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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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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들이여, 짖지 않는 개로 살 것인가

한국의 전투적 사회운동에 매혹됐던 귀화 교수의 충고…“분노와 저항만이 우리의 자유를 지킨다”
등록 2013-11-19 15:17 수정 2020-05-03 04:27
분노와 침묵 사이에 세상의 복잡함이 있다.
한 정부 부처 공무원은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가끔 조소의 대상이었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공포의 대상이다.” 그는 “박 대통령이 무섭다”고 했다. 공무원 사회에선 ‘대통령에게 찍히면 찍혀나간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취임 1년도 지나지 않아 박 대통령의 ‘공포정치’는 침묵을 낳고 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태가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공개→채동욱 혼외아들 논란 감찰→윤석열 징계’까지만 해도 수세에 몰린 정권의 ‘정국 전환용 카드’로 보였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화→전국공무원노동조합 검찰 수사→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부턴 단순한 정치공학의 선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의 떨어지지 않는 지지율이 국민 기본권에까지 도전하는 자신감의 바탕이다. 진보 진영을 무력화해 한국 사회의 시계를 ‘잃어버린 10년’(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의도란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을 비판하는 시민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의 ‘프랑스 폭언’이나, “군 사이버사령부의 대국민 심리전은 ‘국민 오염’을 방지하는 정당한 임무 수행”이란 김관진 국방부 장관의 강변은 일종의 징후들이다. 해소되지 못하는 분노는 침묵을 부르고, 좌절한 분노는 절망이 된다. 분노할 일이 너무 잦으면 분노에 무감각해지기도 한다. 분노할 시기를 놓치면 분노할 자유마저 빼앗길 수도 있다. 은 절망의 문턱에서 분노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프랑스의 노투사 스테판 에셀(지난 2월 작고)은 말했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_편집자
1987년 6월항쟁 당시 서울역 앞에 모인 시민들이 ‘대통령 직선제 쟁취’와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1987년 6월항쟁 당시 서울역 앞에 모인 시민들이 ‘대통령 직선제 쟁취’와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저는 가끔 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언제부터 ‘코리아’와 본격적으로 사랑에 빠졌는가에 대해서요. 아무리 생각해도 ‘운명적으로 반한’ 그 시점은 1991년 가을, 고려대학교에서 몇 개월을 보내면서 당시 서울의 ‘데모 문화’를 접할 때였습니다.

물론 페레스트로이카 시절의 소련이라고 해서 데모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저만 해도 고등학교 시절이나 대학 입학 직후 데모에 많이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본 데모와는 두 가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서울의 데모야말로 어떤 궁극적인 ‘숭고정신의 발휘’로 느껴진 이유입니다.

숭고함 느껴지던 그 시절 한국 학생운동

첫째,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당 중앙의 노선을 지지하는 이상, 소련에서의 데모는 사망이나 부상을 각오하고 감행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진압봉과 방패가 날아다니고 돌멩이가 던져지고 화염병이 터지는 서울의 아비규환은, 정말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회의할 정도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둘째, 소련에서는 자본주의를 좀더 급격하게 도입하자고 데모를 했던 ‘자유민주파’(즉 ‘자본파’) 인사들이 어디까지나 스스로 자본가가 되어 현재보다 더 부유해지려고 데모한 데 반해, 제가 서울에서 알게 된 ‘데모 학생들’은 졸업도 하지 않고 위장취업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가난하게 살려고 했습니다. 스스로 위험과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을 보면 ‘이거야말로 숭고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고 왠지 ‘코리아’가 존경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지금까지 한국학을 해온 것은 아마도 그 초발심 덕분인 듯합니다.

과연 저뿐인가요? 제가 아는 일본인·미국인 중에도 1980년대 한국을 방문해 그 저항 에너지에 감복해 한국학도가 된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케이팝에 이끌려 전세계 한국학과의 문을 두드리는 요즘 세대의 학생들을 보면 격세지감 비슷한 걸 느끼는 이유입니다.

