편집장)는 것이다. 홍익표 민주당 의원은 “김정은 체제는 급조된 게 아니라 2009년 김정일이 쓰러진 직후부터 준비돼왔다. 김정일 후계 체제가 없는 걸 만든 것이었다면, 김정은 후계 체제는 이미 갔던 길을 간 것이다. 북한식 정권 교체에 대한 나름의 노하우와 권력 유지 수단이 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정창현 대표도 “김정은 체제는 2009년부터 준비됐다. 대내외 정치 노선이나 정책 방향도 2011년 김정일 사망 전에 준비됐다. 노동당 내부의 권력 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군부에 대한 당의 통제가 확고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시각도 있다. 김정은 체제가 불안정하다고 평가하는 이들은 장성택 처형을 체제 불안의 조짐으로 해석하면서 북한 붕괴 가능성을 높게 봤다. 김정은의 리더십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조봉현 IBK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김정은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권력을 승계해 전체적으로 북한을 아직 장악하지 못했다. 장성택 처형 이후 이런 불안은 더 증폭됐다고 본다.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김정은이 처형을 지시했다기보다 군부 강경파 등 장성택 반대 세력이 결집한 결과다”라고 분석했다.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도 “김정일 수령 체제는 종속적인 상하 관계였다. 그러나 김정은은 후계자 훈련이 덜 됐고, 제대로 멘토 역할을 해줄 사람도 없다.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 마식령스키장의 경우에서도 신뢰의 위기가 올 수 있다. 스키만 타려고 북한에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적자가 쌓이면 김정은 본인 문제로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체제의 불안정성이 급변 사태나 붕괴로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약간 의견이 엇갈렸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엘리트들이 똘똘 뭉쳐 단일대오로 수령을 따르는 게 아니라, 내부 균열과 갈등이 더 커지는 양상이다. 장성택 처형은 수령 시스템 내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수령의 권위만 갖고 지배집단을 통일하기는 쉽지 않다. 집권층 내부의 균열로 변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그러나 가까운 시기에 붕괴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장기적으로 균열이 커져 불안정성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는 “북한 주민들은 수십 년 동안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지 않도록 순치돼왔기 때문에 민란으로 정권 변동이 일어날 가능성은 아직은 없다. 그러나 장성택 등에 대한 숙청극이 폭넓고 단계적으로 진행되면서 북한의 권력 계층 안에 굉장한 공포 심리를 조장하고 있다. 독재 체제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 충성심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고 결국 불상사로 가게 된다”고 말했다. “숙청극이 북한 권력층 내부에 ‘내일을 알 수 없다’는 불안감과 공포 심리를 조장해, 머잖은 장래에 김정은의 신상에 위해가 가해지는 상황이 잉태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태경 의원은 “어떻게 붕괴될지 경로를 말하긴 어렵지만, 김정은이 리더십 위기에 봉착하면 민심이 악화하고 상층부에서 반기를 들 가능성이 높아진다. 김정일에게 신세진 사람은 많지만, 김정은에게 신세진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숙청되고 간접적으로 피해 입는 사람이 더 많다. 지속 가능한 체제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경제성장이 체제 안정에 끼치는 효과북한의 경제 사정이 상대적으로 나아지고 있다는 데는 전문가들의 분석에 별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경제 변화가 체제 안정성에 끼치는 효과에 대한 분석은 달랐다. 경제 사정 호전이 체제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과 경제 사정이 나아지면 오히려 체제에 대한 저항 의식이나 상대적 박탈감이 생겨 불안정성이 커질 것이라는 의견이 엇갈렸다.
홍익표 의원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김정일 체제보다 현재 상황이 낫다. 농업 통계를 보면 내년 수확은 자급자족이 되는 수준이다. 경제 상황 전체가 획기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난의 행군 시기에 비해 훨씬 안정적이다”라고 분석했다. 정성장 수석연구위원도 “한겨울인데도 연탄값, 쌀값이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 가격이 그대로 유지만 돼도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주민들에게는 떨어지면 더 좋다”고 말했다. 정창현 대표는 “김정은 시대에 들어선 뒤 경제적으로 플러스 성장을 하고 있고, 식량 사정도 상당히 호전됐다. 북한은 2009년 핵실험 이후 내부 자원을 경제 쪽으로 돌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각종 경제 건설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이 단기적으로 체제 안정화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앞으로 5년 정도는 성장 기조가 계속될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반면 조봉현 수석연구위원은 “경제성장률이 플러스로 돌아서는 등 경제 사정이 좋아진 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경제가 좋아지면 주민들의 기대 수준도 높아진다. 돈맛을 알게 되고 외부 정보를 알게 된다.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이 불만과 갈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하태경 의원은 “김정은 시대의 큰 변화는 시장에 대해 공식적인 폐쇄 조처를 한 적이 없다는 거다. 사실상 시장을 인정했고, 그로 인해 경제가 활성화됐다. 그런데 주민들의 삶이 나아지면 정치·사회적 요구가 높아지고 저항 의식이 싹트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갑우 교수는 “를 보면 기업이 인센티브로 휴대전화를 지급하고, 정리해고를 암시하는 발언도 나온다. 경제 관리와 관련해 기업 단위의 자율성을 확실히 주는 쪽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하면서 “경제가 아주 어려울 때보다는 좀 나아질 때 체제 변화 가능성이 생긴다”고 덧붙였다.
“미·중, 북한 체체 붕괴로 이익 없어”김정은 체제를 안정적이라고 평가하는 세 번째 근거는 북한을 둘러싼 대외 환경이다. 한석희 교수는 “중국은 장성택 처형에 대해 북한의 국내 문제라며 상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장성택 처형이 불안 요인이었다면 중국이 그런 입장을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홍익표 의원은 “국제적으로도 체제 위협 강도가 예전과 다르다. 북한 스스로 핵이라는 체제 유지 수단을 보유한 상태라는 점에서 1990년대 국제적으로 고립됐던 때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순성 교수는 “대외 세력들도 북한의 체제 변동으로 자기 이익을 얻겠다는 국가 전략을 갖고 있지 못하다. 중국이나 미국이 북한 체제 붕괴로 자기들에게 이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명진 대표는 “북한은 중국의 대일본, 대미국 견제에서 좋은 역할을 해주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이기 때문에 중국이 북한 체제 붕괴를 부담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이동복 대표는 “북한 정권이 안정되려면 제일 필요한 게 중국인데, 중국과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관계가 나빠졌다. 중국은 북한을 설득해서 핵을 포기시키는 데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북한의 현 체제를 변혁시켜야 핵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쪽으로 정세관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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