저항…. 한국 근현대사를 특징지은 이 단어의 의미는 지난 60여 년 동안 참 괄목할 만한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한국전쟁의 전야에 ‘저항’은 지식인에게도 얼마든지- 후대의 체 게바라처럼- 총을 메고 전투를 치르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습니다.

유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한 천재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박치우(1909~49)의 저항은 프란츠 파농이나 체 게바라의 그것보다 먼저 아니었을까요? 박치우 같은 지식인들의 저항 방식은 치열했던 만큼 그들이 원하는 목표도 아주 굵직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원한 것이죠. 유격전을 바로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 정도의 치열함과 목표도 1970년대 말까지 일각에서나마 잔존해왔습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의 전사들도 궁극에 가서 무장봉기를 계획했으며 사회주의 원칙에 기반한 통일을 원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사형당한 사람(신향식)도, 옥사한 사람(이재문)도, 옥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요절한 사람(김남주 시인)도 있었습니다.

박치우·남민전의 치열함은 어디 가고

약간의 변화가 감지된 것은 한국이 세계 주변부에서 준핵심부로 진입한 1980년대부터였습니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등 사회주의 지향 그룹도 일부 남았지만, 민주화운동의 상당 부분은 대체로 고문실과 땡전뉴스가 없는 ‘정상적’ 자본주의 국가를 원했던 셈입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 경향을 대표했던 유시민 등은 2000년대 신자유주의 정권의 실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저항의 흐름은 크게 세 줄기로 나뉘었습니다. 온건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나 전향한 일부 사회주의 지도자들(이재오·김문수 등)이 주류 정계에 합류해버림으로써 ‘저항’을 마감했고, 전향을 거부한 일부 사회주의자들(노회찬·심상정 등)은 사민주의로 방향을 바꿔 의회주의 노선을 걸었습니다. 급진적 좌파 민족주의자들(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등)은 정권이 판 함정(1996년 ‘연세대 사태’ 등)에 빠져 사회에서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이 시기의 최대 규모 대중 저항인 1996~97년 총파업까지도 대체로 ‘법 개악’을 막으려는 수세적 차원에 머물렀습니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이 경향은 심화됐습니다. 가장 큰 대중적 투쟁은 줄줄이 패배를 맞은 ‘저지형’ 투쟁들(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 투쟁, 경기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신축 저지 투쟁, 광우병 의심 쇠고기 수업 저지 투쟁 등)이었고, 노동운동의 가장 급진적 부대가 된 비정규직들은 이제 ‘노동법 개악 반대’도 아닌 그저 ‘부당노동행위 반대’나 ‘정규직 전환’ 차원에서 싸우게 됐습니다. ‘회사의 가족으로 받아들여달라’는 싸움은 가장 흔한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된 셈입니다.


“‘광신 정권’의 폭거에 대한 저항 수준은 2008년 촛불항쟁에도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1996~97년의 총파업이나 1987년 6월항쟁 및 노동자 대투쟁과의 비교는 아예 무의미할 정도고요. 대체 ‘저항 역사의 곡선’은 왜 시간이 갈수록 밑으로 처질까요.”


노동자 대투쟁이 수반한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달리 2008년 촛불항쟁은 노동운동과의 관계 만들기에 실패해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투쟁의 의제는 이제 ‘체제’의 문제가 아닌 그저 사기꾼 같은 한 통치자의 사대주의적 추태와 식품안전 문제였습니다.

지난 ‘사기꾼형 정권’과 달리 이번 정권은 ‘광신도형’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저지르는 폭거는 2008년과 비교도 안 될 정도입니다. 예컨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법외노조화한 것은 역사의 시계추를 전교조를 합법화한 김대중 정권 이전으로 돌려버렸습니다.

‘나 홀로 자본가’가 되어버린 청년들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심판 청구는 이것보다 더합니다.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의 ‘원조’에 해당하는 정당은 1990~92년의 민중당입니다. 당시 권위주의적 노태우 정권마저도 민중당을 감히 해산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정권이 통합진보당을 마치 ‘북괴의 도구’처럼 묘사하려 하지만, 통합진보당의 일부 좌파 민족주의자가 주체사상 등에 긍정적 태도를 보인다 해도 통합진보당의 성격은 크게 봐서 민중당이나 앞선 시절의 혁신정당들(사회대중당·통일사회당·민주사회당 등)과 대동소이합니다. 복지주의와 좌파 민족주의가 결합한 전형적인 한국적 사민주의 단체일 뿐입니다. 아버지마저도 혁신정당들을 완전히 강제 해산시키지 못했는데, 그 딸은 이제 아버지가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완수하려는 모양입니다.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기독교 공동대책위원회’와 대학생들이 지난 6월 서울 중구 청계광 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와 국정조사 실시를 촉구하고 있다. 정용일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기독교 공동대책위원회’와 대학생들이 지난 6월 서울 중구 청계광 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와 국정조사 실시를 촉구하고 있다. 정용일

그럼에도 이 폭거에 대한 저항 수준은 아직까지 2008년 촛불항쟁에도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1996~97년의 총파업이나 1987년의 민주화 항쟁 및 파업 대투쟁과의 비교는 아예 무의미할 정도고요. 도대체 ‘저항 역사의 곡선’은 왜 시간이 갈수록 이렇게 밑으로 처질까요. 정권은 오히려 악랄해지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일찌감치 얌전해진 것일까요.

흔히들 대학을 취업 학원으로 만들어버린 생계 불안을 저항을 잠재운 요인으로 꼽는데, 이는 진실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생계 불안으로 치면 4·19 혁명을 일으킨 학생들이 훨씬 더 불안했습니다. 후기 자본주의 특유의 소비주의 풍토와 신자유주의가 시민적 에토스(보편적인 윤리 규준)를 크게 바꿨다는 사실은 좀더 큰 설명틀이 되겠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몸값을 높여 좋은 조건에 노동시장에 팔아야 하는 ‘나 홀로 작은 자본가’가 돼 상호 간의 경쟁에 매몰된 원자화된 개인들에게 ‘연대’와 ‘투쟁’은 그저 ‘귀찮은 일’로만 보입니다. 세상이 한심해 보이면 인터넷에다 비판적 댓글 한두 개 달 뿐, 그 이상의 투쟁은 이미 ‘성공을 위한 경쟁’에 바쳐야 할 ‘나’의 자원 낭비입니다. 댓글이 국정원의 대국민 심리전 도구가 된 것도 참 의미심장합니다. 원자화된 사회에서 거의 유일한 상호 소통 도구는 이제 댓글이기 때문이죠.

제가 1991년에 본 고려대생들은 노태우 정권이 비도덕적이라고 비분강개했는데, 신자유주의 시대엔 ‘도덕’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 불가능합니다. 지나치게 도덕적인 것은 오히려 무한경쟁에서는 약점이 되니까요.

다른 측면의 이야기지만, 1991년 학생들은 한반도 남쪽 곳곳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미군에 대단히 분노했습니다. ‘한국 여자를 추행하는 미군’은 비분강개의 대상이었죠. 그런 미군이 없어진 것도 아니지만 비분강개가 거의 사라진 배경에는 중국·동남아시아·러시아 등지에서 수많은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한국인 섹스관광객 등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는 게 아닌가요. ‘미국의 신식민지’는 이제 수많은 나라를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아류 제국주의적 주체가 됐는데, 이에 대해 ‘순량한 국민’은 대리만족을 느끼는 듯합니다.

싱가포르식 ‘선진형 권위주의’로 갈 것인가

저항이 하강곡선을 탄 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형태와 국제적 위상 등의 변화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박근혜 정권의 폭력에 맞서지 못할 경우 한국은 결국 싱가포르처럼 ‘선진형 권위주의 국가’로 전락할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1991년과 같은 데모가 쟁취한 자유, 예컨대 고문으로부터의 자유나 국가보안법으로 제한된 표현의 자유 등도 저항이 있을 때만 유효합니다. 저항의 하강곡선이 땅에 닿는 순간, 이 자유도 얼마든지 증발될 수 있습니다. 결국 지금으로서는 ‘분노와 저항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다’고 저는 직감합니다. 저항의 파도가 다시 한번 오지 않으면 나중에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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